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서우에게 벌어진 일들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서란은 서둘러 구한 옥탑방 원룸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순간의 실수로 어쩌다 이런 나락에 빠졌는지 서란은 내심 기가 찼다.
"여길 벗어났나 생각했는데 또다시 돌아와버렸구나"
이 집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25년 전, 수녀원은 기본적으로 고아원이 아니었고 갑자기 두 명을 맡게 된 수녀원 측에서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운명의 장난처럼 서란은 입양을 가게 되었는데 다행히 좋은 가족을 만나 적응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으나 어린 시절 내내 가난에 시달렸었다.
다행히 서란은 주저앉아 울기만 하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특유의 호탕한 성격으로 인기가 많았던 서란은 그런 장점을 활용하여 도시락 장사, 액세서리 장사, 대부업(?!)을 활용한 끝에 자그마한 개인 쇼핑몰을 열 자금을 만들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하게 보이기 싫어 열심히 꾸몄던 서란은 특유의 센스를 인정받아 자신의 쇼핑몰을 안정적으로 운영해갔다. 그런 결과에 맘을 놓고 있었던 게 화근일까, 잠깐 일탈을 하고 싶어 놀러 갔던 호텔 클럽에서 영향력 있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 대표님에게 사고를 치고 만다.
'나도 문제지만 지호준.... 다시 돌아가면 가만두지 않겠다..'
서란은 으득 이를 갈았다. 다혈질인 성격이 잘 맞아 놀러 갈 때는 항상 베스트 프렌트가 되준 지호준. 서란에게 찝쩍거리는 놈으로 오해한 나머지 펀치를 날린 지호준.. 자신을 그렇게까지 지켜주고 나서준 사람이 인생에 별로 없었기에 서란은 그런 큰 사고에도 지호준을 원망할 수 없었다.
"아.. 이미 벌어진 일을 원망하면 뭐 하겠어.. 적극적으로 대처 방법을 찾자!!"
서란은 기본적으로 나쁜 일에 끙끙 앓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긍정 파워가 오늘날의 그녀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었다.
"... 그런데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네..."
서란은 꽤나 답답한 상황이 돼버린 것을 느끼며 집을 나가 옥상 지붕에 기대었다. 손에는 서란이 가장 좋아하는 과자와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이 과자를 먹으며 해결법을 찾는 일은 서란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거쳐 온 의식이었다.
지난 이 주 동안은 정신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일단 서란은 어쩔 수 없이 오래전 연락이 끊겼던 쌍둥이 언니를 찾아갔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자기 행세를 시켜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 서란의 작전이었다. 더 현실적인 작전을 고민해봤었지만 서란의 머릿속에 그나마 말이 되는 작전은 어디선가 본 드라마 같은 진부한 설정의 기억상실증이 전부였다.
수녀원 앞에 서있던 서란은 아주 잠깐 고민했다. 언젠가는 찾아갈 줄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이상한 부탁과 함께 찾아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면 좋은 계기가 될지도 몰라...'
서란은 자신에게 중얼거리며 수녀원으로 힘차게 들어갔고 생각보다 협조적인 서우의 반응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으며 원칙대로라면 수녀원에서 서우 행세를 해야 하지만 성격상 그럴 수 없었던 서란은 지금 멀지 않은 곳에서 도피 생활 중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날 한 번도 찾지 않은 서우에게 대한 찜찜한 기분이 다 사라진 건 아니었다.
'자자... 현재 상황에 집중하자...'
서란은 자꾸만 과거를 곱씹는 자기 자신을 다잡으려 애썼다. 잠깐 만난 서우지만 서우를 만난 순간부터 여러 가지 감정이 자기를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서우를 보면 그립고 기대고 싶고 불안하고 화내게 하고 싶은 여러 가지 감정이 자꾸 꿈틀댔다. 돈에 집중하게 되면서 침착한 감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느라 연애도 뜸했는데 서란은 그런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앗....!"
그러던 와중, 서란은 평소처럼 손에 든 과자와 핸드폰을 놓쳤다. 서란의 덤벙거림은 이미 업계 사람들에게까지 유명했다. 잃어버리거나 부서지는 핸드폰는 월례 행사였다.
과자를 지붕 위 경사를 빠르게 굴러 내려가 아래로 떨어졌다. 아래층은 주인집 베란다가 있었는데 사람이 있었는지 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서란은 깜짝 놀라 허리를 빼서 아래층을 내려 보았다.
아래층에는 서란의 또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빨래를 걷고 있었다. 남자는 빨래를 걷어서 그대로 입고 나갈 생각이었는지 상체를 탈의한 채로 떨어지는 과자를 잡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에 비친 하얀 빨래와 젖은 머리에 반사되는 햇빛이 서란의 눈을 부시게 했다. 찌푸려진 눈 사이로 서란은 남자를 한참 쳐다보았다. 숨 가빴던 일상 중에 이런 멋진 장면은 또 오랜만이었다.
"?!?!?!..."
감상도 잠시 서란은 곧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깜짝 놀란 듯이 서란을 보고 움직이지 않았다. 과자의 움직임도 어느새 멈춰 있었다. 서란은 자기를 신기하듯이 바라보던 남자의 눈빛을 보며 살짝 설렘을 느꼈다.
"안녕?!?!"
서란은 날씨에 맞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