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나선(螺線)의 우주 (3)
#12. 지구별. 2603년. 역사박물관의 열람실
마덕254는 말없이 입체영상 발생기를 작동시켰다. 자신의 두뇌 속에 심어진 기억을 기기에 걸어 재생하는 행사였다. 영상은 마덕254가 수선013을 호위하여 지구별에 온 후 조사한 여신002의 자료들이었다.
초췌한 형색의 로테003이 무덤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덩그러니 묘비가 세워져 있을 뿐인 무덤은 주위에 가득한 닮은꼴 무덤들로 인해 그곳이 고대에 만들어진 장묘공원의 일부분임을 알게 해주었다.
“저렇게 무덤을 지키고 있은 지 3년이랍니다. 그때에 우리 장미장원의 보호를 벗어난 직후부터 저런 모습이었던 거죠.”
로테003은 망연한 눈빛으로 묘비만 쳐다보고 있었다. 수선013은 처음 발견했을 때의 ‘여신’과 현재의 로테003을 비교하여 상황의 비극성을 실감하고 있었다.
“우리는 저 묘비의 주인공에 대해 조사해 보았습니다. 제법 그럴듯한 사정이 있더군요. 우주시대 초기의 지구별과 화성, 타이탄이 얽힌…… 동아시아연방의 역사박물관에 저 친구의 기록이 있던데, 계속 보시겠습니까?”
수선013은 마덕254의 제안에 동의했다. 늘 벼르고 있던 우주시대 초기의 비사를 엿볼 수 있는 기회라 싶어 마다할 수 없었다.
#13. 역사 기록기 재생화면. 2078년 봄. 서울. 어떤 생체예술가의 수기
화성의 인공 열풍에 시달려 붉게 익은 얼굴로 여객선을 나섰을 때 송영대의 사람들 속에서는 그대가 보이지 않았네. 으레 그러리라 짐작했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바른 길이리라 생각해 왔으면서도, 정작 그대의 얼굴을 찾아내지 못하는 상황을 접하자 여간 충격이 크지 않았네.
공항은 화성과 금성을 오가는 우주선들로 혼잡을 이루었지만 환송객이라거나 접영객의 수는 15년 전과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을 만큼 드물었네. 하기는 당시에도 외계로 돈벌이 가는 사람들은 지구 인간계의 말종(末種)으로 백안시되었는데, 지구정부와 정치 경제적 유대관계를 단절한 2078년의 금성과 화성 출신의 귀환 광부가 순종 지구인의 환영을 받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네.
공항을 나와 시내행 부유택시에 오른 이후 나는 내내 생각을 하였네. 지금쯤 그대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인가.
15년 전의 그대가 현재의 그대와 외모가 같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인데, 공항에서의 내가 그대를 찾은 방법은 15년 전의 기억을 되살린, 15년 전의 그대가 남겼을 법한 흔적이었네. 재생 장기의 주문 시에 옛 모습의 특징을 살려 과거와의 끈을 잇는 이들이 있다는 소문이 들리기는 하지만, 완전한 재 조형으로 새로운 젊음을 구가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대부분인 시대에 과거의 연인을 찾는 방법으로 옛 기억을 더듬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도 아니면서, 나는 그대의 환상을 쫓아 분주히 눈동자를 굴렸네.
지구는 여전히 생명이 충만한 별이었네. 2078년의 지구계 지성체가 알고 있는 별세계 중 유일하게 어머니별인 지구만이 소유하고 있는 생명의 색깔은, 패션으로 정착된 듯싶은 전신 노출로 치부를 제외한 육체 전부를 드러내고 다니는 소년 소녀들의 풋과일 같은 알몸에서도 빛을 발했고, 푸름과 맑음으로 대표되는 지구의 온갖 자연과, 더러 보이는 재생 육체를 가진 창부들의 출렁이는 젖가슴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져, 긴 세월 외계의 나그네가 되었던 초로의 귀향인의 가슴을 아릿하게 조여 왔네.
화성의 인공 중력과 인공 열풍, 인공 태양의 무겁고 덥고 탁한 빛에 길들여졌던 내 육체는 모처럼 되찾은 고향별의 싱그러운 생명 빛에 감격해 하며, 주인 되는 두뇌의 아픔은 아랑곳없이 15년 전의 감각을 되살리기에 열심이었네. 나는 옛 기능을 회복한 감각기관들의 힘을 빌려, 부유택시의 차창에 스치는 찰나인 양 짧은 경치들 속에서, 영원인 양 생명력이 긴 추억들을 어렵지 않게 살려 내곤 하였네.
떠나던 날 그대가 퍼붓던 저주의 말들이 이별의 현장을 지나게 되자 오늘의 사건처럼 귓전을 울려왔네. 그대는 저 일곱 색깔 무지개의 분수대 아래 그늘에 숨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네. 약속했던 시간을 꼬박 채워 도착한 내가 화성행 여객선의 시간표를 보이며 이별을 서두르자, 그대는 전날 내가 그대의 재생기념일을 자축하고자 사랑의 증표로 사주었던 1995년산 골동품 목걸이시계를 채찍 삼아 휘둘러 나를 공격해 왔고, 나는 당연히 감내해야 할 시련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네.
"간다고?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혼자만 도망치려고? 이런 파렴치한! 당신은 말이야! 파렴치한에 비도덕적인 인간과 색정광, 성도착자, 정신분열증환자, 피해망상증환자를 겸한 아주아주 나쁜 사람이야!”
그대는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흑색 대명사를 동원하여 나를 공박해 댔네. 한 단어마다 한 차례씩의 채찍질을 하여 내 얼굴이며 목 팔 등의 노출된 부위마다 핏줄기가 종횡으로 얽히도록 하였고, 때때로 채찍을 버리고 눈물과 한숨으로 무기를 바꾸어 내 마음을 돌리려고 하였네. 그러나 그대의 그러한 노력은 이별의 행사를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낳았을 뿐, 그대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지는 못했네.
그대의 이별사가 진행됨에 따라 내 시름도 터질 듯이 팽창하고 있었네. 나는 시름을 통곡으로 터뜨리고 그대의 채찍질이 강요하는 대로 주저앉고 싶었네. 그대를 끌어안고 마구 입맞춤을 해대고, 언젠가 그러했던 것처럼 육정의 환희를 만끽하고 싶었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네. 그대는 옛날의 그대가 아니었고, 나만이 옛날의 나였네. 우리는 옛날에 허투루 가졌던 불장난을 계속할 자격을 잃고 있었네. 나는 그대의 채찍질을 감내하며 묵묵히 가야 할 길을 재촉했네.
와앙!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아 발을 구르는 그대를 뒤로하고 떠나던 15년 전의 그 길을 역행하고 있구나……하는 감상에 잠겨 있는 사이에, 부유택시는 어느새 추억의 거리를 지나 도심가로 접어들고 있었네. 환락과 절망이 공존하는 별인 지구의 대도시는 예나 다름없이 홍등을 휘황하게 밝혀 자기 안의 주민과 외계의 나그네의 타락을 부추기고 있었네.
나는 부유택시의 기사에게 목적지를 설명해 두었는데, 기사가 얼핏 경멸의 표정을 보였던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네. 부유택시는 유흥가의 중심에 멈추었고, 나는 하차 즉시 “멋진 오라버니, 환영!”을 합창하는 밤거리의 꽃들에 포위되어 부유택시의 기사가 보냈던 경멸의 시선을 합당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네.
“곤욕을 치르셨지요? 아무튼 이 거리의 아가씨들은 대단해서.”
카이젤 수염의 중년 사내가 잔뜩 반가운 인사를 하였네. 그는 나보다 반 배분쯤 연치가 높은 이로 과학정보국의 중간급 간부였네. 평생을 과학정보국의 사람으로 살아온 사람답지 않게 맑은 목소리의 카이젤 수염을 보면서, 저 거리낌 없는 태도 덕택에 자신이 유형을 보냈던 범죄자에게서도 원망을 사지 않는 것이리라 하고, 나는 오랜 숙적을 대하고서도 노여움이 일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정의했네.
“제멋대로 들어섰어요. 원래 과학정보국이 조금 어두운 면이 있지 않습니까? 홍등가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도 있으니, 잘 어울리는 이웃인 셈이지요.”
15년 전, 나를 화성으로 추방할 때 카이젤 수염은 ‘밝음을 가장한 어두움’으로 자신이 속한 과학정보국의 색깔로 비유한 적이 있었네. 그때의 기억을 되살린 홍등가와 정보국의 비교…… 나는 예나 다름없이 침묵을 지켜 상대의 본심이 나오기를 기다렸네.
“이곳입니다. 여기에 당신을 초청한 이유가 있어요.”
카이젤 수염은 엄중히 밀폐된 방의 문 앞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네. 성문감식장치가 된 듯싶은 육중한 문이 좌우로 활짝 열려 우리를 맞았네.
안개가 짙다……싶을 정도로 시계차단입자가 과도히 방출된 방안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부지중에 신음을 흘렸네. 안개 저편으로 골격뿐인 인간형 로봇이 뚜벅뚜벅 걷고 있는 양이 흐릿하게 보였는데, 한눈에 내 손길이 스쳤던 여성형 로봇임을 알아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이 불현듯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네.
카이젤 수염은 손을 꼬옥 잡아 발작하려는 나를 진정시켜 주었네. 15년을 하루같이 시름으로 간직해 왔던 업의 결산이 저기에…… 나는 엄습해 오는 전율을 견디지 못하고 잠깐 비틀거렸네.
“역시 지우지 못했군요. 나이만큼이나 감상이 크신 우리 교수님……”
카이젤 수염이 딱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팔을 잡아끌었네. 카이젤 수염에게 끌려 방을 나서면서 나는 힘겹게 질문을 던졌네.
“어떻게 그녀가? 왜 저런 모습으로?”
“복제 피로현상이라고 하더군요. 현세에서는 치료방법이 없다고 하는 불치의 병……”
#14. 지구력 2603년. 지구공항. 화성행 우주선 송영대. 이번 이야기의 종장
“꼭 가야겠소?”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숲의 별’ 사건으로 내 선교사 자격이 정지되기도 하였으니, 이 기회에 모든 걸 알고 싶습니다.”
수선013은 마덕254에게 간단한 인사를 한 후 화성행 우주선에 올랐다. 마덕254는 장미13호를 끌고 타이탄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수선013의 선목 자격이 정지됨으로 무역선으로 돌아간 장미13호에는 지구산 흙이 가득 실려 있었다. 미생물 함유량이 높은 것으로 정평이 있는 지구산 흙은, 우주력 6세기의 지구별이 은하세계에 수출할 수 있는 상품 중 최고가라 하였다.
수선013의 곁에는 마덕254가 특별히 붙여준 용병 론733이 있었다.
“때로는 알아서 비극이 되는 경우도 있다네. 그래도 괜찮다면 내가 따라가지. 나는 우주시대 초기부터 마덕대장을 따라다녔던 몇 중의 하나라서 제법 아는 게 많으니. 이렇게 733개나 전생테를 얻다보니 필요한 것을 뺀 나머지는 다 잊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될 걸.”
론733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용병으로 늙은 그는 수선013의 심정이 편치 않다는 것을 짐작하고 자꾸 말을 붙였다.
“마덕대장이 그러더군. 당신이 찾으려는 과거의 그 친구는 제법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로테003이던가? 그 여신상을 우주로 쏘아올린 사람 말일세. 일개 생체예술가의 수준을 벗어난 거인이었다던가. 대장은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던데, 귀띔해주지 않던가?”
해줄 리가 있나? 내 화성행도 막으려 들던 사람인데. 내 스스로 아는 게 중요해. 상선 복분자호와 해적선 신천지호와 타이탄의 장미장원과 황금전함의 류우 일가의 은원이 얽힌 우주사가 시작된 이유……
우주선은 이륙한 순간 광속을 돌파했고, 출발과 같은 시각에 화성의 스키아파렐리 우주공항에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