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있는 건 맞지? 실토하라구. 내 말 잘 들으면 한 몫 크게 챙길 거야. 우리가 상해에서 하려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나한테 잘만 얘기하면 크게 돈 벌 수 있어. 어차피 자넨 이제부터 의열단에서 일 할 수 없잖아?”
혁준이 입술이 움찔하다가 다시 입을 다문다.
“혹시 아나? 그 돈으로 마작을 계속할 수 있을지...”
하시모토가 음흉하게 덧붙인다. 그래도 혁준이 망설이자 손에 든 권총을 들어 혁준의 머리에 대고 말한다.
“아니면 다시 조선으로 가 내 취조를 받는가. 내가 유명한 고문 기술자인 건 알지?”
하시모토가 차갑게 내뱉자 혁준의 얼굴색이 바뀐다. 두려운 얼굴이다.
“내일 황포항에서 폭탄을 던질 겁니다.”
혁준이 실토한다.
“뭐야?”
하시모토의 눈이 커진다.
“내일 조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질 거라구요.”
하시모토가 비로소 알아듣고 표정이 바뀐다. 초조한 얼굴이다. 방을 빙빙 돈다.
“그랬군. 완전 대박인데? 그런데 시간이 별로 없어.”
하시모토가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며 뒤에서 보는 경찰들에게 소리친다.
“일단 여기 폭탄을 다 압수하라구! 난 내일 행사에 대비해야겠다.”
하시모토가 말을 마친 후 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무사히 서경의 중국식 여인숙으로 들어온 네 명은 기다리고 있던 종희와 둘러앉아 대책을 논의한다. 겨우 위기를 벗어난 긴장이 다 풀리지 않은 체 심각한 표정들이다.
“분명히 일본 경찰이었죠?”
서경이 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다들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박 동지가 일본 밀정이었다니!”
이한은 회한에 찬 음성이다.
“내일 거사할 거야?”
마자르가 묻자 침묵이 흐른다. 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금방 모르겠다.
“하지 말까요?”
이한이 침묵을 깬다. 어쨌든 행동을 하는 건 서경, 종희, 세미 세 여자이다. 세미가 당장 대답한다.
“해야죠. 박혁준 이 씨발 놈이 일본 경찰에 얘기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지만 원래 계획대로 밀고 나갈 거야. 그동안 준비한 게 얼마인데...”
“세미! 위험해!”
마자르는 세미가 너무 대범한 게 걱정이다. 하지만 세미는 그런 마자르를 흘낏 보고는 무시한다.
“합시다! 난 조선에서 이거 하려구 왔다구요.”
종희도 단호하게 주장한다.
“음. 언닌 그렇지. 아무것도 안 하고 갈 수는 없지.”
서경이 이해해준다.
“만약 박혁준이 얘기했다면 행사를 취소할지도 몰라요.”
이한이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그럼 현장에는 일단 다 준비해서 가고 상황에 대처하도록 해요.”
서경이 제안한다. 그러자 이한이 포기했다는 듯 말을 꺼낸다.
“할 수 없군요. 그럼 협두가 제안한 대로 자동차를 준비해서 최대한 행사장 가까이 대 놓겠어요. 총을 쏜 후 행사장 입구로 도망쳐 나와 자동차에 타세요.”
서경과 종희, 세미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런 준비를...”
“자동차 처음 타 보겠네요.”
세미가 팔을 앞으로 내밀며 크로스하자는 동작을 취한다.
“꼭 합시다!”
종희도 팔을 앞으로 내밀어 크로스한다.
“목숨 걸고 하자!”
서경도 크로스한다.
“꼭 살자!”
이한이 팔을 서로 크로스한 세 여자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는다.
다음날은 거사를 하기엔 딱 좋은 날씨이다. 황포항은 축제 분위기이다.
바다처럼 거대한 강가 항구엔 커다란 배들이 정박해 있고 그 한쪽으로는 중국의 작은 고깃배들이 빼곡히 차 있다.
연단이 세워진 앞 공터에는 욱일기를 흔드는 많은 사람들이 서 있다. 일본 옷도 보이고 중국 옷도 보이고 서양 옷을 입은 남녀 노소들이 모였다.
행사장 주변으로는 군복을 입은 많은 일본 군인들이 총칼을 들고 삼엄하게 지킨다. 어젯밤 하시모토의 정보로 군인들이 많이 증강되어 행사장으로 왔다.
연단 옆에는 군악대가 준비를 마치고 기다린다. 행사장 들어오는 입구에는 하시모토가 오가는 사람들을 주시하며 부하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한다.
입구로 황포항 어부 복장의 남자가 챙이 넓은 모자를 푹 눌러 쓴 체 들어선다. 서경이다. 품 넓은 윗옷이 조금 볼록 튀어 나왔는데 권총이 들어있다.
서경이 고개를 푹 숙인 체 긴장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살피며 들어서는데 뒤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오가는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던 하시모토가 자동차에 대고 소리친다.
“자동차 여기까지 못 들어온다. 돌아가!”
자동차가 멈추는데 운전석과 보조석에 이한과 김원봉이 앉았다. 둘 다 중국 남자 옷차림에 안경을 쓰고 수염을 달아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둘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원래 이 장소는 어제까지만 해도 자동차가 접근할 수 있었다. 오늘도 그런 예상을 하고 둘은 자동차를 최대한 행사장 가까이 댄 것이다.
거사를 마친 여자들이 도망쳐 나왔을 때 데리고 가기 위해서다. 그러나 하시모토는 어제 정보를 바탕으로 행사장 앞에 자동차를 댈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해 놓았다.
이한과 김원봉은 당황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거부하면 의심을 사게 된다. 둘은 자동차를뒤로 물린다.
그걸 서경이 본다. 난감해진다. 그때 옆으로 두 여자가 쓱 와 선다. 종희와 세미다.
종희는 중국 여자 옷차림이고 세미는 남자 양복 차림이다. 세미는 긴 머리를 중절모로 가렸다. 양복 주머니가 폭탄이 들어있어 볼록하다.
종희는 옆으로 길게 찢어진 치마 덕에 다리가 섹시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허벅지 위에 장총이 묶여 있는 게 보인다.
“준비한 차가 멀리 가 버렸네. 어떻게 하지?”
종희가 서경에게 속삭인다. 하지만 옆에 선 세미는 단호하다.
“어떡하긴 어떡해. 언니 그냥 해야 해!”
단단한 목소리다.
“경계가 어제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삼엄해졌어. 거사를 마친 후에 다들 알아서 도망가야지 할 수 없다. 여기까지 와서 멈출 수는 없어.”
서경이 다짐하듯 얘기한다. 말을 듣자마자 종희와 세미가 서경에게서 멀어져 원래 계획했던 각자의 위치로 빠르게 옮겨 간다.
서경은 배가 접안하는 항만이 있는 곳으로 간다. 권총을 쏴야 해서 목표물과의 거리가 가까워야 하기 때문이다.
곧 연단 옆 군악대에서 힘찬 행진곡 소리가 들리더니 항만에 접안한 커다란 일본 배 연결 계단으로 조선 총독이 내린다.
연단 앞의 사람들이 기를 흔들며 환호한다. 조선 총독은 배에서 내려서는 연결 다리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만면에 웃음을 짓는다.
뒤에는 두 사람쯤 부하들이 경호하며 따르고 연결 다리 아래에는 몇몇 일본 경찰들이 총칼을 찬 체 군중을 둘러보며 경계한다. 배 옆으로는 총독을 태울 일장기를 단 고급 자동차가 대기하고 있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중국 어부 옷을 입고 조선 총독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서 있는 서경의 심장 박동 소리가 올라간다. 쿵쾅쿵쾅.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되고 목울대로 침이 꿀꺽 넘어간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고 숨을 가쁘게 쉰다. 드디어 총을 들어 총부리를 당길 시간이다.
군악대의 행진곡 소리가 귓가를 지나지만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더 크다. 총독이 연결 계단을 내려 항만에 발을 딛는다. 서경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서경이 부들거리는 손에 단호하게 힘을 주더니 웟옷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조선 총독을 조준한다. 쿵쾅쿵쾅.
재빨리 손가락에 힘을 주어 총부리를 당긴다. 피용. 총알이 공기를 가르며 총독에게 날아간다. 슈슈슈슝.
순간 총독이 총알이 날아오는 소리를 들으며 몸을 숙이고 뒤에서 총독을 호위하고 내리던 경찰의 몸에 총알이 가 박힌다. 퍽.
‘으아악’ 경악하는 소리가 군중 사이에서 나오고 총을 대신 맞은 경찰이 바닥으로 쓰러진다. 서경은 놀라 몸이 얼어붙는다.
경찰들이 총독을 몸으로 막으며 총 쏜 범인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둘러보다 일부 경찰이 서경을 본다. 서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행사장 입구 쪽에서는 총소리를 들은 하시모토가 멀리에서 달려온다. ‘저 놈이닷’ 서경을 지목한 경찰들이 일어로 소리 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한다.
행사장에 있던 일본 경찰들이 거의 모두 서경 쪽으로 몸을 돌리며 달려온다. 총독은 몸으로 둘러싼 경찰들에 휩싸여 몸을 움츠린 체 대기해있던 자동차로 빠르게 이동한다.
서경은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한다. 순간 다시 ‘탕’ 총소리가 다소 떨어진 곳에서 들리더니 자동차 보닛을 맞춘다. 종희가 쏜 총알이다.
종희는 항만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서경이 쏜 총알이 실패하는 걸 보고는 찟어진 치마를 열어 다리에 묶인 장총을 꺼내 총을 쏜 거다.
하지만 거리가 좀 있어서인지 종희가 쏜 총알은 자동차 보닛을 맞추고 튀어 나간다. 서경을 향해 일제히 돌아서던 경찰들이 놀라 종희 쪽을 돌아본다.
조선 총독은 경찰들에 휩싸여 자동차 뒷좌석에 오르고 있다.
종희는 다시 두 번째 총알을 장정해 다시 총부리를 당긴다. 슈우우웅. 총알이 공기를 가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총알이 자동차 앞 유리에 가 박힌다. 와장창. 자동차 안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몸을 피하고 아무도 맞추지 못한다.
서경의 총격으로 경악한 군종은 두 번째 종희의 총격에 더욱 놀라 소리 지른다. 으아악.
서경을 쫓던 경찰은 종희를 발견하고는 우왕좌왕하더니 일부가 종희 쪽으로 몸을 돌린다. 종희는 장총을 옆으로 들더니 입구 쪽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찟어진 치마 옆자락이 섹시하게 흔들린다. 하시모토는 서경을 향해 계속 달린다.
서경은 권총을 이리저리 돌려 달려오는 일본 경찰을 위협하며 달아난다. 숨이 가빠 눈앞이 흔들거리는데 누군가 익숙하게 서경의 손을 낚아챈다. 이한이다.
서경과 비슷하게 황포강 어부 차림이다. 이한이 서경의 손을 끌고 달아나려는데 서경이 품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달려오는 일본 경찰을 향해 던진다.
‘사형 선고문 - 우리 의열단은 조선 민족의 이름으로 조선 총독을 처단한다. 조선 국토를 유린하고 조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일본 제국주의에 오늘 우리는 사형을 집행한다.’
의열단 사형 선고문이 달려오는 일본 경찰 발아래 너풀거리며 떨어진다. 경찰이 선언문을 잡아 보느라 잠시 멈춘다.
행사장 입구 쪽에서 하시모토가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오지만 사람들에 걸려 빠르게 다가오지는 못한다. 총독 근처의 경찰들이 서경과 이한을 쫓는다.
이한은 서경의 손을 잡고 황포강 작은 고깃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끈다. 고깃배들은 커다란 배들 뒤에 모여 있어 경찰들은 둘을 잠시 눈에서 놓친다.
이한과 서경이 고깃배들 속으로 뛰어들자마자 이한은 서경의 챙 넓은 어부 모자를 빼앗아 자기가 쓴다. 덕분에 서경처럼 보인다.
서경은 놀라 보지만 이한은 그대로 서경의 손을 이끌어 서로 묶여 있는 배들을 건너가며 도망간다. 커다란 배 뒤에서 일본 경찰들이 나타나고 호루라기를 불며 둘을 향해 고깃배 속으로 뛰어들어온다.
고깃배들 위에는 드문드문 어부들이 배에서 어망 손질을 하는 등 작업 중이었다가 놀라서 본다. 그중 하나의 배에 이한과 서경이 잠시 멈추어 선다.
“여기 이대로 있어요. 내가 경찰 주의를 돌릴 테니까.”
숨이 가빠 헉헉거리던 서경은 금새 알아들었다. 눈이 안타까워진다. 돌아서려는 이한의 팔을잡는다.
“저 대신 잡힐 수 있는데...”
이한이 서경의 눈을 들여다본다.
“임동지 대신 내가 잡히는 게 낫습니다. 임동지가 잡히면 난...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 같아요.”
서경이 울컥해지면 눈가가 촉촉해진다. 이한이 살짝 웃어주고는 서경의 손을 한번 힘주어 잡더니 손을 떼고는 머리에 쓴 모자를 누르면서 달려나간다.
배가 요란하게 흔들리며 소리가 나고 서경은 배 바닥에 늘어져 있던 어망을 잡고 고개를 숙여 얼른 손질하는 척한다.
뒤에서는 하시모토가 다른 일본 경찰들과 고깃배 사이를 뛰어넘어 서경 옆을 지나지만 서경을 보지 못하고 이한을 쫓아간다. 고깃배가 요란하게 흔들린다.
서경이 옆으로 지나가는 하시모토의 얼굴을 흘낏 보고 놀란다. 하시모토가 지나간 후 서경은 이한이 도망간 쪽을 바라본다. 가슴이 먹먹하고 아련해진다. 무사할 순 있을까.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종희가 찟어진 치마 옆자락을 섹시하게 휘날리며 행사장 입구 쪽으로 도망치는 걸 세미가 본다. 세미는 자동차가 다니는 항만 옆 도로에 서 있다.
세미는 총독을 태운 자동차가 지나갈 걸 예상하고 자리 잡았다. 조선 총독을 태운 자동차가 앞 유리가 깨진 체로 세미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부우웅.
세미가 앞주머니에 손을 넣어 숨겨둔 폭탄을 손으로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