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이에 결혼했던 진나영은 결혼한 지 3년 만에 딸 하나를 낳고 이혼했다.
그제 고 실장은 진나영이 조만간 떨어져서 지내던 딸을 데려올 예정이라고 전했다. 데려온 건가?
“송건입니다.”
“말 놓으세요. 그게 더 편해요.”
“그게… 편하면 그럴게. 그럼 이만.”
다시 한번 고개를 살짝 숙인 송건은 걸음에 속도를 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살갗에 닿자 제법 서늘해서였다.
잠옷 차림인 지나가 신경 쓰여서 더는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송건이 걸음을 재촉하자 그녀도 더는 방해하지 않았다. 지나를 들어 안고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걷는 송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도 곧이어 제 갈 길을 갔다.
어림짐작으로 그녀가 멀어졌을 즈음, 송건은 자신의 등에 바짝 붙어 걷고 있는 고 실장에게 물었다.
“저 아이인가요?”
앞뒤 설명이 없는 짧은 질문에도 알아 들은 고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했다.
“네. 지나보다 한 살 위예요. 한국대학교에 다닙니다. 아빠를 닮아 머리가 비상한가 보더라고요.”
좋은 머리는 아빠를 닮았다라. 하긴 아빠가 검사니 그런 말이 쉽게 나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엄마랑 다르게 생겼군요.”
젖비린내가 난다는 말이 생각나는 귀여운 동안이었다. 화려하고 센 인상의 진나영과는 사뭇 다른 외양이어서 조금 의아했다.
애 아빠가 저런 인상인가?
뜬금없이 정원 한복판에서 마주친 진나영의 딸.
아무튼, 희한한 동거라는 생각에 픽, 헛웃음이 터졌다.
진나영의 딸까지 한집에서 살게 될 줄이야. 분리된 공간에서 거주한다고는 해도 오늘처럼 정원에서, 주차장에서 마주치게 될 한 식구였다.
세상에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그런 생각이 들자, 그 생각의 끝에 진나영의 딸과 또래인 지나는 이 상황에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당연히 착잡하고 불쾌하고 분하겠지.
병원에서 돌아온 일행을 집 출입구에서 맞이한 김 여사와 지환의 얼굴이 울상이었다.
“지환아. 누나 이제 괜찮아. 너도 병나지 말고 오늘은 푹 쉬어. 내일도 쉬고 싶으면 학교 안 가도 돼.”
“네. 오후에 친구 집으로 불러도 되죠?”
“그럼. 되지.”
그 대화로 문득 자신이 아이들의 보호자라는 실감이 났다.
여전히 핏기가 사라진 혈색으로 늘어져 있는 지나를 침대 위에 눕힌 송건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나야. 힘들면 일주일 푹 쉬어. 학업….”
지금 학업 보충이 문젠가. 말을 끊은 송건이 손바닥을 지나의 이마에 올려 열이 있나를 체크했다.
“지나야. 쌤 믿지? 회사 문제도 별 탈 없이 처리할 거고. 진나영 여사가 너희들에게 심술부리지 못하게 막아 줄 거야. 걱정하지마.”
물기가 그렁그렁하던 눈망울에서 끝내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송건은 협탁에 놓인 티슈 곽에서 뽑은 티슈로 뺨에 흥건한 물기를 닦아주었다.
새초롬한 첫인상처럼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아이였는데. 지적인 외양 탓에 도도한 이미지가 어울리는, 꽃에 비유하자면 장미보다는 우아한 작약이 어울리는 여학생이었다.
어린 나이지만 침착하고 이성적인 성숙함을 지닌 아이가 한번 터진 울음을 참지 못하고 쏟아냈다.
송건의 말에 설움이 복받친 건지, 이런 불행에 속상한 건지.
서럽게 우는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송건은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있는 게 마음이 아팠다.
“쌤이 미안해. 좀 더 세심했어야 했는데.”
지나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 아니에요, 혹은 괜찮아요라는 답은 없었다.
“지나야.”
송건은 지나를 일으켜 앉히고 넓은 가슴에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쌤이 지켜줄게. 두려워하지도 말고 울지도 마. 슬퍼하는 건 오늘까지만 해.”
품에 안긴 작고 동그란 머리통을 커다란 손으로 쓰다듬던 송건이 흐느낌에 들썩이는 가녀린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제발 오늘까지만 울어, 구지나.
절대로 더는 울리지 않을 거다.
절대로.
송건은 그 단어를 속으로 곱씹었다.
“푹 자. 이따 같이 점심 먹자.”
지나를 다시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던 송건이 작게 속삭였다.
“눈 감아. 음악 틀어줄까?”
지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내려 앉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침실을 빠져나온 송건은 서재로 향했다.
지나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면 고삐를 바짝 조여야 했다. 지금보다 두 배는 더 성실히 업무를 소화해야 그 아이에게 한 약조를 지켜낼 수 있을 터였다.
코앞에 닥친 상속세 문제가 가장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자신이 아이들의 보호막이 되려면 다음 해에 열릴 주총에서 등기 이사가 되어야만 한다.
지나의 외가 쪽은 우호적일 테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진나영 쪽은 무슨 꿍꿍이일까.
진나영. 속내를 읽기가 힘든 상대다.
적당히 떡고물이나 바라고 한성범 회장의 첩 노릇을 해온 여자가 아니다.
법조인 집안의 딸로 초혼 상대도 검사였지만 한낱 공무원이던 첫 결혼 상대는 그녀의 야망을 채워주지 못했다.
내연녀 신분도 좋으니 그녀는 대한민국 상위 1%라는 놀이터에서 놀고 싶었다.
2층 서재.
업무를 보려고 서재 책상 앞에 앉은 송건은 진나영을 떠올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심장을 짓누르는 것만 같아 하, 얕은 한숨을 내쉰 후 정신을 차린 그가 막 태블릿을 켜려던 때였다. 핸드폰 수신음이 울렸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진나영의 이름이 액정에 떴다.
지나의 건강 상태가 궁금해서 전화할 여자는 아니고. 대체 무슨 일이지?
“네. 송건입니다.”
-송 사장, 지금 잠깐 얘기 좀 해요. 오래 안 걸려요.
“네.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어쩌다 이 여자와 한 지붕 아래서 동거를 하게 됐을까. 송건은 여전히 그 상황이 황망하기만 했다.
1층으로 내려온 송건은 긴 복도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그를 맞이한 건 김 여사였다.
“사모님, 응접실에 계세요. 차는 즐겨 드시는 레몬밤 티로 준비할까요?”
“네. 감사합니다.”
응접실이라. 상대와 은밀한 대화가 필요할 때 그녀가 찾는 장소다.
그녀의 전용 공간인 응접실에 들어서자 그녀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받치고 손으로 턱을 괸 채 창 너머를 무심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왔어요? 어서 앉아요.”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신 건지?”
“성질도 급하셔라.”
“업무가 밀려서요.”
“오래 안 붙잡을게요. 애는 좀 괜찮아요?”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려다 말고 물어왔다.
다분히 의례적이지만 그래도 안부는 묻네.
“네. 열이 내려서 편안해졌습니다.”
“애도 충격이 심했겠지.”
마시려던 차를 들이켜며 그녀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참, 내 딸 정원에서 봤다면서요? 애가 전화를 다 했더라고. 송 사장과 첫인사를 했다고.”
그녀가 송건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송 사장이 연예인 만큼 잘 생겨서 그런지 우리 딸은 첫눈에 급호감이라네.”
뭐라고 미주알고주알 떠벌린 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악담은 안 한듯했다.
“하실 말씀이?”
“아. 참. 알았어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그렇게 표정 굳힐 필요 없어.”
분명 뭔가 거래를 하려는 심산으로 보였다. 욕망으로 그득한 그녀의 큰 눈이 유독 반들거렸으니까.
“회장님이 안 계시니까 송 사장에게 솔직하게 얘기할게요. 저번에 회장님이 지시하신 페이퍼 컴퍼니말이야, 그거 회장님이 우리 오빠 챙겨주시려고 한 거야.”
그녀가 입에 올린 사람은 현역 검사인 진나영의 오빠, 진상민 차장 검사다.
“오빠도 승진을 못 하면 뭐, 별 볼 일 없는 거지. 알잖아. 공무원들의 말로가 시시한 거.”
그랬구나. 이번에 작업하라는 페이퍼 컴퍼니는 진상민 차장 검사의 몫이구나.
“송 사장도 알잖아? 겉으로 보기엔 뻔지르르해도 검사야 뭐 그냥 공무원이잖아. 나, 첫 결혼 했을 때 명품백 하나 장만하겠다고 적금까지 들었잖아. 우리 새언니도 그러고 살아.”
별 볼 일 없는 한낱 공무원의 아내였다는 진나영. 그 신분을 버린 그녀는 부자의 내연녀를 선택했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원 없이 실현하며 살아왔다.
“송 사장 해주라, 그러면 내년 주총 때 송 사장 등기 이사 되는 거 도울게.”
그녀가 대표로 있는 계열사 중 하나인 수성 하우징은 수호 건설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갑자기 수익을 내는 건 곤란합니다. 뻔히 눈에 보이는 노골적인 일감 몰아주기가 공정위에 안 잡힐 리가 없죠.”
“지금 목돈을 좀 챙겨 달라는 게 아니야. 당장 퇴직할 것도 아닌데, 뭐. 미래에. 언젠가 돈이 좀 필요할 때 송 사장이 신경 좀 써 줘.”
눈 밑의 애굣살을 접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곧이어 뒷말을 이었다.
“솔직히. 한 사장이 주총 때 송 사장이 등기 이사 되는 거 도와줄 것 같아? 어림없어, 그럴 인간이 아니지. 지나가 성인이 되면 뻔질나게 별채 드나들며 애를 구워삶으려고 할 거야. 두고 봐.”
두고 보지 않아도 뻔한 사실이다. 그래서 송건은 골치가 아팠다. 애들을 지켜야 하는데.
가만히 두고만 보지 않을 인간들이 하나둘이 아니니까. 눈앞에 있는 이 인간 여우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 조건이면 준비하겠습니다.”
그 제안 들어줄 테니 지금 한 약속은 꼭 지키시고. 이 여자를 믿는 놈이 등신인 걸까?
“역시. 송 사장하고는 얘기가 통해서 다행이다. 한성수는 욕심만 많지 진짜 똥인지 된장인지를 몰라. 한마디로 막무가내야.”
진나영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며 찻잔에 남은 차를 마저 들이켰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밀린 업무 보려면 당분간 욕보겠네. 나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여러 면에서 우린 한 편이지 적은 아니니까. 언제 우리 딸하고 식사 한번 하자. 초대할게요.”
“네.”
송건은 건성으로 답을 하고는 가벼운 묵례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막 응접실을 나서려는데 멀리서 차를 들고 오는 김 여사가 보였다.
이 집 사정엔 반 귀신인 김 여사가 중요한 대화가 끝나갈 무렵에 맞춰 송건의 차를 들고 온 것이다.
“어머. 벌써 일어나세요?”
김 여사가 너무 늦었나 싶은 표정이다.
“업무가 밀려서. 차는 괜찮아요. 가서 마실게요.”
자리를 뜬 송건의 머릿속이 실타래가 엉킨 듯 복잡했다.
인간탈을 쓴 저 여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걸까.
돌아가는 정황상, 적어도 주총 때 자신을 지지하겠다는 말은 사실인 듯한데.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도무지 가늠이 안 되는 여자라서,
이 복잡한 상황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구지나였다.
제발 오늘까지만 울어, 구지나.
절대로 더는 울리지 않을 거다.
절대로. 송건이 되새김질하듯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