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협력부는 출장이 다른 부서에 비해 잦은 편이다. 아무래도 여타 기관과 공동 추진하는 일이 많다보니 그럴 법도 하다. 심지어 오늘은 대외협력부만이 아닌 타부서 사람과 팀을 꾸려 무려 서울까지 출장을 올라왔다. 양 옆에 각 부서 팀장이며 주무관이며 거의 8폭 병풍처럼 두른 진주는 막내역할을 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내리 바쁘다. 물론 그가 현무가의 자제이지만, 심지어 그가 차기 종손으로 거론되지만 그가 그런 것들에 뻗댈 사람이었다면 애초부터 대외협력부는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며 애초에 차기 종손으로도 거론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행사엔 뭔 사람들이 이리도 많은지 죈 종일 인사하고 소개하고 인사했다. 그나마 행사가 진행되는 사이엔 숨 좀 돌렸다. 어쩐지 서울 코엑스에서 한다 했어. 물론 이런 큰 행사에서 보통 진주 나이의 친구는 주무관 뒤에서 식은땀만 흘리며 쫓아다니면 된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인지라 같이 간 부장보다도 진주를 더 알아보니 참으로 힘들어 죽겠다. 같이 간 팀원들 눈치보랴 자신에게 인사하는 사람들 받아주랴. 안면 있는 사이야 그렇다 쳐도 차기 현무가 종손에게 눈도장이라도 찍어보자 하는 이들이 한 트럭이니 진주 주변에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러나저러나 진주를 대외협력부의 최고 자랑으로 여기는 부장님은 한 걸음 뒤에서 허허 부처 웃음만 지었다. 진주랑 오니 이리 편하고 좋구만. 보다 못한 주주무관님의 인터셉트를 오케이 사인으로 도망간 대기실에서 겨우 잠깐의 평화를 맞이했다.
이번 행사엔 사용하지 않는 곳인지 널찍한 대기실에는 사람도 어떤 안내 표시도 없었다. 진주는 아무런 고민 없이 살짝 열린 방안으로 들어갔다. 전자 잠금장치를 확인하고는 문이 닫히지 않게 조금 열어뒀다. 어차피 행사장소와는 꽤나 떨어진 곳이니 누가 올리도 없어보였다. 마침 지잉- 울리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진주씨, 20분 뒤에 봉은사 방향 출구로 나와요. 우리도 여기 마무리 하고 나갈 거 에요.’
한숨을 푹 내쉬며 한 켠에 구비된 의자에 풀썩 기대앉았다. 아주 지친다 지쳐. 사람한테 치이는 게 가장 힘들다더니. 잠시 눈을 감고 푹신한 의자에 파묻혀 있길 얼마간, 저벅. 저벅, 복도를 가로지르는 걸음소리가 울렸다. 눈을 뜬 진주가 허리를 푹 숙여 머리를 쓸어 넘기길 두 어 번. 이내 고개를 들었을 때, 거울 속 수현과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누군가 이 방에 들어와서 인지, 아님 그게 수현이어서 인지 진주는 피곤에 찌들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돌아온 정신에 놀란 표정을 갈무리하며 자리서 일어나 수현에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의 수현은 그런 진주에 가벼운 목례로 답했다. 팔에 들린 그의 검은 자켓은 입구 근처 쇼파 위로 올라갔다. 짧은 그의 머리는 주인을 닮았는지 미동도 않았다. 수현은 들고 온 서류 몇 장을 들췄다. 무채색의 그는 빠르게 공간으로 스며들었다.
여기가 그의 대기실인 것인지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 서류 넘기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퍼졌다. 이미 나갈 타이밍을 놓친 진주는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현무가의 자제니 차기 종손이니 해도. 진주에게 수현은 어려운 존재였다. 나이차도 나이차지만 서로의 상황이 그러했다. 주변에 들리는 소문도 만만치 않았다. 대외협력부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가 접한 수현의 이야기는 꽤나 자극적인 것들뿐이었다. 심지어 어렸을 때 빼고 학당생활을 하는 동안은 거의 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독대는 처음이었다. 그런 둘 사이의 정적을 깬 건, 대기실 안으로 들어온 수현의 비서였다.
“대표님, 아.”
무언가 수현에게 고지하려던 비서는 방 안에 있던 진주를 발견하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죠?”
“아...”
비서가 진주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 걸음을 돌려세운 건 다름 아닌 수현이었다.
“김비서.”
“네. 대표님.”
“그만 가죠.”
수현은 들고 있던 서류철을 다시 덮었다. 그리고 올려뒀던 자켓을 들고 먼저 방 밖으로 향했다. 찝찝한 표정으로 진주를 쳐다보던 비서도 별 수 없이 수현의 뒤를 얼른 따라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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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 아직도 안 왔어?”
다은의 물음에 아영이 시간을 확인했다.
“좀 늦네..”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지만 꺼져있다는 안내만 돌아왔다. 안 그래도 요즘 화개로 향하는 지리산 뒤쪽 지름길에 소문이 돌았다. 뭐가 보인다든지. 핸드폰이 잘 터지지 않는 다든지. 그런 소소한 것들의 소문. 그래도 누군가 다친 일은 없었기에 여느 때처럼 생겼다 사라지는 한낱 풍문으로 여겼다. 우리가 물론 5G 시대에 살지만 산 속에서 핸드폰 좀 안 터질 수도 있지. 그리고 산에서 헛것 보는 이들이 하루 이틀이던가. 민지 역시 코웃음을 치며 화개로 향했다. 코리안 유교걸은 그런 것 따위에 지지 않아.
다은과 아영은 산책도 할 겸 민지 마중도 나갈 겸 지름길 입구로 향했다. 그러다 마침 만난 것이다. 운동한답시고 운동장에 나와 있던 은호, 결, 도형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운동장엔 아이들이 꽤 나와 있었다. 여자 아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회전초밥 돌 듯 운동장을 돌았고. 남자 아이들은 공 하나에 떼 지어 뛰어 다녔다.
“오올- 운동하냐 너네?”
레이더가 달린 건지 멀리 아영을 발견하고 뛰어온 결에 다은이 킥킥 웃었다. 헤실헤실 웃는 결의 뒤로 은호와 도형도 덤처럼 딸려왔다.
“미친놈아. 말 좀 하고 가라.”
헥헥 거리는 도형의 욕도 덤이었다.
“어디 가?”
“민지가 아직 안 와서 마중 겸 나왔어.”
아영이 들고 나온 물병을 결에게 건넸다. 받아든 결은 여전히 헤실헤실 웃었다. 저 새끼 바지 까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래도 엉덩이에 달린 게 강이지 꼬리 아니냐고.
“안 그래도 소문 돈다며.”
불퉁한 생각을 하며 땀을 닦던 도형이 은호의 말에 입맛을 쩝 다시며 말했다.
“야 근데 그 소문 우리 형 입학했을 때도 돌았대. 아마 진주 누나 입학했을 때도 돌지 않았겠냐? 그냥 약간 스테디 구전설화 같은 거지.”
“하긴 나도 좀 꾸준하게 들었던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는 결에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수긍하는 눈치였다.
민지는 그로부터 두 시간이 더 지나서야 가까스로 학당에 도착했다. 학당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온 민지는 로비에 앉아 기다리는 둘을 보자마자 주저앉았다.
“야 진짜 미친 거 아니냐...”
놀라 헐레벌떡 달려간 둘이 민지를 데리고 겨우 방으로 갔다. 머리에 풀을 달고 온 그의 모습이 매우 범상치 않아보였다. 침대에 앉아 물을 마시고 숨을 고르고 나셔야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 갈 때는 아무 일도 없었거든. 근데 내가 심지어 거기서 8시에 출발했단 말이야? 근데 오는데 뭐가 자꾸 따라오는 것 같은 거야. 가도 가도 계속 같은 길인 것 같고. 아니 그 시간에 원래 돌아가는 사람 많잖아. 근데 하나도 없는 거야. 완전 하나도. 그래서 너무 무서워서 너네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아! 너네 왜 전화 안 받았어?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둘을 쳐다봤다.
“너 전화 꺼져있던데?”
아영이 직접 통화목록을 보여주자 민지는 또 다시 하얗게 질렸다.
“어.. 아닌데... 나 너네한테 전화 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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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임에도 북적이는 터미널. 사람들은 다들 자신의 행선지를 찾아 떠나느라 바쁘다. 그 속에 섞이지 못하는 한 사람.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한분이 웬 종이를 나눠주고 있다. 이리저리 몸이 치이면서도 한 명에게라도 더 나눠주고자 절박하게 움직였다. 받는 사람은 많아야 두 어명. 받지 않는 사람이 팔할이었다.
“이것 좀, 이거 한 번만 봐줘요.”
2박3일의 출장이 끝났다. 몇 명의 주무관은 다른 일로 먼저 복귀했고, 몇 명의 주무관은 부장과 함께 다른 업무를 보기 위해 서울에 남았다. 진주는 어떡할래? 라는 부장님의 질문에 이번에도 역시 주주무관이 나섰다. 뭘 그런 걸 물어보세요. 부장님은. 자 얼른 얼른 차에 타시죠. 직접 차문을 열어 부장님을 밀어 넣은 주주무관은 진주야 간다! 외침과 함께 차를 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주무관이 너무 좋다 진짜. 마지막 힘을 쥐어짜 사라지는 차를 향해 박수를 짝짝 쳤다.
여하튼 그렇게 터미널에 입성한 진주는 복귀 전화를 걸었다. 안 그래도 학당에 일 터졌다고 시끄럽던데 진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학생. 이것 좀 봐줘요.”
그 와중에 건네는 전단지를 무심결에 받아 들어 대충 훑고는 바로 가방 안에 넣었다.
“네, 이제 끝나서 다시 학당 들어가요. 아마 오후에나 도착할 것 같아요.”
진주는 복잡한 사람들 틈 사이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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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귀한 집 늦둥이로 태어나 금이야 옥이야 자랐다. 이름도 귀한 탄생에 걸맞게 한평생 오복 누리며 살라고 이름을 복이라 지었다. 게다가 오가네 자식이니, 둘이 합쳐 도합 오복이 되시겠다. 물론 성이 다섯 오(五)는 아니다. 여하튼 오복씨는 양가 조부모로부터 내리사랑을 한껏 받고 살아온 사랑둥이다. 어화둥둥 내 새끼로 자라 난지 십 여 년. 그렇다고 그가 안하무인으로 자란 것은 아니다. 사랑을 받은 만큼 베풀 줄 아는 아이로 훌륭하게 성장하는 듯 했으나. 십 여 년 간 살아온 그의 인생에 가장 큰 난관을 마주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학당입학 되시겠다.
학당 입학이 왜? 그 집안이 아약집안도 아니고 조부부터 3대가 이어진 훌륭한 도사집안의 자식인데 그것이 대체 왜. 일반인 출신으로 학당에 입학한 은호도 잘만 다니는데요. 이 친구가 어화둥둥 내 새끼 오만 사랑을 다 받으며 자란 건 사실인데. 안타깝게도 사랑을 사람한테 받다 못해 귀신한테도 받았다. 중학생 시절부터 갑자기 귀눈이 트여 귀신만 보면 혼절했다. 근데 그가 일반 도사가 아닌 특기자니 문제가 되는 거다.
다행이라고 하면 다행이랄 것이 양가 조부모와 부모의 능력과 발품을 있는 대로 팔아 아이의 귀눈을 틀어막을 비책을 구했으니. 그게 바로 복이가 애지중지 끼고 다니는 팔찌다. 경귀석으로 만든 팔찌는 복이에게 있어 구원과도 같은 존재였다. 눈을 뜨고 잠을 자고 샤워를 할 때까지도. 처음 찬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그의 몸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가 바로 그의 몸에서 떨어진 적 없던 그 팔찌가 떨어진 이야기다.
앞서 말했듯이 복이는 젊음을 만끽하겠단 의지로 당당히 화개로 향했다. 같이 술을 마신 이들은 어디로 간 건지 홀로 산속 지름길을 통해 학당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얼큰하게 오른 취기에 철푸덕 바닥을 몇 번 굴렀다. 또 구르다 휘저은 팔이 나뭇가지에 걸렸고 그의 팔에 있던 팔찌도 알알이 바닥을 굴렀다.
“아이고...아이고...”
그 와중에도 정신머리는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쪼그려 앉아 지 주인 닮아 자유분방하게 구르는 팔찌 알을 하나하나 주웠다. 하나씩 주워 소중히 감싸 쥐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서있는 형체와 조우했다.
“이게 모고...”
자신을 바라보는 웬 긴 머리 여자가 있었다. 뭔데 이게.. 아직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복이씨는 손을 내밀었다.
“아야, 길을 잃었나. 학당은 절루...”
여성의 손을 향해 뻗은 복이의 손이 그대로 통과했고 중심을 잃은 복이가 손을 퍼덕였다. 휘저은 손은 의미 없이 결국 복이는 여성을 향해 고꾸라졌다. 또 다시 주저앉은 복이가 고개를 돌려 자신이 서있었던 뒤를 바라봤다.
“옴맘마...”
여전히 그 자리에 말뚝같이 박혀 자신을 바라보는 여성. 그게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