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1층입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소리가 들렸다. 서우는 지금 ‘Now’ 본사 사옥의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다. 민우와 처음 만났던 그 장소였다. 문이 열리는 것을 확인한 서우는 곧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서우는 어젯밤 서란에게서 서란의 쇼핑몰 ‘Kiwi Girls’의 2주년 기념일을 맞아 ‘Now’ 사업부 쪽에서 준비한 뒤풀이 행사에 참여해달라는 얘기를 들었다. 공식적인 행사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함께 일해준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서란의 절실한 부탁에 맘이 약해지고 말았다.
‘굳이 이런 조촐한 축하 행사에 대표가 껴있진 않겠지’
민우와의 마지막 만남 이후 서우는 민우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어떻게 결정해야 될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첫인상이 이곳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었지’
서우는 민우의 차가운 눈빛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빨갛게 변한 목덜미도 기억해냈다. 좋지 않았던 첫인상과 다르게 이제 민우를 생각하면 알 수 없는 설렘이 함께 했다. 하지만 어제 서란에게서 들은 말은 서우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 사실, 대표님에게 빚이 있어.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그냥 어울려 주는 역할을 했던 거야 -
‘내가 아는 민우 오빠는 사람을 돈으로 가지고 노는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서우는 민우와 여러 사건으로 얽히면서 민우가 무척 매너 있고 예의 바르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의아했다. 자신의 판단과 서란의 얘기는 다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서우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 회사의 대표인 사람이 얼마나 계산적으로 변할 수 있는가는 서우의 입장으로서는 알 수 없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서우는 서란의 말을 너무나도 믿고 있었다. 세상에서 서우가 믿는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서란과 원장수녀님.
“딩동. 10층입니다”
긴 생각에 잠겼던 탓일까. 엘리베이터가 평소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 듯했다. 서우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서둘러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민우였다.
“…여기 어쩐 일이지?”
민우는 서우만큼 놀란 표정이었다. 서우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일단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리베이터가 그날처럼 문이 열린 채 정지해 있었다.
“앗!!! 안녕하세요!!!”
갑자기 어디선가 활기찬 인사 소리가 들려온다. 서우는 인사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10층의 입구에 사업부 팀 소속 ‘정미소’ 과장이 서우를 향해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뛰어오고 있었다.
“대표님 여기서 걸리적거리게 뭐 하세요. 잠시만요.”
사람 좋아 보이는 목소리와 함께 서우의 손을 잡은 미소는 서우를 엘리베이터에서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민우는 둘을 쳐다보며 조용히 한쪽 옆으로 비켜섰다.
“서란니임!! 오랜만이에요! 요새 바빠서 자꾸 메일로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만날 기회가 생겨서 너무 기뻐요!!”
엄청난 텐션에 놀란 서우의 반응이 밋밋해졌다. 팔을 잡고 악수하듯 붕붕 흔드는 미소의 행동에 서우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라? 그러고 보니 많이 조용해지셨네요. 그간 이벤트가 이래저래 많아서 힘드셨죠. 오늘 신나게 먹고 마시고 놀아요!”
말을 마친 미소는 대표님을 째려보았다. 민우는 그런 미소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오늘 무슨 이벤트가 있어?”
“아, 대표님 이런 거 관심 없으셔서 잘 모르실 것 같아요. 오늘 입점해 있는 사업자분들 중에 기간이 좀 된 분들 모아서 조촐한 축하파티를 하기로 했어요. 바뀐 정책들도 알려드릴 겸 해서요”
“…원래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가?”
“무슨 소리세요. 저희가 이런 거 잘 챙겨서 일 잘한다고 소문이 나있는 건데. 전체 이메일로도 공지 가는 거예요. 너무 관심 없으시다”
대표를 대하는 미소의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떠오르는 스타트업답게 이곳의 수평적인 조직문화는 업계에서 유명했다. 그것이 나우를 대표 플랫폼으로 자리 잡게 한 이유기도 했다.
“ 아무튼 좀 안 좋은 일도 있었지만 오늘은 그런 일 다 잊고 재밌게 먹고 마시고 놀아요! 저희 팀원 제가 다 소개해 드릴게요!"
미소는 서우의 눈을 마주치며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서우는 미소의 이름과 성격이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맘이 편해졌다.
“ 자자 그럼. 이쪽 회의실에서 다른 판매자분들이랑 잠시 기다리세요”
말을 마친 미소가 서우를 회의실 쪽으로 안내하려고 했다. 그때, 민우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이서우님은 나랑 좀 볼일이 있어서. 여기서 기다리도록 할게. 이따가 봐”
“음? 대표님 설마 뒤풀이 오시려고요?"
“왜. 내가 가면 안 되나?”
“아니.. 평소답지 않게 대표님이 뒤풀이 행사에 눈치 없이…. 읍”
어디선가 나타난 사원이 뒤에서 미소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미소를 질질 끌고 갔다. 미소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눈빛을 하며 곧 회사 안쪽으로 사라졌다.
둘만 남겨진 복도는 조용했다. 조용하다기 보다 싸늘한 편에 가까운 쪽이었다. 사실 둘은 마지막 만남 이후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이서우씨는….”
민우가 입을 열어 침묵을 깼다.
“회사에 참 자주 오네”
민우가 알 수 없는 말을 던졌다. 서우는 이번이 두 번째인데 자주라고 볼 수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 여러 가지 일로 바쁠 텐데 그래도 회사 일은 직접 챙기는 거 보니 멋지군”
서우는 민우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의문을 느껴 민우를 쳐다보았다. 확실했다. 민우는 서우를 취조하듯 쏘아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칭찬해주셔서”
서우의 말에 민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분명 확인이 필요하다며 뜨거운 숨결로 서우를 팔 안에 가뒀던 민우였다. 그때의 민우와 지금의 민우는 다른 사람 같았다. 서우는 일단 행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공식적인 행사 참여도 힘든데 어딘지 모르게 꼬여있는 민우를 상대할 힘이 서우에게는 없었다.
“도도한 표정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게 항상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인가?”
다분히 공격적인 말투에 서우는 기계적으로 반응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으시면 그냥 말씀을 해주시죠. 사람을 의심하고 비꼬고 하는 말투도 문제를 해결하는 부분에 있어서 좋은 방법은 아닌 거 같은데요?”
또 이런 분위기다. 서우는 언제나 주위 사람들과 온화한 분위기로 잘 지내왔었다. 그런데 민우와는 왜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워대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 내 의심이 다 합리적인 추론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은 안 들고?”
“그니까 그 의심이 대체 뭔지, 뭐 때문에 꼬여버린 건지 저한테 공유를 좀 해주시죠. 확인이 필요하다면서 덤비기만 하지 마시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서우의 말투도 험악해졌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민우 앞에서 서우는 항상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 시기가가 적절하던 적절하지 않든 간에.
“이서우씨는 정말 내 관심을 끄는 것 하나는 타고난 거 같아서 할 말이 없네. 분명 나와 데이트할 때까지만 해도 나한테 멋있다고 칭찬한 것 같은데 그새 이렇게 모드가 바뀐 거 보면.”
서우의 공격에 민우도 서우의 약점을 찾아냈다. 둘의 몇 안 되는 좋았던 기억들은 어느덧 과거의 기억이 되어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빙빙 도는 듯한 대화에 서우의 감정이 폭발할 것 같았다.
“대표님에 대한 태도는 바뀌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대표님이 저한테 태도를 바꾸셨죠. 오늘 도대체 저한테 이렇게 대하는 이유가 뭐예요? 그냥 확실하게 말해주세요”
서우는 민우를 또렷이 응시하며 분명히 얘기했다. 진지한 서우의 분위기에 민우의 침묵이 길어졌다. 그리고 갑자기 결심이 선 듯 입을 떼려고 했다.
“나는…”
“자자 저희 다 같이 왔습니다. 어색하실 것 같아서 빨리 왔어요! 갑시다 갑시다!”
열몇 명의 직원들과 함께 미소가 서우와 민우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서우는 순식간에 직원들과 판매자들에게 둘러싸여 인사를 나누었다. 어색한 표정의 민우는 말을 아끼며 무리 뒤쪽으로 사라졌다. 서우는 민우의 생각은 알 수 없었지만 다른 한 가지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미소님은 순수한 미소를 가졌으나 눈치는 없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