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호는 건물을 나와 학교 반대편으로 걸었다.
병원 건물이 나오자 정민이에게 거짓말 한 사실 때문에 편하게 지나치지 못했다. 그래도 오늘은 병원을 굳이 가지 않을 거였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걷다보니 더워졌다. 목도리도 좀 풀고, 걸음도 늦췄다. 은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원 입구에 와 있었다. 은호 자신도 예상 못한 목적지에 살짝 당황했다. 은호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 동안 한 번도 이 근처에는 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 은호의 발걸음은 은호를 여기로 오게 했다.
은호는 큰 결심을 한 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익숙한 듯, 당연한 듯 입구 앞에 설치된 자판기 쪽으로 갔다. 떠오르는 기억들 속에서 은호는 살짝 망설였지만,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해보고 싶었다.
은호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자판기에 넣었다. 버튼을 누르기 전 살짝 망설였다. 은호는 당연히 코코아를 마실 거였다. 그런데 밀크커피에 손이 갔다. 괜히 혼자서 나쁜 짓 하는 것 같아서 은호는 갑자기 뒤돌아 봤다.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은호는 밀크커피와 코코아 두 잔을 들고 늘 앉던 나무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떠오른 기억에, 종이컵 두 잔 옆에 같이 앉을 다른 누군가가 더 이상 없음에, 은호는 슬펐다. 괜히 왔나, 괜히 두 잔을 뽑았나, 후회가 될까봐 걱정이 되었다.
은호는 차오르는 눈물을 겨우 눈 안에 가둬두고 너무도 파란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생각보다 바람이 차가워서, 그리고 눈이 시릴 만큼 하늘이 너무 파래서 눈물이 났다. 그날의 아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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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호야, 토요일이다. 우리 공원에 가자.”
선우는 토요일 아침 늦잠 자고 싶어 하는 은호를 깨웠다. 선우는 시간이 되는 대로 은호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평소에는 바빠서 그럴 수 없으니까 시간이 허락한다면 은호와 함께 했다.
“아빠, 나 더 자고 싶은데. 그리고 오늘 많이 추울 것 같아.”
어떻게든 은호는 따뜻한 이불 안에서 나가기 싫었다. 그러나 선우의 제안에 은호는 일어나고 말았다.
“코코아 사줄게. 그리고 밀크커피 한 모금.”
선우는 목도리로 은호를 꽁꽁 싸고 은호의 팔을 잡고 약간 앞장서 걸었다. 은호는 추운 날씨에 온몸이 떨렸지만, 조금 걷다보니 차가운 바람에 정신이 서서히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은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올 겨울도 많이 추웠어. 다행히 우리 은호 감기도 빨리 떨어졌고.”
은호는 목도리 속에서 뭐라고 말을 했다.
“응?”
선우는 은호의 말이 들리지 않아서 은호 입 근처에 있는 목도리를 내렸다. 그제서야 살았다는 표정으로 은호는 목도리를 느슨하게 풀어내며 다시 말했다.
“눈이 많이 안 왔어. 그래서 너무 아쉬워.”
선우는 그런 은호의 얼굴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살짝 여유롭게 목도리를 걸쳐주었다.
“그래도 목도리 제대로 해. 갑자기 이렇게 풀면 감기 걸려.”
은호와 선우는 차가운 공기가 주는 행복감을 느끼며 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코코아와 밀크커피?”
은호는 선우의 외투 주머니에서 동전을 빼서 자판기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다시 뒤돌아 물었다.
“진짜 밀크커피 한번 마시게 해주는 거지?”
선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즐거워하며, 들떠하며 버튼을 누르는 은호가 전해준 밀크커피를 들고, 코코아를 뽑은 은호와 함께 동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나무의자로 가서 앉았다.
하늘은 티 하나 없이 파랗고, 공기는 아직 많이 차가웠지만 손에 든 작은 종이컵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에 가슴 깊숙한 곳에서 선우는 행복해지고 있었다.
“아빠, 짜안”
은호는 선우가 들고 있는 종이컵 쪽으로 자신의 종이컵을 가져다 댔다. 선우는 은호의 그 모습에 웃음이 났고 그래서 진짜 행복했다. 자판기 커피한잔이 주는 행복치고는 엄청났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이 몸 안으로 전해준 따뜻함은 기분을 더 좋게 해주었다. 선우는 옆에서 코코아를 홀짝이는 은호를 바라보다가 넓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이 모든 것에 감사하고 싶어졌다.
“아빠, 울어?”
선우는 은호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음을 알았다. 자신의 마음이 눈물로 나와 버렸다. 선우는 서둘러 다른 이유를 댔다. 은호와 함께하는 시간은 눈물과 어울리지 않았다.
“아냐. 공기가 너무 차가워서, 그리고 눈이 시릴 만큼 하늘이 파래서 눈물이 맺힌 거야.”
“시릴 만큼 파란 게 뭐야?”
은호는 그 느낌을 짐작하지 못했다.
“음... 지금 네가 보는 하늘. 우리가 같이 보고 있는 지금의 하늘을 그렇게 표현해. 그리고 언젠가 알게 될 거야.”
“그게 뭐야. 하여간 알았어. 그럼 이런 하늘일 때 시리도록 파랗다 하면 되는 거야?”
선우는 은호의 천진난만한 얼굴 위로 살짝 드러난 진지함에 웃음이 났다.
“그래. 그러니까 지금 나처럼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 눈물이 맺힐 만큼 파란 하늘일 때 그 말을 사용해봐.”
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선우의 말이 중요한 내용인 것처럼 혼자 그 말을 되뇌고 있었다.
은호는 갑자기 생각난 듯 선우의 손에서 종이컵을 빼냈다.
“진짜 한 모금만 마실게.”
선우는 그런 은호를 살짝 흘겨보았다.
“어린애가 커피 마시면 머리 나빠진다.”
“걱정마. 내 머리는 아빠 닮아서 너무 좋잖아.”
어떤 협박을 해도 은호를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선우는 이미 알았다.
“맞지? 딱 한 모금이었어.”
은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선우에게 종이컵을 다시 건넸다. 그리고는 자신의 식은 코코아를 쭉 마셨다. 종이컵을 내려놓은 은호의 입 주위는 컵 모양대로 반쪽짜리 검은 동그란 자국이 찍혀 있었다.
“김은호, 어떻게 코코아를 마시면 그런 자국이 생기니?”
은호는 손등으로 입 주위를 눌렀다. 손등에 코코아 자국이 묻었다.
“김은호, 누가 손에 닦니? 티슈 여기 있어.”
선우의 잔소리가 시작되자 은호는 선우의 손등에 입을 가져다 댔다.
“아빠, 잔소리는 여기까지.”
은호의 뻔뻔한 대처에 선우는 다시 졌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에는 티슈에 닦자.”
선우의 말에 은호는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만 끄덕였다.
한참을 앉아서 그렇게 조용히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둘은 동시에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웃었다.
“아빠가 나 따라한거야.”
“아니거든. 네가 예전부터 나를 따라한거거든.”
선우는 아무 것도 아닌 것에 감동했고, 별일 아닌 것에 행복했다. 함께 있다는 것에, 함께 한다는 것에 이렇게 고마움을 느끼게 될 줄 선우는 몰랐다. 은호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에 매 순간 감사했다. 그래서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었고, 버텨낼 수 있었다. 선우에게 은호는 그런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