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윽.."
정지한 세상속에 홀로 남은 시은이.
그는 지금, 말도 안되는 전지전능에 휩싸여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강철과도 같은 마음으로, 몇 초 지나지 않아 모든 혼란을 몰아내고 그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와...."
그런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정말로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언젠가 TV에서 나오는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기분.
사람의 손때가 전혀 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 환경이, 시은이의 시야를 가득 메워내고 있었다.
시야가 돌아갈 때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해가며,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자연을 계속해서 보여주었다.
한참을 그 속에 빠져들어갈듯이 정신을 놓고 있었을 때.
[그렇게도 좋은 것이냐.]
시은이의 귓가에 상당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우 이질적이면서도, 기계적인 느낌을 가득 담아냈던.
천 년의 대회의 주의사항을 이야기해주던 그 목소리였다.
"..설마, 이 목소리가 세계의 의지일줄은.."
시은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를 볼 수 있었고,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라 불러야 할까, 그녀라 불러야 할까.
세계의 의지는 누군지 판별되지 않을듯한 목소리를 유지하며 말을 걸어왔다.
[세계의 의지. 그래, 너희들이 부르는 세계의 의지가 바로 나를 뜻하는 것이리라.]
"베타의 선조들이 닿은 곳이 바로 여기구나."
[맞다. 오리진에서 온 너에게는 맞지 않는, 베타에서 성장하여 내게 닿은 녀석들이 만들어놓은 길이지. 어떻게 해도 닫히지가 않는 걸 보면, 이것 또한 세계의 의지라고 할 수 있을 터. 천 년에 한 번씩 찾아오던 베타의 후예들이었지만, 넌 특별하게도 천 년이 되지 않은 시점에서 올라왔구나. 더군다나 오리진 출신이라니. 놀랍도다.]
세계의 의지가 생각하고 있는 오리진과 베타란 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내게 말을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으니. 말을 신중히 해야 될 터.]
시은이의 의도를 눈치채고, 알아서 자신을 제재하고 있었다.
시은이는 궁금한 점을 꾸욱 마음속으로 눌러담고, 해야 될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럼, 이제 보상을 말하면 되는 건가?"
딱히 존대를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렇다. 네가 들었던 그대로. 세계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인간이 멸망하지 않는 선에서.]
세계의 의지도 말투에 대해선, 딱히 신경쓰지 않는지 아무렇지않게 대답해주었다.
시은이는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과거의 시은이와 고리온 드의 전투를 보면서, 확실하게 정립한 자신의 생각.
그것을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차분하게 또박또박 말하면 될 뿐이었다.
'후우..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되풀이해봤지만, 떨리긴 떨리는구나.'
어떤 식으로 보상이 이루어지는 것인지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기에, 생각나는 방향대로 자신의 생각한 바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몇 번이고 연습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하고 나니, 너무나도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던 걸까.
세계의 의지도 자신이 지금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걸까.
딱히 재촉하지 않은 채, 자신을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래도..떨리는데..'
자신의 말 한 마디로 인해, 세상은 크게 뒤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 말이 좋을지, 나쁠지는.
솔직한 말로 확신할 수 없었다.
고리온 드는, 가능성이라는 저울에 베타를 올려놓을 수 없다 그랬으나.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어.'
세상 일이라는 건, 그렇게 마음대로 쉽게 풀리는 것이 아니기에, 마음대로 확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은이는 믿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결론을 말하지 않았다.
괜히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으면, 흔들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보자.'
이미 모든 것을 끝내고 온 마당에, 더 이상의 고민은 사치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떨리던 마음이 차차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신격까지 획득한 상태였나? 이거이거..자세히보니, 베타의 선조들과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가졌군. 대체 오리진에서 넘어온 이가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어떻게 이런 힘을 얻게 된 걸까.]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싶을, 세계의 의지의 궁금증이 떠올랐다.
'시은씨에 대해 알지 못하는 건가.'
시은씨가 부린, 모종의 수로 인해 지금의 자신이 베타에 오게 되었고, 그녀의 힘을 이어받은 덕에, 믿기지 않은 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다.
세계의 의지의 궁금증 하나로, 시은이는 조금 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세계의 의지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여기서 말을 더 잘해야해.'
이제야 마음이 제대로 정리된 시은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리진과 베타. 난 이 둘을 합치려고 해."
심플하면서도 간단한 이야기.
그것이 시은이가 고민하고 고민하던, 마지막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이건 또 전혀 생각치 못한 바람이로군.]
매번 베타 출신의 참가자가 우승하여 이곳에 올라왔기에, 오리진에 대한 언급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끔씩 그에 대한 언급을 하긴 했으나, 그들이 태어나서 자라온 곳은 어디까지나 베타 세계였기에, 이 세계에서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바람을 말하기 마련이었다.
불로불사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자주 나왔던 패턴.
아주아주 가끔씩, 오리진에 넘어가고 싶다고 이야기한 우승자도 있었다.
물론, 오리진의 세계관에 맞게 기력을 더 이상 다루지 못한 채 보냈지만.
[전의 우승자가 떠오르는 군. 분명히 각자의 세계 모두 진실한 세계가 되게 해달라고 했었지.]
사실 전의 우승자가 무엇을 바랐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세계의 의지에 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계의 의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느끼고 있던 것이다.
시은이의 말이 충분히 실현이 가능하면서도, 그 바람이 자신이 지금껏 이어오던 세계의 의지의 법도를 크게 어그러트릴 것이라는 걸.
[구체적으로 말해보라. 너무 간단해서 애매하군.]
시은이가 바라고 있던, 질문이 들어왔다.
시은이는 지체없이 생각해둔 바를 이야기했다.
"오리진은 원래 잘못 만들어진 세계잖아? 완벽하게 만들려다가, 모종의 이유로 불완전해진 세계가 되어버렸지. 그러다보니, 그 불완전함을 메꿔내기 위해 베타라는 세계가 이어서 만들어진 거고.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미 두 거대한 세계는 어느 한쪽도 사라질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해. 물론, 네 입장에서는 오리진이야말로 원래의 세계일 것이고, 베타는 여전히 부수적으로 느껴질지 모르겠다만. 오리진의 삶을 지내다가, 베타에 와서 이곳을 둘러본 나이기에 말할 수 있어. 두 세계 중 하나라도 사라져선 안돼. 하지만 네가 말했던 대로, 두 세계가 진실한 세계가 될 수는 없었잖아. 그거야말로 네 의지에 반하는 일일 테니까."
[그래, 네 생각은 알겠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그것이 이뤄지겠는가.]
"오리진의 불완전한 요소를 메꾸기 위해 베타라는 실험대를 사용했던 거잖아? 오리진의 변수를 베타로 보내고, 천 년의 대회를 일으켜서 그 대회까지의 정보를 분석하여, 오리진을 조금 더 완벽하게 만드려고 한 네 의도. 시도는 좋았어. 하지만, 생각이 잘못됐지. 그런데 이해해. 넌 세계를 완벽하게 만들어야 하는 의지일 테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그렇지. 그래서 네 바람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해결 할 필요는 없어. 네 전제가 잘못된 거 뿐이니까."
[전제가 잘못됐다?]
"미안하지만, 완벽한 세계는 없어. 네가 바라는 것이 인간을 기준으로 삼는 세계의 완성이라면. 이미 오리진은 그것으로 완벽한 세계라고 할 수 있으니까."
[..불완전한 세계가 완벽한 세계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여전히 기계적인 목소리였지만, 왠지 모르게 시은이는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인간자체가 불완전하게 태어난 생물인데. 어떻게 그들이 사는 세계가 완벽할 수 있겠어? 말도 안되는 거지."
[..그렇군. 확실히 그랬어..대체 왜 여지껏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던 거지.]
"넌 세계의 의지니까. 완벽해지려고 하는 의지에서 태어난 존재니까. 굳이 네 맹점을 찾자면, 인간을 세계의 주인으로 삼았다는 점이야. 말도 안되는 모순을 반복하고 있던 셈이지."
[그럼 베타는 필요없는 것이군...아..그래서..]
"그래 맞아. 그렇기에, 난 이미 불완전한 오리진에, 베타의 모든 것을 끼워넣고 싶어. 오리진은 넓잖아? 충분히 베타의 땅이 들어갈만한 곳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물론, 기력은 없는 채로 역사 또한 자연스럽게 맞물려갈 수 있게.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긴장하고 떨었던 것과는 다르게, 생각한 그대로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휴우..세계의 의지라 다행이었어.'
어찌됐든 세계의 의지랑은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이렇게 대화까지 나눌 수 있어서, 설득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자신이 내린 결론을, 그 또한 스스로 내릴 수 있어야 했다.
세계의 의지는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의 말을 충분히 검토하고 있는 것일 터.
'..난 할만큼 했어.'
이것마저 안된다고 한다면, 이번의 자신은 실패하게 된 것이다.
퀘이사와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되는 셈이었지만, 그래도 과거의 시은이와 고리온 드를 남겼으니.
'그들이라면,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가능성을 다음 세대에는 이어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서, 고리온 드 대신 자신이 우승한 것이었으니까.
'아...근데 눈치없게 고리온 드가 왕한다고 설치진 않겠지.'
어떻게든 왕좌를 내려놓아야 했다.
물론, 고리온 드 말고는 천 년의 대회의 참가자가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셈이니, 어쩔 수 없다만.
고리온 드라면, 눈치껏 과거의 시은이에게 왕자리를 물려줄 것이다.
그래야만 두 번째 기회를 노릴 때, 과거의 시은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테니까.
혹시나 하는 생각을 이어나가며, 자신이 놓친 것은 없는지 다시 점검해나가는 사이.
세계의 의지가 꿈틀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생각이 정리된 것만 같았다.
[..충분히 가능하다.]
"좋았어!"
시은이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며 두 손을 꽉 쥐었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말에, 깜짝 놀라며, 두 눈을 크게 떴지만.
세계의 의지는 전혀 개의치않은지, 곧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 거참.. 내가 세계의 의지이기에 이런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니.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었어.]
"..괜찮은 거지?"
시은이의 원대로 이뤄지게 된다면, 세계는 하나가 되고, 그 불완전한 세계는 불완전한 것 자체가 완전한 것으로 여겨지기에, 더 이상 베타와 같은 세계를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계의 의지의 존재 이유는 사라지게 된다.
이미 세계는 완전해졌으니, 세계를 조율하는 그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런 시은이의 질문이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 세계의 의지는 단박에 알아차리고 있었다.
[걱정말게. 나 또한 생각해둔 바가 있으니.]
걱정말라면 걱정해선 안됐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세계의 의지의 말이니. 이건 확실할 테다.
[..후후..고맙네. 나도 충분히 보답하지.]
세계의 의지의 진심어린 감사가 들림과 동시에.
딱!
세상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