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붉은색을 따라 우경이 답을 했다.
“창밖에서 붉은색을 본 건 확실하지 않아요. 선생님 말씀처럼 가수면 상태라 환각을 본 건지, 아니면 진짜 붉은색을 본 건지. 어젯밤부터 붉은색에 홀린 것 같아요.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 이제는 진짜 모르겠어요. 내가 지금 잠을 자는 건지... 깨어있는 건지.”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했다는 건가요? 환상처럼 그 자리에서 보였다 사라지는 게 반복됐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었어요. 분명 드레스 룸에서 붉은 천을 발견해서 그걸 장식장 위에 올려뒀거든요. 근데 잠시 뒤 다시 갔을 때 없었어요. 그리고 조금 전에도 창밖에서 붉은색을 보고 내려갔더니 없어졌고, 이상한 메모도 받았어요.”
[너무 잠을 못 자서 무의식이 자신이 했던 행동을 지운 것 같아요. 전에도 말했지만 잠은 기억력에도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말아요. 기억을 못 하는 것뿐이니까.]
우경을 안심시키려는 듯 김이진의 목소리가 더 차분하고 안정적으로 변했다.
깊게 한숨을 뱉어낸 우경이 눈가에 있던 팔을 치우며 물었다.
“정말... 그런 걸까요?”
[그럼요. 그렇게 걱정되면 하나씩 확인을 해볼까요?]
“확인이요?”
[네. 일단은 집 안에서부터. 전화 끊지 말고 드레스 룸으로 가봐요.]
“잠시만요.”
#4. 혼란이 휘몰아친다.
우경이 힘겹게 침대를 벗어났다.
졸음이 가득 들어찬 발걸음이 나른하게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드레스 룸의 불이 켜져 있다.
“드레스 룸이에요.”
[자. 그럼 아까 붉은 천을 놨던 곳으로 가보죠.]
우경이 걸음을 옮기며 닫아둔 창문을 확인하고 장식장을 내려 본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이번에는 붉은 천을 처음 발견한 곳을 확인해 볼까요?]
우경이 상의가 가득 걸린 행거로 향했다.
한쪽 귀와 어깨 사이에 휴대폰을 걸치고 옷 사이를 뒤졌다.
처음 발견한 것과 같이 재킷 주머니 사이로 삐죽 올라온 붉은 천이 보였다.
“어... 이게 왜 여기에...?”
[찾았나 보네요.]
“네. 찾았어요. 근데 여기 가져다 두지 않았어요.”
[좀 전에도 말했잖아요. 자신이 한 행동을 기억 못 할 수도 있다고. 그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뇌가 판단했다면 더욱 그럴 수 있어요. 잠을 못 자 너무 피곤해진 뇌가 불필요한 기억을 정리한 거죠.]
어린애를 타이르는 것처럼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누구라도 설득 될 것 같은 말투에 우경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거라면 다행인데... 그래도 걱정은 돼요.”
[그러니까 좀 자야 한다는 거예요. 지금은 단순한 기억의 조각이었지만 뇌가 더 힘들어지면 어느 순간 파업을 할지도 모르니까요.]
“파업이요?”
[기면증처럼 어느 순간 잠들어버릴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더라도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게 될 거예요.]
“아... 겁나네요. 근데 아시잖아요. 저도 정말 자고 싶어요.”
[그런 것치고는 너무 상담을 안 나오시는데요? 상담으로 좋아지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이번 기회에 수면 리듬도 체크 할 수 있으면 좋겠고요.]
“제가... 잘 안 나갔나요?”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 것처럼 우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휴대폰 너머로 살짝 웃음기 섞인 자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우경씨. 내 얼굴 기억 안 나죠?]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던 우경이 놀라 눈을 떴다.
“아... 진짜네요. 기억이 안 나요.”
[그럼 그만큼 오래 안 오신 게 맞겠죠? 자. 그럼 다음을 해결해 볼까요? 이제 거실로 나가봐요.]
“밖이 아니라요?”
우경이 고개를 돌려 드레스 룸 안을 한 번 더 살폈다.
그리고는 습관적으로 드레스 룸 불을 끈 우경이 거실로 나갔다.
[밖은 맨 마지막에 가는 거로 하죠. 일단은 집 안에서부터 확인하는 거로 하고.]
“그래요. 지금 거실이에요. 여기선 뭘 확인하죠? 창밖이요?”
[아뇨. 우경씨가 받았다는 메모.]
“그거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우경이 고개를 숙여 쓰레기통 안을 쳐다봤다.
안에는 우경이 버린 종이와 붉은 리본이 없었다.
“어...? 분명 아까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걸 침실에 들어가기 전에 버렸는데... 왜 없죠? 아니, 없을 수가 없는데....”
[다른 쓰레기통에 버린 건 아닐까요?]
차분히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아니요. 분명 침실로 들어가는 중간에 버렸어요. 거실에서 침실로 들어가는 길에 쓰레기통은 이거 하나에요. 어떻게 이게... 하... 진짜 뭐에 홀린 건가?”
[자. 일단은 친정해요. 다른 것부터 확인하죠. 밖으로 나가볼까요? 혹시 어지럽거나 너무 졸리면 나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일단 점퍼를 좀 입을까요? 새벽이니 추울 수도 있잖아요. 입었으면 밖으로 나갈까요? 1층 공원으로 가는 거예요.]
혼란스러운 우경을 김이진이 차분하게 달랬다.
김이진의 말에 따라 우경이 점퍼를 입고 문을 나섰다.
-
승강기 벽에 등을 기댄 우경이 기억을 떠올리려 눈을 감았다.
여전히 통화 중인 휴대폰을 귓가에 댄 채였다.
[아까 발견하고 승강기를 이용했었나요?]
“아니요. 그때는 비상계단으로 내려갔어요. 승강기를 탈 생각은 하지도 못했거든요. 정말 홀린 것처럼.”
[그랬군요. 1층에 도착한 거 같네요. 이제 어디로 갔죠?]
“공원 입구로요.”
우경의 목소리가 텅 빈 로비를 울렸다.
로비를 빠져나간 우경이 아까처럼 공원에서 자신이 사는 건물을 쳐다봤다.
“지금처럼 공원 입구에 서서 내가 사는 건물을 쳐다봤어요. 근데 비상계단의 불이 차례로 켜졌죠. 누군가 내가 사는 층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음.... 전에 우경씨가 썼던 시나리오에 그런 장면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들었던 거 같은데요.]
기억을 더듬으려 찌푸려졌던 우경의 표정이 순식간에 펴졌다.
“아! 있어요. 정확히 같은 장면이... 근데 그건 공원 앞이 아니었어요. 그냥 자신이 다니는 회사를 길 건너편에서 본 것이었죠.”
[그래요. 자. 그럼 이제 주변을 좀 살펴볼까요?]
김이진의 말에 따라 우경이 주변을 살핀다.
“아까처럼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네요. 근데 조금 전이 더 어두웠어요.”
[시간이 지났으니까요. 그래서 주변에 붉은색은 전혀 없는 건가요?]
유심히 주변을 살폈지만. 붉은색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없어요. 전혀. 아까도 그랬어요.”
[그렇군요. 하지만 어둠 때문에 착각을 일으킬 수 있는 색도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요.]
차분하게 이어지는 김이진의 목소리 사이로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소리였지만 우경은 혼란스러운 상태라 자세히 듣지 않았다.
“어디 가시나요?”
[운동이요. 일찍 깼으니 그만큼 움직여 두려고요. 그래야 시간을 알차게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그렇기는 하겠네요.”
[자! 그럼 다시 들어가 볼까요?]
“공원 앞에서 본 건... 역시 환상일까요?”
[아닐 수도 잇어요. 그래서 확인을 하러 간 거예요. 그곳에 붉은색의 무언가가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일단은 없으니까요. 다음은... 뭐죠?]
“문 앞에 말려있는 종이가 있었어요. 붉은 리본에 묶인.”
[그럼 집으로 돌아가면서 확인하면 되겠군요.]
우경이 건물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연신 뒤를 돌아본다.
거리에는 사람 하나가 지나가지만, 우경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7층을 누르자 또 독특하고 스산한 안내 음성이 들린다.
휴대폰 너머로 쇠고 된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린다.
비상구나 방화문 같은 종류의 굉장히 익숙한 소음이었다.
“진짜 운동가시나 보네요.”
[가야죠. 제가 사실은 운동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거든요.]
“아... 그렇겠네요. 저처럼 환자들이 자주 전화를 할 테니까요.”
[음... 별로 그렇지는 않아요. 보통은 수면제나 유도제가 효과를 보이거든요. 너무 잘 들어 의존이 생기는 것을 관리해야 할 정도로요.]
“그럼 전 문제아가 되는 건가요?”
멋쩍게 웃는 김이진의 목소리 사이로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그런 건 아닙니다. 약이 잘 듣는 환자들은 나중에 의존하는 부분 때문에 문제가 생기니까요. 문제를 먼저 직면하느냐 나중에 직면하느냐의 차이죠. 결국은 생체 리듬이 온전히 자리를 찾아야 하는 문제라. 다들 힘들어하는 거죠.]
“문제아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군요.”
[하하하하. 다행이네요.]
승강기의 스산한 안내 음성이 들리고 문이 열렸다.
자연스럽게 비상계단 쪽을 한 번 쳐다봤던 우경이 시선을 돌렸다.
시선 끝에 붉은 리본이 묶인 종이가 걸렸다.
“.....어?”
[무슨 일이죠?]
“아까 그 종이가 여기 있어요. 분명 가지고 들어갔는데... 왜 또 여기에.. 또 누군가가. 아니, 그 짧은 사이에 어떻게... 아니... 그게 아니라.....”
무슨 말을 뱉어내는지 모른 채 우경이 말을 뱉어냈다.
휴대폰 너머로 김이진이 살짝 큰 목소리를 냈다.
[우경씨. 도우경씨.]
“어... 이게....”
[도. 우. 경. 씨. 우경씨.]
김이진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지고 단호해진 뒤에야 우경의 귀에 들려왔다.
“아... 네. 하...”
[자. 천천히 심호흡해요. 괜찮으니까 침착해요. 크게 심호흡하고. 자... 날 따라서 천천히.]
우경에게 들리라는 듯 김이진이 먼저 심호흡을 했다.
들이마시고 뱉어지는 소리를 따라 우경이 무의식적으로 심호흡을 했다.
[자. 이제 정신 차리고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주겠어요?]
“아까 가지고 들어갔던 종이가 문 앞에 있어요. 아니, 앞이 아니라 옆에... 어떻게... 또....”
[도우경씨. 잘 들어요. 내가 아까 뭐라고 했죠?]
“아까요?”
[너무 피곤해서 뇌가 기억을 지웠을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당신이 버렸다고 생각한 걸 다시 밖에 돌려뒀을 수도 있고 애초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안에 적힌 내용은 기억하죠?]
“네.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럼 펼쳐봐요.]
휴대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걸친 우경이 리본을 풀었다.
종이를 펼치자 아까와 전혀 다른 내용이 있었다.
“전단...?”
[무슨 전단인가요?]
“강좌 같은 걸 한다는 내용이에요. 분명 아까는 이런 게 아니었어요. 피로 쓴 글씨 같은 것이었는데... 이런 게 아니라.”
단호한 김이진의 목소리가 우경의 말을 끊었다.
다시 심호흡을 들려주며 우경이 따라 할 수 있게 유도했다.
[자! 다시 심호흡하고. 일단은 진정해요. 종이는 아까와 같은 모양인가요?]
“분명히 같은 모양이에요. 흰 종이에 붉은 리본. 내용만 다를 뿐이지 외관은 같아요.”
[아까도 물었지만 우경씨가 쓴 시나리오에 이런 장면이 있지 않았나요?]
“시나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