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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채운몽
작가 : 채헌
작품등록일 : 2017.6.19

조선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된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 세자빈 월, 기루 무사 소쌍을 만나 운명인 듯 우연인 듯 사랑에 빠진다. 아니라 해도, 아니 된다 해도 돌아설 수 없었던 그녀들의, 무지개빛 로맨스

 
2장. 봄은 더디게 피어나니
작성일 : 17-06-20 13:59     조회 : 23     추천 : 0     분량 : 8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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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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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노라, 어쩜 그러실 수가 있어요? 너무하세요, 진짜!”

 

  석가이는 별궁에 돌아온 뒤부터 내내 투덜거리고 있었다.

 

  “제가 코찔찔이 어린애도 아니고, 그분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끌고 오실 수가 있어요? 갑자기 힘자랑이라도 하고 싶으셨어요?”

 

  “그럼 네가 낯선 사내를 덮치도록 보고 있어야 했더냐?”

 

  “첫눈에 딱 알아봤다구요. 그분은 제 운명의 정인이 틀림없어요. 그분도 분명 아셨을 거예요. 우리가 붉은 실로 이어진 인연이라는 걸요.”

 

  “그럼 무엇이 걱정이냐? 붉은 실로 이어진 인연이라면 언제고 다시 만날 터인데.”

 

  석가이가 눈동자를 반짝 빛내며 월의 앞으로 다가앉았다.

 

  “그렇겠죠? 정말 그분과 다시 만날 수 있겠죠?”

 

  월이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자 석가이가 기대에 찬 얼굴로 두 손을 모았다.

 

  “그나저나 그분은 어쩜 그리 못되셨대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못돼도 너무 못됐잖아요. 세상 혼자 사는 것도 아닌데 그리 생기면 어떡한대요. 사람이 양심이 있고 염치가 있어야지, 그렇게 혼자만 잘나버리면 다른 사람들은 어찌 살라구. 죄다 접시물에 코 박고 죽으라는 거야, 뭐야.”

 

  “그 정도까진 아니던데.”

 

  “음마, 우리 마노라 잘생긴 세자저하만 보셔서 그런가, 현실 감각을 완전히 상실하셨네. 그 정도면 조선 최고래도 손색이 없죠.”

 

  월의 미지근한 반응에 석가이가 침을 튀겨가며 말을 이었다.

 

  “세자저하께서 옥으로 반듯하게 깎아놓은 미남자라면 소쌍이란 사내는 뭐랄까, 거칠고 강한 듯하지만 왠지 속은 한없이 여릴 것만 같은, 그래서 막 안아주고 품어주고 싶게 만드는 그런 미남자랄까요?

 

  하아, 눈빛이 어찌 그리 깊고 그윽한지. 하마터면 빠져죽을 뻔했다니까요.”

 

  간만에 잔뜩 흥분한 석가이를 보고 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웠구나.”

 

  “콩깍지가 아니라 진짜 운명의 상대를 만난 거라구요.”

 

  “운명의 상대라 이마에 써 붙여져 있기라도 하더냐? 꼭 한 번 마주치고 운명의 상대인지 아닌지 어찌 안다는 것이야?”

 

  석가이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탕탕 쳤다.

 

  “우리 마노라 진짜 아무것도 모르시네.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말이에요. 신호가 와요.”

 

  “신호? 어떤 신호가 온다는 것이냐?”

 

  속으로는 귀가 쫑긋했으면서도 월은 자못 관심 없다는 투로 물었다.

 

  “갈비뼈 저 아래가 시큰시큰하고 간질간질하고, 코끝이 알싸한 것이, 에휴, 그런 게 있어요. 두고 보세요. 반드시 그분과 맺어지게 될 테니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야 네게 원망을 안 듣지 않겠느냐.”

 

  석가이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아까 보니까 등에 거문고를 멨던데, 뭐하는 분일까요?”

 

  “거문고를 멨으니 악공이겠지.”

 

  석가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악원에 그리 잘난 악공이 있었다면 제가 모를 리가 없는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석가이가 손뼉을 짝 쳤다.

 

  “아, 맞다. 이번 세자저하 탄일 진연 때문에 새로 악공과 기생들을 뽑아 올렸다고 했어요. 그럼 이번에 들어온 신참 악공인가 보네. 하아, 그 잘생긴 얼굴로 거문고를 뜯으면 얼마나 듣기 좋을꼬.”

 

  “잘생기면 거문고도 잘 뜯는다더냐?”

 

  “마노라, ‘만완얼’이란 말도 모르셔요?”

 

  “만완얼? 처음 듣는 말인데, 어느 책에 나오는 구절이냐?”

 

  “책에 나오는 구절이 아니라 요즘 저자에서 유행하는 말이어요. 만완얼, 만사의 완성은 얼굴이다! 그림을 그리든, 장사를 하든, 공부를 하든 요새는 일단 잘나고 봐야 한다니까요.”

 

  석가이가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탄식했다.

 

  “소쌍 악공이 타는 거문고 연주 들어보고 싶다. 악공이 거문고도 타고, 나도 타고. 아이고, 생각만 해도 황홀하구나.”

 

 

 

  문이 열리고 똑같이 생긴 애기나인 둘이 쪼르르 들어왔다. 쌍둥이 자매 춘덕과 춘복이었다. 툭 튀어나온 이마에 커다란 토끼이빨까지 빼다 박은 듯 닮아 있었다.

 

  “쌍둥이 나인들 오셨구랴.”

 

  석가이가 반가운 기색을 하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근데 누가 춘복이고 누가 춘덕이래?”

 

  “아직도 모르겠느냐. 왼편의 아이가 춘덕이고, 오른편의 아이가 춘복이다.”

 

  춘덕과 춘복이 환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가는 것도 같은지, 가운데 앞니가 하나씩 빠져 있었다.

 

  “자주치마에 옥색저고리까지 똑같이 입고 있으니 도통 분간이 가질 않는데, 마노라는 어쩜 그리 잘 아신대요?”

 

  “마음이 있으면 보게 되고, 보면 분간하게 되는 것이다. 춘덕이와 춘복이에게 애정을 좀 가져주어라.”

 

  “음마, 나인들 간식 가져다 바치는 건 저거든요?”

 

  석가이가 뾰로통해지자 월이 선심 쓰듯 설명을 해주었다.

 

  “콧날이 살짝 되똑한 것이 춘덕이고, 살짝 낮은 것이 춘복이다.”

 

  석가이가 유심히 들여다보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 모양도 다르잖아요.”

 

  춘복이 팔짝 뛰어 뒤통수를 보였다. 엉덩이까지 늘어뜨린 생머리가 윤기 있게 찰랑거렸다. 생머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지밀과 침방, 수방나인들뿐이었다. 세답방 나인인 춘덕이는 지밀나인인 춘복과 달리 머리를 땋아 내렸다.

 

  “아이고, 도무지 모르겠다. 춘덕이가 춘복이 같고, 춘복이가 춘덕이 같고.”

 

  석가이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물러났다.

 

  “그래, 지난번 알려준 시는 다 외웠느냐?”

 

  춘복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춘덕은 영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월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춘덕이부터 읊어보거라.”

 

  춘덕이 꾸지람이라도 들은 듯 고개를 움츠러뜨렸다. 춘복이 ‘인도해수심’하고 첫 구절을 속삭여주었다. 춘덕이 더듬거리며 시를 외기 시작했다.

 

  “인도해수심. 사람들은, 바닷물이 깊다 하나……, 불저, 불저…….”

 

  채 한 구절도 못 외고 춘덕이 입을 다물었다.

 

  “황송하옵니다, 마노라. 이번엔 꼭 다 외려 했는데 스승항아님께서 계속 일을 시키시는 바람에…….”

 

  월의 다정한 시선이 춘복을 향했다.

 

  “춘복이는 다 욀 수 있다 했느냐?”

 

  아까부터 시를 외고 싶어 몸을 달싹거리던 춘복이 기다렸다는 듯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人道海水深인도해수심 사람들은 바닷물이 깊다 하나,

 

  不底相思半불저상사반 내 그리움의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海水尙有涯해수상유애 바닷물은 어디선가 끝이 나지만

 

  相思渺無畔상사묘무반 내 그리움은 아득하여 끝이 없습니다.

 

  携琴上酒樓휴금상주루 거문고 들고 주루에 오르니,      

 

  樓虛月華滿누허월화만 누각은 비었고 달빛만 가득합니다.

 

  彈著相思曲탄저상사곡 그대 그리워 노래하니,

 

  絃腸一時斷현장일시단 끊어지는 것이 거문고 줄만이 아닙니다.”

 

 

  “잘했다. 아주 잘 외웠어.”

 

  월이 대견스럽다는 듯 웃으며 그 사이 석가이가 가져온 송화다식을 춘복에게 쥐어주었다.

 

  “고맙사옵니다, 빈궁 마노라.”

 

  춘복이 깍듯이 절을 하고 다식을 받아들었다. 다식을 본 춘덕이 입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저도 스승항아님께서 일만 안 시키셨어도 다 외울 수 있었사옵니다.”

 

  “그럼 그럼. 우리 춘덕이가 얼마나 똑똑한데. 그깟 시쯤이야 얼마든지 욀 수 있지.”

 

  월이 춘덕에게도 다식을 건네주곤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제야 춘덕의 구겨진 낯이 펴졌다.

 

  “오늘은 두목지의 시를 알려주마.”

 

  “두목지라면 시성이라 불리는 성당의 시인 아니옵니까?”

 

  다식을 오독거리던 춘복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춘복이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지 않사옵니까. 지밀방 삼 년이면 이쯤은 기본이옵니다.”

 

  춘복의 똑 부러지는 대답에 월이 소리 내어 웃었다. 월의 관심을 독차지한 춘복에게 샘이 난 춘덕이 퉁명스레 말했다.

 

  “헌데 빈궁 마노라, 저희 같은 것들이 글 배우고 시 외워 무엇 하옵니까? 스승항아님께서도 궁인들이 글월 읊어봤자 경을 치기 십상이라 하셨사옵니다.”

 

  월이 다식을 아예 접시째 내어주며 고개를 저었다.

 

  “무엇이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글을 알면 보이는 것도 많아질 것이야. 그뿐이냐. 책을 읽으면 몸은 궁에 있어도 마음은 얼마든지 궁 밖으로 나갈 수 있지. 그러니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글공부는 게을리 하지 말거라.”

 

  춘덕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밖이 부산해지더니 나인의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중전마마 납시오.”

 

  춘덕과 춘복이 튀어 오르듯 일어섰다. 놀라긴 월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문안을 드리고 왔는데 별궁엔 웬 일이신가. 월은 얼른 남은 다식을 귀주머니에 담아 춘덕에게 건넸다.

 

  문이 열리고 중전이 들어섰다. 춘덕과 춘복이 손을 모으고 인사를 한 뒤 종종종 뛰어나갔다.

 

 

  * * *

 

 

  춘덕과 춘복은 별궁의 뒷마당 구석진 곳으로 숨어들었다. 남은 다식을 얼른 먹어치우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가지고 있어봤자 선배 나인들한테 죄다 빼앗길 게 틀림없었다.

 

  “빈궁 마노라는 그놈의 글공부 열심히 하란 잔소리만 안 하시면 참 좋을 텐데.”

 

  춘덕이 볼이 터져라 다식을 우겨넣으며 투덜거렸다.

 

  “다 우릴 생각해 하시는 말씀이잖아.”

 

  춘복이 어른스럽게 타일렀다. 동생이면서 언제나 언니인 척 구는 춘복이 얄밉상스러워 춘덕은 부러 어깃장을 놓았다.

 

  “생각해주시는 건 좋은데 너무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시니 그렇지.”

 

  “글공부하란 말이 어째서 터무니없는 말이야?”

 

  “생각해봐. 너나 나나 죽기 전까진 궁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는 신세잖아. 글 좀 읽는다고 뭐가 달라지냔 말이야. 글 읽는다고 우리가 출궁을 할 수 있어, 혼인을 할 수 있어? 아무것도 못 하잖아.”

 

  “그래도 난 빈궁 마노라가 좋아. 궐 안에서 다정히 대해주시는 건 빈궁 마노라뿐이잖아. 글도 배우다 보니 재미있어. 시로 배우니까 훨씬 쉽고 재미도 있고. 언니도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같이 이야기책 읽자.”

 

  춘덕이 남은 다식을 꿀꺽 삼키며 도리질을 쳤다.

 

  “이야기책은 무슨. 난 너처럼 그리 한가하지가 못해. 맨날 옷 뜯고 빨고 말리느라 손에 물마를 틈이 없는데 책은 무슨 책이야. 글공부가 그리 좋으면 너나 실컷 하렴.”

 

 

  * * *

 

 

  “요즘도 애기 나인들에게 글을 가르치느냐?”

 

  월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달포에 한두 번 정도 가르치옵니다.”

 

  중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월을 눈엣가시 보듯 하는 왕과 달리 월을 살뜰히 품어주는 중전이었지만, 세자를 보필하는 데 전력을 쏟아야 할 세자빈이 나인들에게 글을 가르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월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처음엔 한창 어리광 부릴 나이의 아이들이 궁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안쓰러워 마음이나 도닥여줄까 하여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고 보니 마음을 도닥이게 되는 쪽은 월 자신이었다. 나인들의 재롱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이 월이 진심으로 웃는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기에 월은 중전조차 꺼려하는 것을 알면서도 횟수를 줄일지언정 글 가르치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지는 못했다.

 

  “헌데 어쩐 일이시온지…….”

 

  월이 말을 돌리려 조심스럽게 물었다. 중전이 월의 마음을 알고 인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빈궁과 오붓한 시간을 보낸 지가 오래인 듯하여 담소나 나눌까 하고 왔느니라.”

 

  담소라 하지만 정말 두런두런 한담이나 나누자고 오시진 않았을 터. 월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중전의 말을 기다렸다.

 

  석가이가 차반을 들고 들어왔다. 목련차의 진한 향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훈김이 오르는 차를 두어 모금 마신 뒤에야 중전이 입을 열었다.

 

  “세자는 종종 오느냐?”

 

  역시, 다른 할 말이 있어 오신 것이다.

 

  “예. 관상감에서 올린 합궁일마다 빠지지 않고 듭시옵니다.”

 

  “그 외에는? 오지 않느냐?”

 

  월이 대답을 못 하자 중전의 얼굴에 조바심이 서렸다.

 

  “관상감에서 올리는 합궁일이야 한 달에 서너 날도 되지 않는데, 어찌 그때만 온단 말이냐?”

 

  “공부하실 것이 많아 그러한 줄로 아옵니다.”

 

  “애써 변명할 것 없다. 내 그와 꼭 닮은 지아비가 있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니.”

 

  중전이 답답한 마음을 갈무리하려는 듯 차를 마셨다.

 

  “합궁은, 인온지시를 거르지 않고 하고 있는 게야?”

 

  월은 이번에도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부끄러워할 것 없다. 내 너에게 어미와 같지 않느냐. 개의치 말고 대답해 보거라.”

 

  중전의 재촉에도 월은 입술만 깨물었다. 향과 하고 있는 그 무감하고 지루한 행위를 합궁이라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전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후계에 대한 전하의 심려가 얼마나 깊은지 너도 잘 알고 있을 게다.”

 

  물론 알고 있었다. 옥좌를 둘러싸고 아비와 삼촌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을 목도한 왕이었다. 피 터지는 싸움 끝에 아비가 왕이 되었으나 행복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후계를 제대로 세우지 않았기에 생겨난 비극이었다.

 

  왕은 자신만은 이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향은 그런 왕의 바람대로 궁에서 난 적장자로 세자 자리에 올랐다. 이제 그의 아이를 낳아 적통을 잇기만 한다면 후계에 대한 근심은 씻은 듯이 사라질 것이었다.

 

  그러기에 월의 회임은 월 개인을 넘어 왕실의 소임이자 사명이었다.

 

  “성심을……, 다하고 있나이다.”

 

  월의 대답이 미진하게 느껴졌는지, 중전이 잠시 뜸을 두고 입을 열었다.

 

  “궁의 합환이란 국통을 잇기 위한 것이니 사사로운 일이라 할 수 없다. 허나 이 또한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 어찌 사사로운 감정이 전혀 없다 하겠느냐? 때로는 그리 생겨나는 감정이 두 사람을 더욱 밀접하게도 하니, 그 신묘함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우니라. 그러니까 내 말은……,”

 

  중전이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천지간의 조화가 대저 하늘에서 비롯된다 하나 땅이라고 어찌 하는 일이 없겠느냐. 양이 음을 만나 변하고, 음이 양을 만나 움직이기에 천지가 생겨나는 것이다. 양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음이 먼저 움직여 변화를 꾀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느냐?”

 

  에둘러 점잖게 말하고 있지만 한 마디로 월에게 교태도 부리고 세자에게 낭창하게 감겨보라는 주문이었다. 민망한 탓에 자꾸만 장황해지는 말을 적당히 가무려 문 중전이 작은 은도끼 세 개를 엮은 끈을 내밀었다.

 

  “이걸 지니고 있으려무나.”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기자도끼였다. 돈 있는 집에선 은이나 쇠로, 가난한 집에서 나무로 만들어 속옷 끈에 차고 다니는 것이었다. 한 탯줄에 아들 삼 형제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끼는 꼭 세 개가 한 꿰미였다. 월이 기자도끼를 공손히 받아들었다.

 

  “이리 마음을 써주시니 황감할 따름이옵니다. 허나……,”

 

  중전이 말해보라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이름 모를 들풀도 꽃과 나비가 즐거이 노닐고 난 뒤에야 열매를 맺사옵니다. 하물며 사람의 경우야 어떠하겠사옵니까.

 

  아무리 나비가 날갯짓을 하나 꽃이 봉오리를 열지 않고, 꽃이 활짝 잎을 열어도 나비의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결실 맺기가 힘든 것이 당연지사 아니겠사옵니까.

 

  어찌 꽃만, 혹은 나비만 탓할 수 있겠사옵니까.”

 

  자신이 노력을 한다 해도 향이 달라지지 않으면 한계가 있다는 말이었다. 듣기 민망할 만큼 당돌한 말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기에 중전이 대꾸할 말을 쉬 찾지 못했다.

 

  “흠흠, 내 정신 좀 보거라. 할 일이 있었는데 깜박 잊고 있었구나. 오늘은 이만 일어나야겠다.”

 

  중전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자 월도 따라 일어섰다. 중전이 문밖까지 나오려는 월을 말렸다.

 

  “경칩이 지났다 하나 아직 소소리바람이 부느니라. 땅이 온기를 품어야 싹을 틔우는 법, 나오지 말고 그냥 있거라.”

 

  중전이 나가고 난 뒤 월은 창밖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경칩이라, 벌써 봄이 온 것인가.

 

  궁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제대로 느끼기 힘들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과 탓도 있지만 나무와 꽃이 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객이 숨어들까 우려해 궁의 마당에는 나무를 심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별궁만 해도 첩첩이 둘러싼 회갈색 담장 앞에 자귀나무 한 그루만 덜렁 심겨져 있었다. 입궁한 다음 해, 월이 억지로 우기다시피 하여 심은 것이었다. 그나마도 부부의 금슬을 좋게 하는 합환목이라는 구실을 대어 겨우 허락을 받았다.

 

  마음 같아선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올벚나무, 야광나무, 생강나무를 풍성하게 심고 한켠엔 모란과 작약을 심고 싶었다. 툭 터지듯 피어나는 봄꽃과 새싹을 보며 봄이 왔음을 눈으로, 코로 실감하고 싶었다.

 

  월은 어린 시절 뛰놀며 보았던 색색의 봄꽃들을 떠올렸다. 궁에 들어오기 전에는 매해 빠지지 않고 꽃놀이를 다녔었다. 궁에 들어온 지도 어언 일곱 해. 이제는 제게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해졌다. 흐드러진 봄꽃을 한 번만 보았으면, 중얼거리는 월의 눈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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