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키론은 공윤에게 쉬라고 말한 뒤 방을 나갔다. 공윤은 정신없는 와중에 그에게 좀 자라고 말했는지, 아니면 그와 비슷한 욕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충분하진 않지만, 그게 중요한 거라고? 키론은 벌써 그녀를 가르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리에 관해서라면, 고민을 해봐야하긴 했다. 어쨌든 그녀가 성급하게 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서리도, 그 애로 말하자면, 항상 마음이 쓰이긴 했다. 가능하다면 그 애가 좋은 환경에서 괜찮은 방식으로 자랐으면 한 적도 많았다.
키론이 그 무서운 뱀 여자가 서리를 데려가려는 걸 막은 건 대책이 있다는 걸까?
대체 그 사람은 뭐지? 뭐하는 사람인데 이런 곳에서 사는 거야?
공윤은 그런 생각을 하다 자기도 모르게 잠들었다.
***
차가 부서졌다. 이어지는 충격, 피, 비산하는 파편들......
어쩌면 부서진 게 나일지도 모르겠다.
부서진 이후 잘못 붙여진 걸지도 모르겠다.
예전보다 그런 것들이 더 잘 보인다.
무섭다.
현실이 무섭다.
받아들여, 설공윤.
그러지 않으면......
***
깨어났을 때는 대낮이었다. 공윤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나 지금 남자 집에서 자고 일어난 거야? 그것도 두 번이나?
돌아가신 부모님이 꿈에 나타나 ‘니가 정신이 있는 년이냐 없는 년이냐’를 주제로 토크쇼를 벌여도 할 말이 없었다. 그것도 그렇게 수상해 보이는 남자 집에서!
공윤은 얼굴을 대충 수습하고 방을 뛰쳐나갔다. 아니, 반만 나갔다. 그녀는 튀어나간 속도 그대로 엄청나게 단단하고 뜨거운 뭔가에 얼굴을 박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아이고, 아파라. 공윤은 콧대가 나가진 않았나 싶었다. 조심스레 만져보자 다행히 얼얼할 뿐 무사한 것 같았다.
나 왜 이렇게 자주 얼굴 박는 것 같지?
키가 무척 큰 남자가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심지어 키론보다도 더 커보였고, 굉장한 근육질이기까지 했다. 그녀가 부딪히자마자 나가떨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짐승을 보는 기분이었다. 대충 다듬은 머리카락 사이로 이따금씩 번득이는 눈빛이 그런 인상을 풍기는 데 강하게 일조했다.
광포함이 잘생김을 함부로 잡아먹는 얼굴을 보자니, 이건 물리기 전에 피하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어딜 가려는 거지?”
목소리가 바닥을 긁는 것 같았다. 성대가 상한 듯 거칠고 낮은 목소리였다. 그가 공윤에게 초점을 맞추자 금빛 동공이 더욱 가늘어졌다.
금빛이라, 공윤은 무언가를 직감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집에 가려고 하는데요. 키론은 어딨죠?”
“키론은 바빠.”
그는 공윤을 뚫어져라 봤다. 이 집 사람들은 남을 빤히 보는 게 특기인가.
“음, 그럼 키론에게 전해줄래요? 전 집에 가보겠다고, 서리 문제는 나중에 의논해보자고요.”
공윤은 남자의 팔과 문 사이에 난 틈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옆구리에 끼는 꼴밖에 연출하지 못했다.
“저기, 좀 비켜주면 안 될까요? 이거 통행방해라고요......”
공윤은 굴욕감으로 몸서리치며 주장했다.
“너, 키론의 제자가 될 거냐?”
또 나왔다.
제자.
그 고리타분한 단어가 그렇게 중요한 거야?
공윤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남자가 거친 어조로 덧붙였다.
“키론이 키워내는 그 다음의 키론. 그의 후계자.”
계약서의 내용을 떠올린 공윤은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하기로 했으니까.
그 끄덕임이 어떤 재앙을 불러올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겠지만.
“고민 중이긴 한데, 할 것 같아요.”
시급이 워낙 세니까. 몇 개만 빼면 조건도 상당히 좋고. 이런 알바는 흔치 않았다. 스펙터클하고 심신안정에 좋지 못한 사건이 다수 발생한다는 리스크가 따르지만, 현실은 뭐 다른가.
사실 그보다 더 나쁜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남자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좋아, 데려다주지.”
공윤도 웃었다.
“일단 좀, 내려주실래요?”
***
공윤은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키론이 대단한 사기를 친 게 틀림없다고. 일단 여기는 저택이라기보다는 성 같았다. 커다란 고성. 오래되고 고풍스러운 양식은 최소한 몇 세기 전의 것으로 보였다. 얼마나 오래된 것 같았냐면 루마니아의 브란 성과 비슷한 정도였다.
그러나 사실 이 설명은, 독특함이 지나쳐 괴상해보이기까지 하는 저택을 묘사하기에 너무나 간결하고 함축적인 것이었다.
저택은 마치 인간 시대의 집합소처럼 보였다. 어떻게 아직까지 간직되어 있을까 싶을 만큼 구시대적인 유물에서부터, 기하학적인 문양의 현대적인 인테리어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극히 적었고, 대부분은 중세에서 근현대 사이를 머무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나 유행했을 법한 디자인의 가구, 오래 사용한 듯 반질반질 윤이 나는 마호가니 의자, 반쯤 지워진 서명이 음각된 만년필, 흠 없이 매끄러운 도자기, 우아하지만 다소 무서운 미소를 짓는 여신의 모습이 짜여진 태피스트리, 스위스 장인이 안에 직접 기어들어가서 만들었을 법한 괘종시계, 투구가 씌워진 갑옷, 핏자국이 말라붙은 구리그릇(도대체 왜?), 섬세한 세공의 은잔......
그 외 기타 등등의 장식품들이 때때로 괜찮거나 대부분은 부적절한 위치에 널려 있었다. 심지어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있어야 할 것 같은 르네상스 풍의 그림도 있었다. 공윤은 그걸 보고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굉장히 아름다운 여자의 초상화였다. 어렴풋한 노을을 배경으로 금발을 흩날리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차림새가 당시 여성치고 굉장히 자유분방했다.
그건 엄청나게 정교한 모작이 아니라면, 틀림없는 진품이었다.
......
최소한 그가 부자라는 걸 증명해주긴 했다. 공윤은 불안해져서 몸을 약간 떨었다. 그녀는 뭐라도 건드릴세라 몸가짐을 조심히 했다.
남자는 긴 복도에서 길을 이리저리 꺾었다. 그들이 지나친 방 중 몇 군데는 문이 부르르 떨리거나 흔들리고 있었다. 공윤은 절대로 열어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가 엷게 먼지가 쌓인 문을 열자, 안전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검은 계단이 나타났다. 공윤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로 연결된 것 같았다.
내려갈수록 공기가 차갑고 습해졌다. 희미한 물 냄새...... 물비린내도 나는 것 같았다.
공윤은 갑자기 좋지 않은 의심이 들었다. 날 지하 감옥에 가둬버리려는 건 아니겠지?
침묵을 깨고 남자가 물었다.
“키론이 누군지 아나?”
공윤은 습기로 축축해진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아뇨. 그쪽은 아세요?”
“대충은. 예전엔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군.”
“그런데 왜 나한테 물어봐?”
“키론이 너 같은 걸 데려온 게 처음이라. 왜 반말을 하지?”
“너도 나한테 반말하잖아.”
남자는 공윤을 보더니 갑자기 웃었다. 아오, 쫄려 죽겠네......
거친 나머지 소음에 가까운 웃음소리가 통로 안에 우렁우렁 울렸다. 공윤은 귀가 아파서 인상을 찡그렸다. 물 냄새도 점점 심해졌다.
저러다 콱 넘어져버려라.
“다만 키론이 자기 스승을 죽인 건 알지.”
공윤은 자기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방금 들은 걸 제대로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키론에게 스승이 있었어?”
“그럼 그가 처음부터 키론이었겠나? 키론이라는 이름은 승계되는 것이다. 오직 하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러니 나도 확인해봐야겠다.”
남자가 우뚝 멈춰서더니 공윤을 돌아봤다. 금빛 눈이 그녀를 포획했다. 그는 얼어붙은 공윤을 잡고 들어올렸다.
미친, 공윤은 경악했다.
짐승인 건 내 진작 알아봤다만, 행동까지 짐승 같을 줄은 미처 몰랐다!
“네가 키론이 될 자격이 있는지를.”
그는 공윤을 계단 아래로 놓아버렸다. 공윤은 그대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