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아닌 냉혈동물인 오빠가 잠들어있는 해숙이 뺨을 쓰다듬고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곤히 잠든 자신에게 하던 그 동작이었다. 그럴 땐 은희는 잠에서 깨곤 했고 오빠를 쳐다 보았다. 그때만큼은 오빠는 자상한 눈이었다. 아마 그럴 그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신랑이 팔을 잡아 당겼다. 오빠가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이유로 숨어야 되는지 모르지만 숨었다.
해숙은 나가는 오빠의 뒷모습을 보고 난 뒤에야 눈물을 주르르 흘릴 기회를 얻었다. 깨어나지 않았던 게 아니고 깨어나기 싫었던 것이었다. 뒤죽박죽이 된 현실이 싫었다. 신랑이 죄를 받아야 하는데 무슨 이유로 자신이 이런 벌을 받고 수모를 당하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이 매몰찬 오빠가 이제 와서 무슨 이유로 이런 말을 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이고 이놈! 오빠가 미안해. 골프장에서 내가 먼저 아는 척을 했어야 했는데.. 그때 알았으면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 모두다 속 좁은 내 잘못이다. 어휴! 이 녀석 어떻게! 미안해. 오빠가 잘못했어. 걱정 말고 얼른 일어나! 오빠가 다 해결해 줄게. 아이고! 이 놈!”
바보! 등신! 머저리! 실컷 울고 싶었다
해숙은 그 말은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 자신에게 매정하게 굴었던 그때를 사과 받고 싶었다. 펑펑 울고 싶었는데…. 울 수가 없었다. 또 깨어나지 않은 척 해야만 했다.
그런데 살짝 떤 눈에 들어온 문 밖의 두 사람의 어두운 표정과 오빠의 의미 모를 말! 분명히 목이 메여 있었다. 직감적으로 불길했다. 모두들 너무 어둡고 무거운 표정이고 하는 말도 이상했다.
출입문 틈새로 보이는 근심으로 가득한 두 사람의 어두운 표정과 무거운 대화는 누구 봐도 불길한 예감을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신랑의 폭력과 거친 말투로 인한 이런 대형 불상사는 한번쯤은 필히 맞닥뜨리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방금 왔다간 오빠의 말과 지금 밖의 어둡게 굳은 표정은 단 한번도 예상하지 못했다. 해숙이 벌써 은희 앞에 서 있다.
“무슨 일이야?”
은희가 대답은 하지 않고 와락 껴안고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고 그렇게 해숙도 며칠 내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 후로 인생과 삶에 대한 허무함을 느끼며 그 속에서 잠시 머물고 싶었지만 해숙은 곧 신랑과 인철의 죽음의 원인 제공자가 돼 떠도는 소문과 차가운 시선들을 감당하지 못해 휴직을 해야만 했다.
그 소문들 중심에는 사랑 없이 재산만 보고 결혼한 한 여자가 사랑을 갈망하다가 우연찮게 선배를 만났다. 그 선배는 후배를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걸로 위장한 채 짧은 순간의 성적인 욕구를 감추고 위로를 하다가 그 신랑과 함께 남들이 보기에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여기서 성적인 욕구는 아무도 모르고 해숙만 안다. 사랑을 갈망한 불쌍한 여자가 지금 인과응보의 처벌을 받고 있다. 어디 삼류 소설에나 나올 만한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있었고 그 가십거리들은 고스란히 해숙의 귀로 들어 갔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떠도는 이야기들을 해숙은 냉철히 돌이켜 봤다. 신랑과의 인연에 대한 떠도는 말에 틀렸다고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때 당시로 돌아가본다. 이십여 년에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지지 않은 여자가 과연 몇 명이었을까? 명문대학 출신에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남자가 나타났는데 과연 싫어할 여자가 몇 명이나 될까? 그 졸업장이 위조된 졸업장인 걸 알고 난 뒤에 그런 사정으로 이혼을 했다고 하면 해숙은 또 어떤 인간으로 내비쳐졌을까? 뜨거웠다가 바로 식어 헤어진 사랑과 자신처럼 결혼할 무렵 중매로 결혼해서 사랑을 한 사랑과 어떤 차이를 두고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하는가?
결혼 전에 뜨거운 사랑을 한 사람과 헤어지고 다른 사람과 결혼해 잘 살고 있는 사람과 분명히 다르지 않는가? 은희 오빠는 자신을 거들떠봐주지도 않는 언니를 짝사랑하면 괜찮고 자신은 은희 오빠를 짝사랑하면 왜 안 되었는가? 그거 큰 죄인가?
신랑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신랑이 자신의 숨겨둔 비밀에 대한 압박에 못 이겨 가끔씩 저지른 거친 폭력에 어떻게 참고 견디며 살았겠는가? 신랑의 자아비관은 곧 해숙의 비관이기도 했다. 해숙은 자신의 신중하지 못한 선택을 결혼 초에는 많이 후회를 했다. 그러나 신랑은 대화만 잘 통하지 않을 뿐이지 누구보다 건실하고 구두쇠, 노랑이라는 별명만큼 알뜰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진실은 알려고 하지 않았고 해숙도 해명할 필요도 없었지만 기력도 없었다. 사람들이 단순히 한번 도둑놈은 영원한 도둑놈이라고 자기들 뇌리에 저장하듯이 신랑은 영원히, 죽음을 맞이하고도, 세상을 떠나고도 문상객들에게 무식한 놈, 졸부라는 비아냥을 들었다는 말이 떠돌고, 그 말은 그대로 몇 바퀴를 돌고는 대충 가려져 귀로 들어왔다. 아무리 정제된 말이었지만 핵심적은 내용은 똑 같았다. 무식한 놈. 졸부. 입 조심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웠고 그럴수록 어울리는 게 싫어져 거의 은둔 생활을 하다가 두터운 등기를 보고는 정신을 차렸다. 석유화학저장탱크에서 보낸 임대료를 내지 않으면 제품을 압류하거나 자체적으로 경매를 진행한다는 내용이었지만 해숙은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다.
평생 동안 우연찮게도 마주치기 싫은 놈을 외 나무 다리에서 딱 마주친 기분이었다. 통지서에 있는 금액을 보고는 뒤로 물러 설 수도, 고개를 돌려 외면할 수도 없는 처참한 미래가 닥친다는 걸 암산으로도 계산이 되었다.
또 얼른 떠오른 말이 ‘오빠가 다 해결해 줄게. 아이고! 이 놈!’
절박했다. 자존심? 웃기는 소리였다. 허겁지겁 휴대폰을 들었다.
그때 수리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형님! 어때요?”
“그래! 지금 팔면 되겠어. 이번에 전량 다 팔지. 내가 여기저기 구입할 회사 다 잡아났어”
석유화학제품도 간혹 주식과 아주 흡사할 때가 있다. 가만히 놔두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할 수 있다. 특히 해숙 신랑의 제품은 그런 변동이 많은 제품이었다. 그런데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수리가 이 제품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건 이 제품과 관련된 일을 했었기 때문에 이 제품과 관련 된 무역 회사의 담당자나 중소 회사의 사장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수리는 콧방귀를 한번 친다. 그리고는 지난 세월을 되뇌며 씁쓸히 웃으며 자리서 일어선다.
‘어설픈 정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 정작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땐 한 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압박했다. 그런데 내가 누굴 걱정해? 돈 많은 미망인을 연민으로 도와줘? 혈세로 연금 꼬박꼬박 받아 쳐먹는 공무원을? 내가 미친 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