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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려줘."
" 응?"
" 안보이잖아. 이제 내려주라고 걸어갈 수 있어."
그녀의 말에 피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볍게 무시해 버린다.
" 내 말 안 들려? 고맙지만 이제 내려달라고."
" 안돼 그 다리론 걷기 힘들어. 미안해서라면 괜찮으니까 그냥 있어."
" 너한테 미안해서가 아니야. 리안이 걱정할 만한 일 하기 싫어."
" 나한테 안겨 나오는 거 보면서 이미 걱정하지 않았을까? 그럼 처음부터 안기지 말았어야지."
" 내가 잘 못 걷고 아파하는 거 보면 분명 사람이 있건 없건 옷에 피가 묻어도 안을 사람인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가만있어. 차라리 속 뒤집는 게 나아."
" 그럼 끝까지 뒤집지 왜."
" 말했잖아. 이제 안 보이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 혼자 걸어간다고."
그녀의 고집에 피터는 어쩔 수 없이 조심스레 수현을 내려놓는다.
" 앗."
" 그것 봐 살짝만 딛어도 이렇게 아프잖아!"
" 괜찮아."
앞서가던 지 대표가 피터의 언성에 뒤를 돌아보고 수현에게로 달려온다.
" 왜 내렸어?"
" 몰라 지가 데려와 난 속 터져 더 못 있겠으니까."
자신의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한 수현에게 화가 치밀어 오른 그가 그녀를 두고 앞에 있는 차 안으로 빠르게 걸어간다.
" 무슨 일이야? 피터 왜 저래요?"
" 대표님 죄송하지만, 어깨 좀 빌릴 수 있을까요"
" 아~ 어서 잡아요. 차 바로 앞에 있으니까 조금만 힘내고."
" 말 편하게 하세요. (싱긋)"
" 몰랐어요? 나 슬금슬금 말 놓고 있었는데."
" 후후후 대놓고 놓으셔도 돼요."
" 그럴까? 어서 가자. 나한테 기대."
차 안에서 내려 황급히 수현에게로 달려가는 민이. 발목에 오는 통증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절뚝거리는 수현의 모습을 차 안에서 바라보던 안젤라가 피터에게 잔소리를 시작한다.
" 해줄 거면 끝까지 매너 있게 하던지 수현 씨 얼굴 봐 엄청 아파하잖아! 어째 옷 신경 안 쓰고 귀찮은 일한다 했어."
" 시끄러워."
그런 안젤라의 말에도 수현이 있는 곳으로 피터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 정말 네 변덕을 누가 말려."
더는 그녀의 잔소리가 듣기 싫은 피터가 헤드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아 버린다.
' 짜증 나. 작은 몸으로 왜 저렇게 단단해. 생각은 뭐 그리 많고!'
피터의 속을 뒤집어 놓은 그녀가 차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낯익은 향이 그의 코끝을 간지럽힌다. 아까 품에 안았던 베이비파우더. 수현의 향기다. 눈을 감고는 있지만, 피터의 심장이 빠르게 반응한다. 뭐라고 하는 것일까. 한국말과 영어를 섞으며 사람들과 대화하는 그녀. 헤드폰을 틀지 않은 그가 가만히 수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 하루도 안 지났는데 왜 이래. 나 진짜 여자면 환장하는 놈인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와 길지 않은 만남에 이렇듯 빠져든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 피터. 단 한 번도 이런 경우가 없던 터라 앞으로 한달 남은 일정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제발 더는 그녀에게 마음이 쓰이지 않도록 리안의 말대로 자신을 향해 접근금지 명령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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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하하 이렇게 사돈이 된다니 더 바랄게 없습니다."
" 사돈이라뇨. 가족이지요. 가족 하하하."
정 의원댁 저녁 초대를 받은 자리에 권 회장과 정 의원의 웃음소리로 식탁이 가득 메워진다. 물론 그 외 사람들의 얼굴은 지금 당장 초상이 났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표정을 하고 있었다.
" 크크크"
" 왜 그래?"
" 어느 하나 평범하지 않은 관계들을 묶어놓고 가족이라니 웃기잖아요. 크크크"
" 죄송합니다. 이 사람이 술이 과했던 거 같군요."
민 여사의 말에 순간 사람들의 얼굴이 경직된다. 특히나 권 회장의 얼굴은 울그락 불그락 변해있었다.
" 잠시 바람 좀 쐬고 오도록 하죠."
그런 그녀를 권 회장이 밖으로 이끌고 나간다.
' 휙'
밖으로 나온 권 회장이 그녀를 바닥에 세차게 밀어버린다. 힘없이 잔디에 넘어진 그녀를 걱정하기는커녕 쏘아보는 권 회장.
" 정말 정신병원에라도 처박아야 정신을 차리려나?"
" 크크크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 적당히 해. 지금 생활도 못 누리고 춥고 외롭게 죽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 이미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 아니었나?"
" 이보다 더 비참한 삶이 있다는 걸 알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 술 깨고 정신 차리고 들어와. 더 흉한 모습 보일 땐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
그런 그녀를 권 회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려둔 채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얼마 후 민영이 바깥으로 나와 민 여사를 일으켜 세웠다.
" 왜 이기지도 못할 술을 그렇게 마셔요."
" 후후후 살다 보니 너에게 이렇게 도움을 받는구나. 아앗."
" 발목 다치셨어요?"
" 괜찮으니 놓으렴."
민영의 부축을 밀어낸 민 여사가 옷매무시를 가다듬는다.
" 계획은 세워둔 거니?"
" 회사에 타격을 안 주는 방법으론 아직 없습니다."
" 이런 애송이를 믿고 칼을 뽑아 들다니 나도 참 어리석구나."
" ?"
" 권 회장을 밀어내는데 회사의 타격만으로 될 것 같아?"
" 그럼..........."
" 회사가 분해될 각오로 덤벼도 시원찮을 판에. 쯧쯧쯧"
" 하지만 그렇게 되면 분명 민 여사님한테도 좋을 게 없을 텐데요."
" 저 인간 손에 쥐여주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부숴버리곘어."
' 당신의 모든 걸 산산조각 내주지. 그렇게 해도 내 성엔 안 찰 테지만........'
민여사의 눈에서 서슬 퍼런 독기마저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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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휴 어쩌다 이렇게......."
" 많이 심해?"
" 찢긴 상처보다 발목 아킬레스건이 완전히 파열됐어. 수술 잡자."
지 대표는 지인이 있는 병원으로 수현을 데려와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다.
" 이 정도까지 어떻게 사람이 참아 소리 한번 안지르고."
" 질렀는데요. 작지만 후후"
" 웃음이 나온다 웃음이. 그것보다 수술하면 괜찮아지긴 한다지만 발목에 흉터가......"
" 괜찮아요. 잘 보이는 곳도 아닌데요. 뭘"
그녀 걱정에 속이 타들어 가고 있을 리안에게 수현을 입원시키고 전화를 건다.
" 도착했니? 피터랑 안젤라는?"
" 네 모셔다드리고 방금 현장 도착했어요."
" 고생했다. 리안 아직 촬영 중이지?"
" 네. 누나는 괜찮아요?"
" 인대파열이라 수술해야 한데."
" 예? 근데 어떻게 소리 한번 안 지르고......"
" 내 말이 그 말이다. 여하튼 촬영 끝나고 리안한테 전화하라 그래. 참 율이는 어때?"
" 쟤 정말 리안 형 아들 아니에요?"
" 그게 무슨 말이야?"
" 감독님이며 여기 계신 분들 율이한테 혀를 내둘러요. 아직 어린애가 어쩜 저렇게 연기해요?"
" 후후후 누가 뽑은 아인데."
수현이 떠난 빈자리에도 율이는 나이답지 않게 엄청난 집중력으로 열연을 펼치고 있었다. 타고났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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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깔끔하고~ 음 향기도 좋아. 리안다운 집이야."
" 변태같이 그러지 말고 좀 앉아."
" 싫어 붸~에 그리고 여기가 피터 집이야? 꼭 자기 집같이 말하네."
" 한동안 내가 있을 곳이니 내 집이지."
" 그럼 내 집이기도......."
" 넌 호텔에서 지내."
" 왜에!!"
" 남자들만 사는 곳에 네가 있는다는게 더 왜~에 아니야?"
" 무슨 할리우드 사는 사람답지 않은 마인드야. 그리고 나는 레즈...."
" 알아 아는데 그건 네 취향이고 우리 취향은 여자라고."
" 오호~ 내가 여자로 보이기는 한가 봐?"
" 그럼 여동생이 여자지 남자냐!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호텔 잡아."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그들이지만 어려서부터 봐왔기에 이미 피터와 안젤라는 가족이었다.
" 아! 잠깐 지한테 전화해봐야겠다."
" !"
" 수현 씨 괜찮으려나."
안젤라는 불현듯 수현의 안부가 걱정돼 지 대표에게 전화를 건다.
" 응 지 수현 씨는 어때?"
" 수술해야 할 거 같아. 인대파열"
" 정말? 너무 아팠겠다. 어떻게......."
안젤라의 통화 소리에 피터가 고개를 돌려 귀를 기울인다.
" 수현 씨 엄마구나. 그렇게 아픈 것도 참고 엄마는 정말 대단해. 그럼 수술 잘되길 빈다고 전해줘. 응 끊어."
' 후~'
안젤라의 한숨 소리에 피터가 입을 연다.
" 왜?"
" 수현 씨 인대 파열. 수술한 데."
' 흥 그렇게 아프면서도 나한테 기대기는 싫다.'
" 불쌍해."
" 뭐가 불쌍해. 수술하면 낫는데."
" 모르는 소리. 여자한테 흉터가 남는다는 건 다른 의미라고. 몸은 치료하면 낫는다지만."
" 넌 안 돼지만 갠 이뻐서 괜찮아."
무심하게 던지는 그의 말에 안젤라가 눈을 흘긴다.
" 이번엔 수현 씨인가 보지?"
" ................"
" 하지만 고생 좀 할걸. 내가 보기엔 리안과 그녀 뭔가 심상치 않아. 내 눈치는 정확하다고."
아직 리안과 수현의 사이를 알지 못하는 그녀는 피터의 신경을 긁으며 소심한 복수를 한다.
' 저 입을 그냥 콱! 빵으로 틀어막을까?'
그녀 자신이 말했듯 안젤라는 촉이 좋았다. 지금 피터의 속을 잘도 뒤집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