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담은 철제 울타리에 갇혀있는 본부를 향해 차를 몰았다.
그는 본부의 입구에 다다르며 속도를 늦춰서 천천히 멈춰 섰다. 그러자 멈춰 선 차를 향해 입구를 지키고 있는 한 남자가 걸어와, 도담이 있는 운전석 쪽 창문을 두드렸다.
도담은 창문을 아주 조금 내려 자신의 눈만 보이도록 했다. 그의 서늘한 눈매를 알아본 남자는 차량에서 몇 걸음 물러나서 허리를 숙였다.
“들어가십시오!” 남자의 우렁찬 인사에 도담은 차를 몰아 간부전용 주차장으로 향했다.
본부로 복귀하는 30분 내내, 차 안은 불편한 침묵에 빠져 있었다.
‘진심으로 다가설 거야. 다휘도 나를 좋아하도록.’
자신은 연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연호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고, 그에 따라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은 채 본부로 도착했다.
이내 주차를 마친 도담은 차량의 시동을 껐다.
그러자 슬슬 여름이 다가오는데도, 분위기가 서늘해진 기분이 들었다. 연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창밖의 어딘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은 어느새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으려는 본부는 간간이 세워진 가로등이 활기찬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막 끝난 참이라, 여기저기서 조직의 일원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도담은 고개를 돌려 연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연호는 도담의 시선을 느꼈음이 분명하겠지만, 그를 향해 보지는 않았다.
도담은 수도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뒤로하고, 연호를 향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 너, 네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거냐?”
본래의 강압적이고 날이 선 성격 덕분에 말투가 곱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자신과 지난 5년간 가족보다 더 가까이 지낸 연호는 그가 하는 말의 의도를 알고 있을 것이다.
연호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도담과 시선을 마주쳤다.
도담은 그의 무감각한 시선을 마주치자, 쥐고 있던 주먹에 무심코 힘이 들어갔다.
차 안이 어두워 연호의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밖에서 비춰오는 가로등의 불빛 덕분에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5년 전, 도담은 코드명 ‘더블 디(double D)’로 blood bones에서 굉장한 세력과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이전 파트너이자 연호의 삼촌인 차 근혁에게 bloody ellipse로 전입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blood bones의 30개가 넘는 스페어 조직 중, 간신히 10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근혁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던 것을 알고 있었던 도담은 그의 부탁을 수락했다.
그리고 그가 bloody ellipse로 넘어와서 맡은 직책은 근혁의 조카인 연호를 차기 보스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전에 로빈을 훈련시켰던 경험 덕분에, 스승으로서의 임무는 수월했다. 그러나 연호에게 한 사람으로서 다가가기는 어려웠다. 연호가 어릴 때 겪었던 고통의 결과였다.
지금 연호는 그때의 눈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을 지킬 수 없었던 시절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가시를 드러내던 연호의 본성이었다.
그때와는 달리 그를 지키는 사람이 수백 명이 넘고 스스로도 강해져서 겁낼 것 없는 그가 왜 그런 눈을 하고 있는지, 도담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연호의 차가운 시선을 그렇게 담담히 받아주고 있었다.
‘그게 스승인 내 역할이겠지.’
두 사람의 5년이라는 유대는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연호는 이내 고개를 돌려 한숨을 내쉬며 좌석에 몸을 편하게 맡겼다.
그의 행동에 차 안의 분위기가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 알고 있어.”
연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감정이 실린 눈은 어쩐지 슬퍼 보이기도 했다.
비록 blood bones의 스페어 조직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적지는 않은 마피아 조직의 보스인 연호.
그런 그에게 일반인이라는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낸 다는 것.
“진탁이 꼴 날 거 아니면, 알아서 잘 해.” 도담이 말했다.
도담은 충고와 함께 차 키를 연호의 품으로 던졌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관 건물로 향했다.
연호는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을 조금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래. 내 착각이었네.’
자신이 극장에서 본 도담의 표정은 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차에서 내려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다휘를 깨워서 방에 데려다주겠다는 생각이었다.
* * *
한편 그 시각, 본관 내 은호의 집무실.
“은호 님, 그럼 저희는 이만 퇴근해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들 했어. 내일 보자.”
연구부 직원들의 업무 보고를 끝낸 은호가 그들을 보내며, 줄곧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나간 문을 마주하고 있는 자신의 책상 뒤로 벽 전체를 가리고 있는 커다란 커튼으로 향했다.
그녀는 기지개를 쭉 펴고서 책상의 구석에 있는 어느 버튼을 누르자, 커튼이 처진 정중앙에서 양옆으로 커튼이 쭉 벽의 끝으로 밀려났다.
이어 커튼 뒤에 숨겨져 있던 창문이 드러났다.
다른 사람들은 벽의 한 가운데에 창문을 둔 반면, 바깥 풍경과 햇빛을 좋아하는 은호는 벽 전체를 허물고 창으로 만들었다.
은호는 하루 종일 걸치고 있었던 하얀 가운을 벗어 의자에 걸쳤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테라스로 나갔다.
본관의 앞부분에 위치해서 정원과 본부의 입구가 내다보이는 연호의 집무실과는 반대로, 본관의 뒷부분에 있는 그녀의 집무실은 야외훈련장과 작은 분수, 양옆으로 넓게 펼쳐진 숲과 이외의 몇몇의 건물이 보였다.
야외훈련장에는 야간 훈련이 예정되어 있는지, 몇몇이 훈련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도담의 모습도 보였다.
은호는 테라스의 난간에 기대고 손으로 턱을 괸 채 훈련장에서 바삐 움직이는 대원들의 움직임을 좇고 있었다.
내내 본관과 연구동을 왔다 갔다 하며 정신이 없었던 은호가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봤다.
그렇게 어쩐지 감성에 빠지려던 은호는 집무실에서 울리는 자신의 핸드폰 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안으로 들어갔다.
“··· 다휘?”
은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어. 다휘야. 무슨 일이야?”
[은, 은호야. 지금 어디야?]
다휘의 목소리는 어쩐지 들떠 보였다. 신난 목소리라기보다는 좀 더···
“나 지금 내 집무실인데. 혹시·· 급한 일이야?”
[아니·· 그냥, 상담을 좀···.]
“·· 상담?”
다휘의 대답에 은호는 의문이 들었다.
‘오늘은 보스와 도담 님과 함께 밖에서 놀다 온 게 아닌가? 갑자기 웬 상담이지?’
그러나 이내 벽에 걸린 시계가 8시가 다 되어가는 것을 보고, 책상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알았어. 나 이제 퇴근할 테니까, 본관 뒤쪽에 분수 있는 정원 쪽으로 올래?”
[응, 응! 갈게··.]
은호는 전화를 끊고, 어지러운 책상을 정리해나갔다.
몇 십 장씩 쌓여 있는 서류들과 펜, 3잔이나 마신 커피, 몇 개의 인감도장, 서류 파일 여러 권, 연구 결과 보고서 등등···.
그녀의 책상은 차츰 안정을 되찾았고, 마지막으로 집무실 내의 작은 싱크대에서 커피 잔들을 씻고 나서야 퇴근할 준비가 완료되었다.
은호는 테라스로 가는 창문을 닫으며 커튼을 쳤다. 그녀는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고 가벼운 단화로 갈아 신은 후에야 집무실을 나갈 수 있었다.
그녀가 집무실의 불을 끄고 나가고 몇 분 후, 은국이 그녀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러나 문에 걸린 팻말에는 ‘부재중’에 화살표가 가 있었고, 은국은 쉬이 발을 떼지는 못 했다.
.
.
자신에게 손님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은호는 본관 뒤 정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본관 뒤의 정원은 앞의 정원과는 다르게 비교적 작은 규모지만 분수가 있는 게 장점이었다.
다휘는 분수 옆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정원의 둘레에 있는 키가 작은 관목들 너머로 보이는 야외 훈련장을 향하고 있었다.
“다휘야!”
은호가 그녀를 부르며 벤치로 다가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야외 훈련장에 시선을 두고 있던 다휘가 화들짝 놀라며 은호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야. 나도 아까 막 왔어··.”
다휘가 손사래를 치며 살짝 웃었다. 어쩐지 근심이 있는 표정이 드러나는 다휘를 보며, 고민거리가 궁금해지는 은호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오늘 보스랑 도담 님이랑은 뭐 했어?” 은호가 물었다.
다휘는 은호의 물음에 몇 시간 전에 봤던 영화와 연극, 그리고 카페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한 이야기를 했다.
다휘의 이야기가 끝나자, 은호는 영화와 연극에 놀라서 반문했다.
“둘 다 우리 쪽 계열이 소재였네··? 괜찮았어?”
“영화는 소재도 신선했고, 그런 연출이 적어서 재밌었어. 연극은 연호 오빠에게 여기·· 블립스가 생겨나게 된 이야기라고 저녁 먹으면서 들었어.”
가로등의 백색 불빛을 받으며 다휘가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런 다휘의 말에 은호는 다행이라고 여기는 한편, 그녀가 어쩐지 즐거워 보여서 함께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은호는 말을 이어갔다.
“그럼 고민은 뭐야?”
그리고 그 물음에 다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밤은 어두웠지만, 백색의 가로등 덕분에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차 안에서 무심코 들어버린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연호가 자신을 2년 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말한 ‘진심’이란 단어는 잊을 수 없었다.
‘진심으로 다가설 거야. 다휘도 나를 좋아하도록.’
그의 굳은 의지가 드러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
마지막으로 그런 연호를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까지.
본부로 복귀하는 시간 내내 꿈 같이 느껴졌지만, 현실로 와 닿은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그녀는 생각의 정리 끝에 은호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