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의도한 대로 화연은 분위기에 홀려, 내게 홀려 나를 덮칠 듯 손을 움직였다.
그것을 기껍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내가 진하게 웃을 때,
“!”
부스럭, 수풀을 헤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웬 작은 해방꾼이 화연의 팔을 건드려 화연의 시선을 앗아갔다.
여우?
의아했으나 그건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가증스럽게도 화연님의 팔에 제 얼굴을 비비는 여우 한 마리 덕에 묘한 분위기가 사라졌다는 것.
화연님은 저 가증스러운 여우가 귀여워 죽겠는지 소중하게도 쓰다듬으셨다.
“발토시, 발토시 낀거봐, 귀여워.”
“뜬금없이 여우라.”
그것도, 나는 한 번도 받은 적 없는 쓰다듬을 받는 여우.
“뜬금없지만 귀여워.”
“네, 뭐. 화연님이 그리 생각하신다면야.”
부러 삐진 티를 냈지만 화연은 그걸 가볍게 흘렸다.
하. 내가, 이 내가 사람도 아닌 고작 여우 따위에게 밀려?
어이없는 와중에 바론 예무의 기척이 잡혔다.
좋네.
척 봐도 이 가증스러운 여우의 주인 같은데.
갈굴 상대가 생긴 나는 반갑게 바론 예무를 기다렸다.
“바론?!”
그리고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바론 예무.
나와 화연을 보고 당황하는 걸 보니 일부러 여우를 보내 방해한 건 아닌 거 같지만 이미 갈구기로 결정한 것, 상관있으랴 싶었다.
“여긴 궁 밖인데.”
여유로이 일어나며 혼잣말인 척 읆즈린 나는 바론 예무가 우릴 쫓아왔다는 식으로 내뱉었다.
“자리 이탈이군. 징계는 각오하고 우릴 쫓아온 거겠지. 바론 예무.”
그에 바론 예무의 시선이 절로 내게 닿았다.
내 풀어진 앞섬도 잘 보고 있겠지.
당연, 저가 여기 오기 전까지 나와 화연님이 어떤 시간을 보내려 했는지도 유추할 것이다.
내 예상이 맞다는 듯 바론은 화연에게서 시선을 돌리곤 지극히 공적인 어투로 말했다.
“절대 천호 폐하와 제1단, 은가람 예단님을 따라온 것이 아닙니다. 섣부른 오해는 거두시기 바랍니다.”
정중히 고개 숙인 바론 예무는 여타 다른 감정은 없다는 걸 보여주듯 단호한 태도로 화연 옆에서 비비적거리는 여우를 불러 안았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그리곤 다시 한 번의 사죄. 퇴장.
흠, 생각보다 반응이 없는데?
아쉽군.
더 갈구려고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화연이 바론 예무를 잡으려는 듯 일어났다.
“아니, 잠-,”
그에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짐을 느꼈다.
화연, 아직 바론 예무를 안 만난 게 아니었나?
이미 한율처럼 바론 예무를 만나 조금이라도 애정을 준건가?
그래서 떠나려는 바론 예무를 잡으려는 건가?
천호라면 몰라도 화연과 바론예무는 아무런 접점이 없다 생각해 갈군 것인데.
아니, 정확히는 아직 제대로 갈구지도 않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 제 앞에서 제가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못되게 굴었다고 내쳐질까 겁먹은 나는 다급하게 반쯤 일어나있는 화연의 옷자락을 잡았다.
“오늘은 저와 있는다고 하셨잖아요. 어항에 넣었다고 벌써부터 밥을 안 주는 건 너무한데요?”
“...”
다행히 목소리가 떨리거나 하진 않았다.
표정도, 표정도 불안감 없이 자연스럽게 지어져 있겠지?
방금 한율 여화처럼 화연님을 독차지하려 아등바등하지 않겠다 말해놓고 불안함을 내비치는 건 지극히 모순이었다.
거짓말을 벌써, 이렇게 쉽게 들키긴 싫었기에 최선을 다해 두려움과 불안을 감춘 나는 화연이 나를 온전히 담고 나서야 안도했다.
*
화연은 내게 질문이 많았다.
주로 잊어버린 3년간의 기억에 대해서.
처음엔 어떻게 처음만나냐, 라는 질문이었다.
그땐 한율 여화와도 친했을 때였다.
“야, 그거 들었어?”
“뭐, 시덥잖은거면 입 다물고 저리 가.”
“성질하곤. 나 너보다 형이다?”
“시답잖네. 나가.”
계기는 사촌 형이 물어온 흥미로운 소문.
“아, 들어봐. 그 껍데기만 천호인 걔한테 요즘 한율이 푹 빠져있대.”
“뭐? 원래는 신경도 안썼 잖아. 갠 자기네 집에 천호가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거 아니었어?”
내 반응에 사촌 형은 더 신나해서 나불거렸다.
“그러니까! 더 신기하단 거지! 지금도 몇 명, 한율 미친 거 아닌가 구경하러 백호가 보름으로 놀러 갔어. 이미 갔다 온 애들은 천호 성격이 달라졌대! 그러니까 우리도 백호가 보름네에 놀러 가자.”
“마지막이 본심이네.”
“당연하지. 아무리 한율과 아는 사이지만 나는 초승이니 보름인 백호가 댁에 기별도 없이 찾아갈 수 없는 위치잖아.”
그렇게 가게 된 한율 네 기와집.
이미 한율은 몇 차례 시달렸는지 대충 반길 뿐이었다.
그리고 함께 시달렸는지, 달려졌다는 천호는 머리카락 한올 보이지 않았다.
“뭐야, 미쳐 보이지도 않고 달라졌다는 천호도 없네?”
“누가-! 하, 됐어. 이제 성내기도 힘들어. 화연은 내가 숨겼으니 화연을 보러온 거면 다시 돌아가.”
신경질적으로 축객령을 내리는 한율에 사촌 형이 끼어들었다.
“아니지, 아니지. 은가람은 내가 가기 전에 집에 못 가. 그리고 한율 너는 내 궁금증을 전부 해소해주기 전까진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해. 하하!”
“그렇대. 둘이서 실컷 이야기 나눠봐. 축객령 받은 나는 너네 집 구경이나 좀 할 테니까.”
“아,”
한율은 이야기 할 생각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내 사촌 형에 도와달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이미 늦었다.
그러게 누가 나가라 하랬나.
픽, 한율을 비웃어주곤 망설임 없이 방을 나왔다.
아, 근데 이제 어디 가지.
그냥 시끄러워도 방 안에 있을 걸 그랬다.라며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기다 순간 깨달았다.
“여기가 어디지?”
여기에 한, 두 번 와본 건 아니지만 올 때마다 가는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는 처음 와본다는 것.
곤란함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흩트린 나는 대충 걸으면 아는 곳이 나오겠지, 싶어 발 닿는 대로 걸었다.
그리고 한 나무를 스쳐 지나갈 때,
“!”
화연이 내게로 왔다.
정확히는 나무 위에서 있던 화연이 발을 헛디뎌 우연히, 아주 우연히 거길 지나가던 내 위로 떨어진 것이다.
다행이 둘 다 다쳤다 할 정도의 상처나 부상은 없었지만 아픔은 있었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떨어진 화연 때문에 엉덩방아를 찍게 된 나는 신경질적으로 그 화연을 노려봤다.
그땐, 화연이 천호인 줄 알았으니까.
“너 뭐-,”
그러나 그마저도 곧 막혔다.
놀란 듯 크게 뜨여있는 붉은 눈, 생기 넘치는 얼굴, 반짝이는 은발.
천호이나 천호가 아니다.
다른 표정, 다른 분위기.
순간 숨을 헉 들이키며 말을 멈췄다.
그에 화연이 내뱉은 한마디.
“천, 천사...”
천사?
그런 단어가 있었나, 고민하는데 화연이 갑자기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천사다. 천사가 내려왔어! 미친, 대박!”
그에 내가 한 대답은 뭐였더라, 그래.
“뭔 헛소리야. 내려왔다는 걸로 치면 네가 내려온 거지.”
“와, 미친! 미남이! 천사가! 나보고 천사라 해줬어!”
“아니, 내가 언제! 난 내려온 건 네가 내려왔다고-,”
“대박! 감격! 미친!”
“아, 말 안 통해.”
저번에 만났을 때와 성격이 달라진 것은 인정 하나 말이 안 통하는 건 똑같았다.
그래, 분명 처음엔 질색이었는데.
회상을 마친 나는 한율과의 옛 사이, 내 옛날 성격을 적당히 숨기며 약간의 미화를 가미해 화연에게 말해줬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들.
“여기서 너 말고도 나 친구들 많았어?”
“네, 다시 화연이 사라지고 천호가 되돌아오면서 다들 질려 하며 떠나긴 했지만 그땐 많았어요.”
“억, 잠깐만. 그럼 결론은 나 지금 친구 없네?”
약간 충격받은 듯한 화연에 나는 살풋 웃으며 말했다.
“상관없지 않아요? 제가 친구이자 연인이 되면 되니까.”
“오, 오... 너, 들어오는 게 굉장히 자연스럽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래, 나의 친구이자 연인이 되어 줘.라고 답하지는 않는 화연에 서운함이 밀려왔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시간은 많으니까.
“아, 그리고 원래 천호가 되면 친구란 건 사라지게 돼 있어요.”
“역시 절대 권좌의 숙명이네.”
“그런 거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 화연은 다시 내게 질문들을 던졌다.
그에 나는 답해주고 도란도란, 옛 추억을 꺼내들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간혹 지금 현재에 대한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가령,
“이렇게 놀아도 돼?”
“네?”
“아니, 너 예단이라며 이렇게 놀아도 돼?”
이렇게 곤란한 질문이라던가.
나는 순간 당황해 침묵하다 이내 뻔뻔히 나가기로 했다.
“예단이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저 한율과 똑같은 보름가의 여화잖아요.”
그에 화연님이 짜게 식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흠, 어쩔 수 없네.
나는 부러 머뭇거리는 척, 순수한 마음으로 곁에 있고 싶어서 그런 건데 거절당해서 서운해하는 척하며 말했다.
“제가 옆에 있는 게 싫으세요...? 그럼 화연님 옆 말고, 일하러 갈까요...?”
당연하게도 이런 감정 섞인 미인계는 화연에게 아주 잘 먹혔다.
“아니, 내 옆에 있어.”
바로 태세를 전환하는 화연에 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밤.
반딧불이가 폭포와 호수를 장식할 시간이었다.
“예쁘다.”
감성에 젖은 화연의 음성이 울렸다.
한 번 더 유혹하기 좋은 시간, 좋은 감성.
나는 망설이지 않고 화연과 눈을 맞추며 요망하게 웃었다.
“저는요? 닿고 싶을 만큼, 이 풍경만큼 아름답게 잘생기지 않았나요?”
그에 습관적인 듯, 혹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잘생겼다 답하는 화연.
나는 그런 화연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화연 또 한 번 홀린 듯 가만히 있었다.
밤의 폭포, 호수, 그것을 장식하는 반딧불이들.
여기서 화연에게 내 첫 입맞춤을 선물한다니.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까의 화연도 이런 긴장감이었을까.
조금은 다르겠지만 같은 느낌이었겠지.
그리고 닿으려는 순간.
“먀옹-”
이젠 고양이었다.
나무 위에서 정확히 나와 화연 사이에 떨어진 고양이.
“하,”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치고 있자니 이 상황이 퍽 웃겼는지 잠시 침묵하던 화연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전염된 걸까, 이내 나 또한 이 상황이 웃겨 웃음을 터트렸다.
한바탕 유쾌하게 웃은 화연과 나.
나는 자연스레 화연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듯 기댔다.
물론 내 체격에 완전히 힘을 빼고 기대면 화연이 힘들어하실 테니 적당히 힘을 풀어서.
계획했던 유혹들 중 어느 것 하나 끝까지 성공한 건 없지만 그 결과가 이런 거라면 이 또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