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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고생하셨어요."
오늘의 다사다난했던 촬영이 일부 끝이 났다. 애란은 아픈 발목을 부여잡고 자신의 분량을 마쳤고 이제야 병원에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 애란 씨 다시 봤어. 많이 아팠을 텐데."
리안이 애란에게 불같이 화를 냈던 일을 알 길 없는 노감독은 그저 애란이 프로답게 자신의 촬영을 마무리했다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애란도 위로와 격려 그리고 칭찬을 받은 상황에 일부러 말할 생각 따윈 없는 듯 했다.
" 율아 고생했어."
" 네......."
모든 스태프 들은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열연을 펼친 율이에게 또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촬영을 마친 율이의 어깨는 한없이 처져있었다. 주연은 그런 율이 안쓰러울 뿐이다.
" 엄마 걱정되는구나?"
" 수민(주연의 극 중 배역)엄마....."
주연의 토닥임에 율이는 지금껏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그 옆을 지키던 리안의 표정 또한 좋지만은 않았다.
" 율아 이제 민이 삼촌이 엄마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 거야. 어서 가자."
" 수현 씨 어떻대요? 겉으로 봐도 크게 다친 거 같던데."
" 인대파열로 수술해야 한데요."
" 어머 수술까지 할 정도면........."
마음이 초조한 은석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주연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못한다.
" 그럼 전 율이 데려다 줘야 해서요. 수고하셨습니다."
" 아 네 그럼 이따 봬요. 수현 씨한테 힘내시라고 안부 전해주세요."
수현의 일로 어깨가 축 처진 두 남자 뒤로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애란이 보인다. 죽상을 하고 걷는 애란을 본 주연이 빠르게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 다리 어때?"
" 괜찮겠어요? 딱 봐도 크게 다쳤잖아요."
"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 뭐예요!"
" 수현 씨 수술해야 한다더라. 인대파열 돼서."
" 그....... 그러게 뭐하러 달려들어 달려들긴 누가 자기 애 잡아먹는데."
" 애초에 그딴 말도 안 되는 하이힐을 신은 것 자체가 문제였지. 수현 씨 아니었으면 저 작은 아이가 네 몸뚱이랑 그 흉기 같은 하이힐에 온전했겠니?."
" 모...... 몸둥이?? 너 말 다 했어?"
" 아니 아직. 네가 사람이면 수현 씨한테 전화 한 통이라도 해. 니 싸가지에 찾아가진 않을 테고. 그럼 치료 잘 받아."
주연은 병 주고 약도 주곤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난다. 애란은 다친 발목으로 길길이 뛰지 못하는 분함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는 주연이다.
" 아이고~ 어째 멀쩡하다 했다."
노감독은 그런 애란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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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아 병원으로 바로 가자. 출발해."
" 저 형."
" ?"
" 대표님이 전화 먼저 하시래요."
지 대표가 할 말이 예상되는 리안은 고민에 빠진다. 그리곤 이내 민의 말을 무시하고 병원으로 향하기로 마음먹는다.
" 그냥 출발해."
" 하지만....... (우물쭈물)"
" 민아 형이 운전할까?"
" 아니에요."
난처해하는 민이를 보며 리안은 하는 수없이 휴대폰을 집어 든다.
" 나야. 수현이는?"
" 지금 진통제 맞고 잠들었어."
" 병원으로 곧장 갈 거야."
" 리안 네가 병원으로 오면 분명 SNS부터 난리 날 거야. 그렇게 되면 기자들 아는 거 시간문제고......."
" 그래도 가야 돼. 혼자 수술받게 할 수 없어."
" 수술 어차피 내일이고 수현 씨가 친구한테 연락해서 온댔어. 나도 있고."
" 그 친구 율이도 봐줘야 하는데 애 데리고 수술받을 때 어떻게 같이 있어. 내가 가야 해."
" 수현 씨가 원한거야 은석아."
끝까지 굽히지 않는 그의 뜻에 지 대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 네 속이 어떤지 알아. 힘들어하는데 혼자 둘 수밖에 없으니 오죽하겠어. 하지만 은석아 이건 정말 수현 씨와 율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근데 이런 식으로 망칠 거야?"
지 대표의 말에 은석은 한없이 작아진다. 이렇게 다치도록 지키지 못한 자신도 옆에 있어 주지도 못하는 처지도 미치도록 싫다. 지금의 성공이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으리라곤 은석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지 대표의 말대로 당장의 슬픔에 일을 그르친다면 더욱더 그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는 걸 은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율이만 먼저 병원으로 보낼게. 나 대신 잘 챙겨줘......."
" 걱정하지 마. 넌 다시 촬영 있지?"
" 어. 집에 가서 씻고 준비해 다시 오려고. 민이는 그냥 퇴근시킬 거야. 이리저리 운전하느라 오늘 힘들었을 테니. 수현이 일어나면 전화 줘."
은석이 전화를 끊고 은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역시나 수현은 놀랄 은아를 생각해 에둘러 얘기했던 터라 자세한 내용을 들은 은아는 당장이라도 애란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은석의 정신을 빼놓고 있다. 그녀를 진정시키고 전화를 끊은 리안이 조용히 잠든 율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 많이 놀랐을 텐데 대견해요."
" 그래 나보다 어른스럽더라 후후"
" 그러게요. 크크크"
" 민아 요즘 죽고 싶은 게로구나 형한테 깐족거리는 거보니."
" 사실이에요. 이성 놓고 형 눈 돌아간 거 봤을 때 어휴 어른 아니었다고요. (절레절레)"
민이의 말에 조금 전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지만 역시나 몸서리쳐지는 공포에 은석은 고개를 내두른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 민아 병원 들렀다 집에 나 내려주고 퇴근해."
" 아닙니다 형 전 괜찮....."
" 내가 안 괜찮아. 그렇게 해. 형차 몰고 가면 되니까. 어차피 의상도 챙길 것 없어 스타일리스트들도 아까 다 보냈는데 뭐하러 있어."
" 전 정말 괜찮아요. 형"
" 요 며칠 밤샘촬영에 집에도 못 들어갔잖아. 오늘 온종일 촬영이라 있어봤자 야. 그렇게 미안하면 내일 일찍 오던가."
" 네."
" 차 살살 몰고 율이 자니까."
" 물론이죠."
움직이는 차 안. 한 손으로 율이를 단단히 붙잡고 은석이 두 눈을 감는다.
' 미안해 수현아.'
은석의 감은 두 눈이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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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무슨 일이야?!"
흥분한 은아가 급히 병원으로 달려왔다.
" 오셨어요. 진통제 맞고 잠든 지 좀 돼서 일어날 때 됐어요."
" 누구....... 아 혹시 지 대표님? 안녕하세요. 수현이 친구 이은아예요."
" 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많이 놀라셨죠?"
" 네. 운동하는 애도 아닌데 갑자기 인대파열로 수술한다니 놀랄 수 밖에요."
" 죄송합니다. 안전에 유의 해야 했는데."
" 이게 어디 대표님 잘못인가요. 송애란씨는 안 왔어요?"
" 네. 아직 이요. 곧 연락 오겠죠."
" 제 생각엔 그럴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 그런 생각 있는 사람이면 애초에 일이 이 지경까지 되게 하지 않았겠죠. 따로 만나볼 순 없는 거죠?"
" 아마 단순 사고로 보험 처리하지 않을까 싶어요."
" 마음 같아선 언론이고 SNS고 할 수 있는 덴 다 떠벌리고 싶지만 그럼 율이와 은석이에게 피해가 갈 테니......"
" 그렇죠. 아무래도 영화 개봉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따로 송애란 측에 푸쉬 넣을 거니 너무 걱정 마세요."
" 누워서 절받는 방법밖에 없다니 속이 우글거리네요."
" 전혀요. 전 절대 누워서 절받는 스타일 아니에요."
" ?"
" 일단 지켜보자고요. 그런데도 싹수가 없으면 뭐 할 수 없죠. 영화 개봉 끝나고 정리 좀 되면 은아 씨 말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전 당하고는 못살죠. 후후후"
지 대표의 말에 그녀의 머리가 번뜩인다. 은아가 무언가 얘기를 하니 지 대표가 미소를 띠며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하고 못사는 건 은아 역시 마찮가지다. 그리고 이 둘은 치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