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계로 돌아왔다. 이곳은 지금 이 순간도 빛이 났고, 산들거렸고, 따사로웠다. 저쪽 세계처럼 변화무쌍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늘 이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이곳의 날씨는 한마디로 ‘아름다움’이었다. 그것 말고는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곳이었다.
내가 감탄하고 있는 그 순간 눈앞에 흰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도 눈인가?”
나는 저쪽 세계에서 하루 종일 본 눈 덕분인지 눈으로 보였다. 여기는 눈이 오지 않는다. 아니 사실 잘 모른다. 올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의 기억엔 아직 없다. 나는 내 눈앞에 흩날리는 것을 자세히 보았다. 꽃나무에서 떨어지는 꽃잎이었다.
“눈 대신인가?”
나는 살짝 기대했었다. 이번에도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는데 역시 섭섭하기는 했다. 나는 내가 이렇게 눈을 좋아할 줄 몰랐다. 나의 의외의 모습을 알게 될 때마다 나 스스로도 놀라웠다.
나는 바람 따라 흩날리는 꽃잎 사이를 걸었다. 이 예쁜 장면을 누려서 좋았고, 아무도 같이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아쉽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면 이 모든 게 더욱 반짝일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구한테 보여주고 싶은지는 확신 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런 마음이 유난히 들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꽃잎이 떨어지는 그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한참을 열심히 그렸다. 나의 뒤에서 나의 부모님이 물었다.
“거기는 어디니?”
나는 그때서야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자세히 보았다.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그러니까 저쪽 세계.
나는 살짝 당황했다. 나도 모르게 그곳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아, 오늘 다녀온 곳 이에요.”
나의 부모님은 내가 그린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셨다.
“왜 이렇게 하얗지?”
나는 나의 부모님이 눈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지 못했다.
“눈 이에요.”
나의 말에 나의 부모님은 생각에 잠기셨다. 그러다가 무언가 기억난 듯 활짝 웃으셨다.
“기억나는구나. 눈으로 참 재미있었던 것 같아. 정말 좋았어.”
눈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표정에서, 눈빛에서 다 설명이 되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런 기억이 없는지. 부모님과 나는 각자의 생각 속에 한참을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나의 부모님이 물었다.
“네가 다녀온 곳은 어땠니?”
나는 나의 그림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까의 모든 게 생생하게 떠올랐다.
“재밌어요. 여기랑 많이 달라서 신기해요. 그러나 여기처럼 매순간이 아름답지는 않아요.”
나의 말에 부모님은 살짝 미소를 지으셨다. 나는 대답하면서 나도 모르게 즐거워하며 들떠했던 것 같다. 그런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곳이 재미 있어서 다행이야. 뭐 힘든 건 없니?”
나는 묻고 싶었다. 왜 다른지, 그리고 내가 왜 가는지. 그러나 하지 않았다. 그냥 그래야 될 것 같았다.
“그냥, 그렇게 힘든 건 없어요. 여기랑 좀 다르니까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요.”
나도 내가 무얼 이해하기 어려워하는지 모른다. 다른 세계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 아님 그냥 은호인지 뭐라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다.
나의 부모님은 나의 말에 그냥 듣고만 계셨다. 겪어보지 못한 곳이라 부모님도 내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괜히 말한 것 같았다.
“그런데, 전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나의 갑작스런 질문에 나의 부모님은 진심으로 고민하셨다. 그렇게 하려고 물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냥,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 바꾸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는 정말 그런 능력이 없는 게 확실했다.
“음... 어릴 때는 그림을 잘 그리는지 몰랐어. 그랬다면 그림 그리게 많이 도와줬을 텐데. 네가 큰 후에야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잘 그린다는 것을 알았지”
이상하게 아쉬움이 남는 표정이 부모님의 얼굴에 가득했다. 그러다가 곧 나의 부모님의 얼굴은 다시 환해졌다.
“우리는 너의 그림이 너무 좋단다. 너무 아름다워서 그래서 좋아.”
나의 부모님은 나의 그림 속 세상보다 더 아름다운 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나의 그림을 좋다고 하신다. 실제보다 나의 그림이 못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음에도, 기분은 좋았다.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고 꽃이 흩날리는 곳을 나의 부모님과 걸었다. 부모님은 나의 양쪽으로 서서 나와 함께 나란히 걸었다. 갑자기 가슴 한구석에서 무언가 모를 감정들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내가 볼 수만 있다면 지금 나와 부모님의 모습은 나에게 최고의 그림이었을 것이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에 나는 살짝 목이 메었다.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목에 힘을 주고 침만 겨우 삼켰다.
‘이 감정은 뭐지?’
나는 예상치 못한 감정에 살짝 혼란스러웠다. 한참 만에 나는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 나의 부모님은 나의 이런 것들을 눈치 채지 못하셨다. 내 옆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주위의 모든 것에 진심으로 감동하셨다.
걷는 길 위에서 나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부모님과 함께하는 것은 나를 충분히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바닥에 내딛는 발걸음에 눈이 갔다. 나와 부모님은 똑같은 순서로 발을 내밀었다. 서로의 속도를 맞추며 그렇게 여유롭게 걸었다. 이 걸음에 나는 아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은호와 걸었던 눈길이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 위에 겹쳐지고 있었다. 은호는 아까 내가 있는 지도 모른 채 혼자 그 길을 걸었다. 은호 혼자 걷는 그 길은 어땠을까. 그 생각이 들자 은호가 아까 그 길 위에서 외로웠을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흰 눈길 위에 은호 혼자만의 발자국이 찍혔다. 누군가가 은호의 발자국 옆에 같이 걸었다면 은호는 덜 외로웠을 건데. 떠오른 은호의 모습에 마음이 살짝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