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을 지하실에 가두고 거실로 돌아온 익호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저 한 번 떠보기 위해 윤 실장이 알아봤다고 했는데, 그 미끼를 바로 물게될 줄은 몰랐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아니기를 바랐다.
자신의 예감이 빗나갔다면, 그 애의 표정이 굳는 걸 보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인간이란 종족을 믿지 말았어야 하는데, 한 순간 방심한 대가였다. 워낙 입안의 혀처럼 굴던 아이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마음을 어느 정도 놓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감히 제까짓 게 나를 이용해서 자기 실속을 챙기려고 해?
당장이라도 그 애의 가느다란 목을 꺾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죽이지 않은 건 아직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사흘이 지날 때까지는 살려둬야 한다. 서진우가 탈출한 지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는 일은 아무리 감이 좋은 익호라고 해도 쉽지 않았으므로.
소파에 앉아 분을 삭이고 있는데 윤 실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전무님, 말씀하신대로 처리했습니다.
“그래, 몇 시 뉴스에 나오나?”
- 뉴스 전문채널에서는 속보로 나갈 예정이고, 지상파에서는 자정에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럼 됐고, 윤 실장은 계속 병원에 있으면서 CCTV랑 목격자 진술 자세히 확보하도록.”
- 정 과장은 어떻게 하라고 할까요?
“그놈 집에는 가 봤나?”
- 네, 전무님, 아무 흔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놈이 어디있을지 계속 찾아보라고 해.”
-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익호는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고 홈 바에 갔다. 사흘 동안 술은 마시지 말라고 했지만 지금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그대로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익호는 위스키와 꼬냑이 늘어서 있는 진열장에서 루이 13세를 꺼내 잔에 따랐다. 그리고 맛을 음미할 틈도 없이 벌컥벌컥 목으로 넘겼다. 두 잔을 연거푸 마시자 머리가 아찔했지만, 정신으로 오히려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김익호 회장’이 납치당했다고 신고했지만 경찰이 찾아다줄 거라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서진우가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다면 남은 이틀 동안 경찰이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익호는 공권력을 믿지 않는 편이었다. 서진우가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죽어간다면 그건 반가운 일이다. 물론 이틀 안에만 죽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김익호 회장’이 납치됐다는 사실이 보도되면 서진우는 반드시 제 발로 찾아올 것이다. 제 몸을 되찾기 위해, 놈은 무슨 짓이라도 할 테니까. 설령 그것이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나방 같은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러나저러나 익호는 별장에서 진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시간은 익호의 편이다.
지하실에 한은영과 나란히 묶어놓는 것도 재미있겠군. 서로의 살을 저며 먹이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꼴을 봐야겠어.
익호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