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가 혁을 그리워하며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혁은 세상 구경을 하며 자기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처음으로 넓은 세상을 보며 강이를 더욱더 그리워하고 있었다.
‘내가 이런 세상에 서 있었구나!’
혁은 세상을 돌아보면서 깊은 절망과 함께 탄식이 절로 터졌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구나~’
혁이 파혼한 뒤 세상구경을 하겠다며 떠난 1340년!
혁이 열여섯, 강이 열 네 살이던 그해 여름은 그 어느 때보다 잔인하고 무더운 여름이었다.
“천하에 그런 놈이 왕이라고!”
아버지 충숙왕의 서모인 경화공주를 강제로 능욕하고, 주색을 일삼아 원나라로 압송됐던 충혜왕이 다시 왕위로 복위되면서, 원나라에선 수십 명의 공녀를 요구해왔다.
“이왕이면 귀족출신의 딸로, 인물이 수려한 여인을 골라 보내시오”
고려를 지속적으로 원나라에 복종시키기 위해, 원나라는 공녀를 요구했고, 부마국인 고려는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금일부터 열두 살부터 열여섯에 이르는 처자는 반드시 나라에 신고를 한 뒤에 혼례를 올릴 수 있다!”
전국 팔도 곳곳에 금혼령이 내려지면서 공녀 색출이 시작됐다.
혁이 어느 명문가 광에서 하룻밤 묵어갈 때였다. 하루 종일 걷느라 피곤에 지쳤는데도 잠이 쉬이 들지 않았다.
‘다들 어찌 지내고 있을까? 강이도 잘 있겠지?’
강이 생각하며 설핏 잠이 들었는데,
쾅쾅쾅!
누군가 대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집안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 이러십니까?”
잠시 뒤 황급히 광문이 열리며 누군가 혁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어딨느냐! 이집 딸!!”
“예에?”
“니네 아씨 어딨냐 말이다.”
“모릅니다. 저는 하룻밤 묵어가는 객입니다.”
군사는 혁의 괴나리봇짐을 보더니, 그대로 혁을 내팽개치고 광 곳곳을 뒤지다 나가버렸다. 혁은 깜짝 놀라 마당으로 뛰쳐나갔는데,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놔라!”
잠자던 그 집 주인이 포박당한 채 끌려나오고 있었다.
“나으리~~~!!
하인들이 끌려가는 주인을 쫓아가고 있었다. 혁은 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물었다.
“며칠 전 아씨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거든.”
“스님요?”
“에휴...그렇다네.”
“근데, 그게 왜요?
잡혀간 그 집 주인은 고려에서 꽤 높은 벼슬을 지내다 스스로 관직을 그만두었다.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왕한테 마지막으로 충언을 올렸다.
“전하, 전하께선 고려의 왕이십니다. 이젠 주색을 멈추시고, 백성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뭐라?”
지금까지 자기한테 그런 말을 한 자가 없기 때문에, 충혜왕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감히, 이 나라 왕인 나한테...무엄하다!”
그 무례함이 아주 불쾌하고 불쾌한 충혜왕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자한테 과년한 딸이 있다 들었다. 이번에 그 딸도 공녀로 보내라!”
청천병력 같은 어명이 떨어졌고, 그는 딸을 공녀로 보내지 않으려고 가장 권세 있는, 기황후 오빠, ‘덕성부원군’기철을 찾아갔다.
“제발 제 딸이 공녀로 가지 않게, 힘 좀 써주십시오. 약소하지만....”
“뭘 이렇게나 많이 가져왔는가? 걱정 말고 돌아가 있게.”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만큼, 어쩜 왕보다 더 권세 있는 기철이었기에 가능할 줄 알았는데...
“어허~ 이거 큰일 날 사람일세. 내 언제 그런 약속을 했다고!”
“덕성군 나으리.”
“그만 돌아가게. 왕이 내린 어명은 나도 어찌할 수 없네. 내 무슨 힘이 있다고 여기까지 와서 이러는가.”
야비한 기철은 뒷돈만 받은 채 모르쇠로 일관했고, 결국 그 아비는 딸의 머리를 자기 손으로 깎으며 눈물을 흘렸다.
“미안하다. 공녀로 잡혀가느니, 비구니가 되는 게 나을 것이다.”
허나 가만있을 충혜왕이 아니었다.
“뭐라? 딸이 없어?”
“예, 딸은 아주 오래전에 비구니가 됐다고 합니다.”
“요것 봐라. 감히.... ”
그 아비는 물론, 비구니가 된 딸까지 잡아들였다.
“제가 어려서부터 비구니가 되고 싶어, 스스로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 정녕 니가 원했다고?”
“그렇습니다.”
충혜왕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아비한테 철퇴를 내렸다.
“윽!”
철퇴를 맞은 아비는 피를 뚝뚝 흘리며 그대로 쓰러졌고, 아버지를 본 딸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충혜왕은 세상 그 누구보다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니 아비 목숨이라도 살리고 싶으냐?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머리를 깎아 민머리가 됐는데도 참 곱고 예쁜 딸을 보자, 충혜왕은 마음이 동했고, 결국 비구니가 된 딸을 자기 침실로 끌어드렸다.
“마님! 아이고 마님~~”
딸이 충혜왕한테 몹쓸 짓을 당한 충격에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스스로 목을 매버렸고, 이렇게 해서 하루아침에 명문가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아~~ 정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수많은 백성들이 핍박박고 힘들어하는 현장에서 혁은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었다.
“안된다.”“어머니!!”
어느 날, 장승 아래에서 잠을 자던 혁은 울부짖는 소리에 잠이 깼다. 아직 날이 다 밝지 않은 새벽녘이었는데 대여섯 명의 군사들이 어린 처자들을 포박해 끌고 가는 것이었다.
‘미영이 나이 밖에 안돼 보이는데...’
지난 밤, 이 마을에선 공녀 색출이 있었다. 자다가 속옷차림으로 잡혀 나온 처자가 있는가 하면, 공녀로 잡혀가지 않으려고 도망치다 우물로 뛰어든 처자도 있다 했다. 하룻밤 사이에 마을은 쑥대밭이 됐고, 울음바다가 돼버린 것이다.
‘백성을 보살펴야 하는 자들이, 백성들의 울분은 듣지도 않는구나.’
사실이 그랬다. 고려의 지배층은 원나라에 비위를 맞추느라 공녀 색출에 광분했고, 백성들의 울분, 원망 따윈, 관심 밖이었다.
“어머니~~~”
혁은 울부짖으며 잡혀가는 어린 처자를 보자, 미영이 생각에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 군사들 앞을 가로 막아 섰다.
“웬 놈이냐?”
군사들이 혁을 보고 소리쳤다.
“보아하니 죄 없는 처자를 끌고 가는 것 같은데, 놔주시지요.”
군사들은 혁의 몰골을 보고 비웃었다.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 가던 길 가시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느라,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마른데다, 다 해져 너덜너덜해진 옷을 입은 혁은 거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명에 따라, 우린 우리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비켜라.”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혁을 보자, 군사 두어 명이 혁 앞에 섰고, 곧이어 싸움이 시작됐다. 처음 몇 명의 군사는 혁이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 구경 돌며 제때 밥을 먹지도 못했던 혁은 금세 힘이 빠졌고, 결국 군사들한테 잡혀 처자와 같이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 이리 쉽게 무너지다니......’
옥에 쭈그리고 앉았는데 서서히 해가 비치기 시작했다.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부터 굶은 혁이었다.
“젊은이는 어쩌다 잡혀왔는가?”
그제야 혁은 옥안에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웬 노스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 저는...”
혁은 장승에서 일어나 잡혀가는 처자를 보고, 자기가 한 일을 이야기했다.
“제가 그래도 무예는 꽤 하는 편이었는데... 그동안 연습을 게을리 했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노스님은 혁을 그윽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눈초리로 바라봤다.
“자네가 그 처자를 살려줬다 치자, 그럼 달라진 게 있었을 거 같은가?”
“처자는 가족한테 돌아가지 않았겠습니까?”
“그 처자가 가족들한테 돌아갔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글쎄요...”
“집으로 돌아갔다면, 군사들이 가만있겠는가?”
“.............”
“또 다른 군사가 올 것이고, 그 군사들이 저 처자를 찾아 온 집안을 뒤질테고...”
“.......”
“혹 그 처자가 다른 데로 피신했다면, 처자를 찾으려고 가족들을 잡아드릴테고,”
“........”
“그래도 못찾으면, 옆집에 그 옆집에... 가까운 친인척까지 찾아나 설 것이네.”
“그럼 스님은 제가 못했단 말씀이십니까?”
“애시 당초 자네가 나서서 될 일이 아니었단 걸 말하는 것일세.”
“그럼 제가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가만히 있었어야지. 힘도 없으면서.”
“그럼, 힘없는 백성들은 매번 당하고만 있어야 합니까?”
혁은 정말 궁금했다.
“세상을 돌아보며, 그동안 너무 편안하게만 살아왔구나 싶었습니다.”
그랬다. 강이와 무예를 익히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혁의 눈에, 세상구경하며 본 잔혹한 현실은 굉장한 큰 충격이었고, 자기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어떤 세상인지 눈 뜨게 되는 시작점이 되었다.
“저는 무과 급제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넓은 세상을 보니, 무과 급제가 다가 아닌 거 같습니다. 무과에 통과하면, 저도 죄 없고, 힘없는 백성들을 잡아들이는 군사가 될 게 뻔해 보입니다.”
세상을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혁은 백성이 아니라, 지배층이 문제라는 걸 똑똑히 보고 느꼈다.
“아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서모를 탐한 짐승만도 못한 미친놈이 왕으로 앉았으니, 말 다했지 않는가.”
“아 입조심하게. 그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철퇴 맞는다네.”
“내 틀린 말 했나? 딸을 낳으면 언제 잡혀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 누가 좀 확 뒤집어놨음 좋겠네 그려”
주막에서 국밥을 먹을 때면 수도 없이 듣던 백성들의 탄식, 하소연이었다.
‘아~~ 강이야! 이래서 니가 남자로 살아가고 있었던 거지? 그것도 모르고 나한테까지 비밀로 했다며 널 원망했으니....’
혁은 강이도 보고 싶고, 혹여 미영이도 공녀로 잡혀간 건 아닌지 걱정돼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왕 나선 길 좀 더 둘러보다 이렇게 옥까지 갇혔던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서 제가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스님.”
“그냥 모른 척 했어야지.”
“예에?”
“모른 척 안하고 도와주려 했지만,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
“그 처자도 잡혔고, 자네도 잡히지 않았는가? 안하니만 못하게 되었지.”
“.............”
혁은 하나하나 맞는 말씀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계속 이렇게 당하고만 살아야 합니까?”
“도적떼들이 날 뛰고 있네. 그 도적떼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님의 질문에 혁은 스님을 빤히 바라봤다.
“도적떼를 잡아야죠.”
“그 수가 엄청난데, 그 수많은 도적떼를 다 잡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수장을 잡아야겠지요.”
“그렇다네. 도적놈들을 처리하려면 수장을 잡아야지.”
“..........”
“잘 알고 있으면서, 뭘 어떻게 해야 하냐 물었네 그려. 하하하.”
“예? 제가 답을 안다구요?”
혁이 무슨 소린지 몰라 스님을 빤히 쳐다보자, 스님은 조용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맹자는, 왕이 큰 잘못이 있으면 곧 간언하고, 반복하여 여러 번 간하여도 듣지 않는다면, 왕을 바꿔야 한다고 말씀하셨네.”
“??????????.”
왕을 바꿔야 한다고?
역모?
혁은 스님의 말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는데, 군사가 와서 옥문을 열었고, 스님은 나가면서 혁을 한번 힐끗 돌아보며 웃었다.
‘왕을 바꿔야 한다고?’
스님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