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간호사는 그렇게 당혹감만 남긴 채 수액을 제거하고 나가버렸다. 수술실이 어디인지 누가 받고 있는지 어차피 물어도 개인정보였으므로 가르쳐 줄리 만무하단 걸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아, 이런..."
그가 일어나 복도를 걸었다. 주차장으로 갔는데 차를 어디에 댔는지 기억이 안 났다.
"어디다 댄 거지? 아, 어떻게 온 거야?"
그러고 멍하니 서있는데 그의 주머니에서 벨이 울렸다. 다행히 전화기와 지갑은 잘 지니고 있었다. 린이었다.
"하완오빠, 어디에요? 왜 학원에 안 와요? 아까 그렇게 나가고 어딜 간 거에요?"
"어? 어...뭐, 설명하자면 길어. 좀 급한 일이 있었어. 야, 그거 알아? 시아하고 파랑이 교통사고 당했어. 지금 병원인데 누구인지는 몰라도 수술중이야. 중태라고."
"네에?"
린은 눈이 동그래져 옆에 앉은 시아를 쳐다보았다. 시아 역시 자신을 보는 린을 쳐다보았다.
"왜?"
린이 수화기를 막더니 시아의 볼을 꼬집었다.
"아! 너 뭐한는 거야?"
"너 유시아 맞지? 귀신 아니지?"
"아, 이게 밥 잘 먹고 뭐 하는 소리래?"
"하완오빠가 너 병원에 있대. 파랑오빠하고 교통사고 나서 수술중이라며."
"엥? 아말고 꿈 꿨대니? 이젠 아주 날 골로 보내는 구나."
"그니까. 이게 무슨 봉창 뚜딩기는 소리래. 다른 사람하고 착각했나봐. 아니라고 해줘야겠다."
그러면서 린이 다시 수화기에 입을 대는 순간, 시아가 그녀의 핸드폰을 잡았다.
"왜? 뭐야? 왜 이래?"
"너, 내 친구지?"
시아의 음흉한 웃음에 린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또 친구라는 이름 하에 어떤 골탕을 먹이려고 계획하는지 그녀의 표정이 낱낱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말고가 뭘 제일 무서워하는 지 난 알지."
"뭔데?"
"이따 보여줄게."
"엥?"
"평소처럼 대화하셩. 단, 내 얘긴 꺼내지 말고. 나 그거 말고 우리의 우정에 바라는 거 없어."
그러더니 시아가 그녀의 핸드폰을 놓았다. 린은 뭔가 미심쩍었지만 그녀의 말을 믿어주기로 했다.
"여, 여보세요? 그 병원 어디에요? 오빠, 오늘 과외하러는 오는 거죠? 전화는...안 받긴 했어요."
시아가 복화술로 안 받는다 하라며 그녀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래? 넌 근데 친구가 다쳤다는데 꽤 담담하다? 아, 과외! 오늘이었나?"
"아, 진짜. 벌써 치매에요?"
그녀가 한 치매란 말이 왜 갑자기 하완의 귀에 거슬렸는지 모르겠다. 쓰러지고 일어난 지금이라 그랬나. 나약한 모습의 자신에게 화가 일었다.
"야, 치매는 무슨, 내 나이가 몇인데 너 장난하냐? 너, 숙제 다 안 했기만 해봐, 알지?"
"네? 아, 과외시간은 까먹으면서 숙제는 기억하고...에이, 진짜."
"이따 보자. 너..."
그렇게 엄한 데에 화풀이를 해도 영 개운치가 않았다. 일단 택시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정말 린이 말대로 기억상실증이라도 생긴 걸까 싶어 약간은 불안하기도 했다.
"피 공포증에 기억상실까지 더해진다면 그 길은 정말 내 길이 아닌 거야. 일단 가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가 병원을 떠났다.
***
통화를 마치고 린이 시아에게 말했다.
"오늘 좀 까칠한데?"
"언제는 아말고가 안 까칠하셨냐?"
"뭔가 기가 빠진 듯한 느낌도 들고...암튼 좀 달라."
"그 소중한 흰둥이에 또 기스라도 낫나 보지."
"그런가? 그런데 뭐야? 무슨 꿍꿍이야? 오빠가 뭘 젤 무서워하는데?"
"내가 보여줄게. 오늘 니네 집에 좀 가도 되?"
"와도 되지만 나 과외잖아."
"그러니까 가는 거지. 아말고가 지금 내가 병원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어, 닮은 사람이라도 봤나? 되게 놀라고 걱정하는 말투였는데?"
"걱정은 무슨...그 인간이 따뜻한 피가 도는 사람이 맞고, 조금이라도 내 걱정을 한다면, 오늘 내 폰을 아작낸 것에 대한 일말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거겠지."
"정말 질기고 질기다. 너랑 하완오빠의 악연은...어떻게 그렇게 끊어지지가 않냐?"
"그러니까 내가 미치겠다고.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에 뛰어들어서는 평온한 일상에 쓰나미를 일으키고 다니냔 말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돼? 어? 나한테도 좀 전수해라. 난 과외까지 해서 어거지로 연을 이어가는데 영 발전이 없어."
"아, 그래. 오늘 내가 너랑 아말고하고 찐한 스킨쉽하게 해줄게."
"엥? 어떡해? 아, 잘 됐어. 안그래도 오늘 부모님 모임 있어서 늦는댔거든."
"야, 어떡게 이렇게 날도 잘 받았을까? 렛츠 고!"
그렇게 시아는 린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갔다. 반짝반짝한 현관에 당도하자 시아는 머뭇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니네 집은 어떻게 와도 와도 이렇게 적응이 안 되냐? 오...내 옷에서 먼지 떨어질라. 어떻게 이렇게 항상 윤이 난대?"
"오바하지마셩. 어서 들어와."
"야, 집에 케첩있지?"
"당연하지."
"니 옷 좀 줘봐. 아, 내가 아까 니 머리 색깔하고 비슷한 가발 하나를 챙겨왔지. 헤어반에서."
"잉? 어쩌려고?"
"이따 내가 케첩을 피로 위장하고 니 옷 입고 가발쓰고 너처럼 하고 있을께. 불은 끈 채로. 아말고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귀신이거든. 지금 내가 여기 있을 거란 생각은 절대 못할 거 아냐? 너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내가 있으면 완전 놀랄 것 아냐? 히히."
"야...넌 어쩜 이럴 땐 머리가 그렇게 잘 돌아가냐?"
"아, 또 뭐 없나? 그래, 분장 좀 하자. 야, 메이크업 박스 좀 가지고 와봐."
"너 완전 결심했구나?"
"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내가 오늘 아말고 심장어택 제대로 한 번 해주겠어. 내가 아까 폰 으스러질 때 얼마나 심장에 무리가 갔는지 알아?"
"그거 파랑오빠가 그랬다며..."
"그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거야. 아말고가 내 폰을 뺏기만 않았어도 바퀴에 깔릴 일은 없었다고."
"적당히 해라. 암튼..."
"야, 내가 그 인간 말대로 재물을 부셨냐? 어딜 다치게 하길 하냐? 좀 놀라게 해주는 것 뿐인데 뭐. 혈액순환에 도움되고...다 그런 거 아니겠니?"
"갖다 붙이기는..."
"그리고 니 품에 폭 안기게 해줄게. 넌 님도 보고 뽕도 따셔."
"어, 어떻게?"
이 대목에서는 린 역시 귀가 쫑긋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