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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버닝러브
작가 : 에이슈
작품등록일 : 2017.11.17

사랑에 관한 것. 사랑은 세상 모든 일이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랑이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을 잘 모르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인연은 랜덤이지만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끝까지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이야기 한다. 삶이 험하고 각박할수록 사랑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억
작성일 : 17-11-17 12:57     조회 : 234     추천 : 0     분량 : 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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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모든 것이 강물처럼

 

  “휴우................”

  나는 참다못해 에어컨을 끄고 연습실의 양쪽 벽 상단에 나있는 창문을 의자를 놓고 올라가 활짝 열어 재꼈다. 연습실은 오래된 건물의 지하여서 바람도 안통하고 습도가 높았다. 아직 오전임에도 푹푹 쪄대는 날씨가 짜증스러웠다. 창문은 의자를 딛고 올라서도 겨우 손이 닿는 위치인데다가 오래된 건물이라 삐그덕대며 겨우 열렸다. 그렇게 네 개의 창문을 열어놓고 나니 바람이 들어오기도 전에 온몸이 다 끈적거리게 땀이 나고 열이 치받쳤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쌍 팔 년도에나 썼을법한 캐비넷같이 생긴 에어컨보단 나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헛짓을 했구나.......’하는 생각에 내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나 보다. 마침 이건이가 들어오면서 나를 보고는 흠칫 놀라는 것 같았다.

  “아....... 안녕.........하지 못한 것 같은데.........”

  이건이는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양손에 쥐고 있던 아이스커피 하나를 내게 조심스럽게 건넸다.

  “고마워!”

  난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퉁명스런 말투가 내뱉어졌다. 그러자,

  “풉!” 하고 이건이가 입 안에 머금었던 커피를 내뿜었다.

  “악! 뭐야, 너! 왜 이래?! 아이 씨!”

  난 놀라 내 옷에 살짝 튄 커피 방울을 털어내며 말했다.

  “아! 미안, 미안! 괜찮아? 내가........ 큭........ 내가 닦아줄게! 풉.......”

  이건이가 마시던 커피를 테이블 위에 얼른 내려놓고 자신의 소맷자락을 잡고 내 옷을 터는 시늉을 했다.

  “됐어! ........ 으이씨........ 뭐야? 너 왜 웃어? 짜증나 죽겠는데!”

  난 이번엔 정말 짜증나는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아니....... 미안! 난 순간........ 복이를 보는 줄 알았어. 풉........ 지금까지 너 그런 표정 못 본 거 같아서.......”

  그가 내 눈치를 보며 삐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막고는 테이블 구석에 있던 두루마리 화장지를 가져와 손으로 둘둘 말아 뜯어서 내게 건넸다.

  “흐흠! 너 같으면 짜증 안 나겠냐? 아침부터 푹푹 찌는데 에어컨은 트나 마나고, 낑낑 대며 창문을 열었는데 더 덥기만 하고........ 거기다 커피 세례까지....... 의구....... 말자 언닌 또 왜 안 와! 이럴 거면 아예 오후에 하자고 하던가!”

  툴툴대는 나를 화장지를 손에 든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난 화살을 돌렸다.

  “넌........ 무슨 남자애가 한여름인데도 긴 팔만 입고 다니면서 땀 한 방울을 안 흘리니? 어휴....... 얼굴은 희멀건 해가지고....... 이러니 내 짜증을 이해할 리 없지!”

  “나........ 나도 더워.......”

  그가 기죽은 듯 작은 소리로 말하자 난 그를 노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또 한 번 ‘풉!’ 하고 뿜으며 얼른 입을 가렸다. 그의 행동에 나도 순간 웃음이 나왔다. 내 미소를 눈치 챈 그가 이번엔 대놓고 껄껄대며 웃기 시작했고 나도 어느새 무장 해제되어 웃고 말았다. 어느새 머리꼭대기까지 뻗쳤던 짜증이 누그러들었다.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아이스커피를 내게 다시 건네주었고 갈증에 몇 모금 쭉쭉 빨고 나니 몸 구석구석 흥건했던 땀도 마르는 것 같았다.

 

  “참........ 정말 그러네.”

  “뭐가?”

  짜증도 땀도 다 사라지고 나자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러고 나니 이건이가 말한 대로 조금 전의 내 모습에서 은복이가 느껴졌다. 피식 웃으며 말했더니 그가 되물었다.

  “그래....... 그런 것 같다. 은복이가 그랬었지, 늘....... 더울 때, 추울 때, 배고플 때, 새 멤버 아이가 맘에 안 들 때....... 훗........”

  난 말했다.

  “참 이상하다. 변한 듯 안 변한 것 같고 변함없는 것 같다가도 막 낯설게도 느껴지고.......”

  “뭐가?”

  이번엔 내가 되물었다.

  “그냥 다. 모든 게. 나도, 내가 아닌 것들도........”

  그가 말했다.

  “그런가? 음....... 그냥 다 변하는 거 아닌가? 다 변하는데 자신이 무얼 원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거 아닌가....... 너처럼. 변화를 원했다가, 변하지 않길 원했다가....... 사람들 마음이 수시로 바뀌니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야, 안 그래? 시간이 멈추지 않는 이상 똑같아 보여도 변한 거야. 그걸 인정해야 사는 게 편해지는 것 같아....... 그게 잘 안 되는 게 문제지만.”

  난 몇 달간 겪었던 많은 일들에 많은 심경의 변화를 느꼈다. 무의식적으로는 변치 않기를 아니, 변함이 없다고 자꾸만 규정하려 했었는지 모르겠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불쑥불쑥 나를 찾아왔을 때, 커다란 나무기둥인 줄만 알았던 내 의지는 힘없이 뿌리째 뽑히고 말았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임을 눈치 챘을 땐 앞으로 겪게 될 많은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실로 그 두려움은 이미 지난 상처에 비할 게 못 될 만큼 거대했고 그것이 나를 더욱 괴롭혔던 것 같다. 그 괴로움 속에서 허덕일 때 문득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5년째 한결 같아 보이는 말자 언니와 곽 사장님, 잠시였지만 내가 계속 머물 거라 믿었던 나무그늘 같던 이건이, 마법처럼 사라진 듯 허무하게 느껴지는 은복이의 빈자리, 그리고 ‘버닝 러브’와 계절의 변화.

  작년과 같이 7월의 낮은 찜통 같았고 연습실의 곰팡이 냄새와 눅눅함은 그대로인 듯 했으나, 시간은 그것들을 그대로 둘 리 없었다. 무심했던, 변함없길 바랐던 내 마음을 시간은 가볍게 비웃었다. 가만 보니 작년보다 지난 6월의 평균기온은 더 높았고 강수량도 많았다. 그래서 연습실의 벽 색깔은 더욱 짙은 무채색을 띄었으며 이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던 캐비넷 같은 에어컨은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것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된 나는 은복이가 비운 그 자리에서 새삼 찜통더위에 안 내던 짜증을 부리고 있던 것이다.

 

  봄 시즌 공연 때였다. 나는 무척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 때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이건이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고 미웠다. 난 억울했다. 처음엔 그래서였고, 시간이 지나니 그 혼란스러움을 잠시 잊을 수 있어서였고, 나중엔 궁금해서였다. 내가 의도적으로 힘든 티를 내는데도 그는 차가우리만치 아무렇지 않았었기에. 난 그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런 나의 행동이 그나마 탈 없이 공연을 잘 마칠 수 있게 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건이는 공연 연습 내내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쳤고 열정적이었다. 원래 그런 아이이기도 했으나 공연 당일엔 여느 때와 달랐다. 그는 경험이 많지 않은 것에 비해 잘 긴장하지 않는 성격이다. 하지만 그 날은 달랐다. 큰 공연도 아니었다. 그는 무척 긴장되어 보였고 리허설도 여러 번 했다. 잠시 후, 공연이 시작되었고 관람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어도 그의 눈은 습관적으로 한 곳을 자꾸만 힐끗힐끗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신경 쓰느라 연주에 집중하지 못 할까봐 첫 곡이 끝났을 때 난 얼른 그의 시선이 머물렀던 그곳을 확인했다. 관객석이었고 구석자리에 몇 명의 남자관객이 있었던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난 후, 난 남은 공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난 며칠 후, 그와 연습실에서 둘만의 대화를 나누었던 그 때, 난 몰랐던 그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눈물까지 흘리며 내 품에 안겼던 날. 그는 나보다 많이 울었고 그를 품에 안은 나는 슬픔도 설움도 아닌 애처로움의 눈물을 흘린 적 있다. 그 후로도 그를 잊기 위한 나의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그의 웃음과 평온한 일상이 조금도 밉거나 원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안정은 내게 상처를 낫게 하는 약이 되어 주었다.

 

  내 상처의 흉터가 희미해진 지금, 그는 다시 내 앞에서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껄껄 웃어재끼던 그가 어떤 변화와 낯선 상황을 얘기하며 다시 고개를 떨어뜨린다.

 

 24. 안녕

 

  영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시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푸른 나무숲에 파란 하늘, 간간히 보이는 한옥집 지붕들. 옅은 바람에 나뭇잎들이 조금씩 살랑거리고 있었다. 보이는 아름다움과는 어울리지 않는 폭염의 현장이란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처음 와 보는 이 카페의 냉방 상태는 조금 전까지 느꼈던 엄청난 더위를 잊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는 창밖의 모든 풍경을 최대한 눈에 담으려 애썼다.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봐요?”

  그의 노력이 도를 지나친 것인지 카페 밖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분명히 살피고 있었건만, 언제 들어왔는지 수연이 옆에 서 있었다.

  “어? 그........ 그냥....... 언제 왔어?”

  그는 커다란 덩치를 움찔거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한 일 분 전 쯤요.”

  몇 달 만에 본 그녀는 그대로 인 듯 무언가 낯설게 보였다. 우선 계절 때문이겠지만 심플한 검정 민소매 티셔츠에 하얀색 린넨 반바지, 늘 묶고 다녀서 몰랐는데 어깨에 닿는 찰랑거리는 단발머리가 예전의 모습을 한 번 더 떠올리게 만들었다. 영태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 쳐다봐요. 땀범벅이에요.”

  그녀는 영태 앞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이마 위쪽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냅킨으로 눌러 닦고 손부채질로 얼굴의 열을 식혔다.

  “마....... 많이 덥지? 아... 아이스커피?”

  영태는 말을 더듬었다.

  “들어오면서 주문했어요.”

  영태가 엉덩이를 들썩거리자 그녀는 얼른 대답했다. 그 때 그녀가 테이블위에 놓아 둔 진동 벨이 반짝이며 울렸다.

  “있어! 내가 갖다 줄게.”

  영태는 얼른 진동 벨을 집어 들고 일어났다.

 

  “전화........ 안 할 줄 알았는데.......”

 자신이 가져다 준 아이스커피를 입에 가져다 대는 수연을 보며 영태는 말했다.

  “왜요? 내가 한다고 했잖아.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수연의 말에 영태는 조금 당황했다.

  “글쎄....... 그냥 난 그게........ 끝일 거라 생각했어....... 자신이 없었나봐. 바보같이 그런 상황을 예상 못 한 건 아닌데, 그 다음은 미처 생각하지 못 했었어.”

  영태가 말했다.

  “난 생각했었는데....... 오빠가 나보다 못하네.”

  그녀의 대꾸에 영태는 조금 전보다 더 당황했다.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시선 둘 곳만 찾아댔다.

  “그래서, 내 연락을 아예 기다리지도 않은 거야? 칫....... 좀 실망이네요.”

  그녀가 말했다.

  “아....... 아니....... 꼭 그렇다 라기 보다는........”

  영태는 이제 대놓고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오빠....... 제가 어색해요?”

  그녀의 물음에 영태의 눈빛은 흔들렸다.

  “변한 건 오빠네. 어쩌면....... 아니,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알지 못 할 일을 오빠는 겪었을 테니까. 나는, 그 동안 오빠만 생각했어요. 물론 보고 싶어서였지만.......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걸 생각하다가 점점 하게 된 생각이 뭔 줄 알아요?”

  그녀의 말에 영태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오빠가, 어떤 일을 겪고 있을까를 생각했을 때 분명 내가 짐작할 수도 있는 일일 테고,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을까를 생각했을 때도 분명 난 그걸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궁금하고 걱정됐어요. 그러다가 그건 궁금증도 걱정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걱정이라는 건 걱정일 뿐 아무 것도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았고........ 나나 오빠나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상황도, 또 그런 사람도 못 된다는 걸 알잖아요. 그렇게 보니까 다 욕심처럼 보였어요. 욕심에 눈이 멀었는데 뭘 볼 수 있겠어요. 덮어놓고 변명하고 싶어 하고 합리화하려고 하는 것 말고....... 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시간만 보냈을 뿐이에요. 모든 게 다 내 능력 밖에 있었고 어차피 이 상황을 끝내 줄 수 있는 건 시간뿐이라는 걸, 그걸 아니까 괴롭더라고요....... 사실....... 지금도 괴로워요. 이 괴로움이 언제 끝날지도 시간만이 알고 있겠죠? 오늘....... 이렇게 보게 된 게 오히려 도움이 될 거라고 믿어요.”

  영태는 그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얘기를 듣고 나서 그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차례로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의 이 상황까지. 잠시 자신에 대한 원망과 실망감에 사로잡혔지만 강호와 혜정이가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눈앞에서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연을 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수연은 영태의 생각이 끝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말했다.

  “행복해 지고 싶어서....... 뭐든, 그 단 하나의 이유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틀려도 너무 많이 틀렸던 거야....... 그렇다고 답을 아는 것도 아니고....... 틀렸다는 것밖엔 모르겠어.”

  “뭐가 틀렸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러던가요? 답이란 게....... 있기나 한 거고? 오빠가 보기에 누군가는 모범답안처럼 살고 있던가요? 나랑 헤어져 있으면서 깨달은 게 겨우....... 자신이 틀렸다는....... 그것뿐 이예요? 틀렸다는 걸 알면 적어도 답이 뭔지는 알아야 하는 거잖아!”

  수연은 영태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수연의 다그치는 듯한 말투에 영태는 놀라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가만 보면 생각이 없는 건지, 많은 건지 모르겠어. 자신만 보거나, 남들만 보거나....... 둘 다 좀 보면 안 되나? 왜 눈이 두 개씩 달렸겠어? 잘 봐요! 거울 속에 비친 것만 보지 말고 맨 눈으로 보라고요. 그리고 자꾸 뭔가 판단하려 하지 좀 마요. 그냥 오빠랑 나는....... 그냥 누군가에겐 미친 년놈이었고, 누군가에겐 멍청이들이었을 뿐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사랑하는 사람들 아닌가요? 또 서로에겐 어땠고........ 그렇게 자책만 하지 말고 원래 아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해요. 그 때처럼!”

  다소 흥분된 투로 내뱉는 수연의 말에 영태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처음....... 봤을 때처럼. 그 때....... 그 때처럼요. 내가 반했었던 그 때 모습처럼.......”

  수연의 목소리는 흥분한 듯 들렸지만 다부지기도 했고 떨리기도 했다. 영태도 순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순간이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순간들이 분명히 그에게 존재했지만 현실에 가려졌다는 이유로 그는 현실에 자동적으로 끼워 맞춰지는 기억만 끄집어내었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보았다. 어딘가로 사라졌던 기억들이 조각조각 나타나 그녀의 얼굴과 오버랩 됐다. 자신의 많은 걸 담고 있는 그녀의 그 젖은 눈동자를 그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25. 강호와 이건

 강호

  클라이언트는 어떻게든 휴가시즌이 되기 전에 시공 단계까지는 완료하길 원했다. 하지만 그러길 누구보다 원하는 사람은 나 일 것이다. 회사로 복귀할 여유도 없었고 서울보다 독하다던 이곳의 더위를 온몸으로 경험하며 매일 현장과 사무실을 왔다 갔다만 했다.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겨우 7월을 넘기지 않을 정도로 마무리 될 것 같았다.

 

  “마누라가 폭발 직전이야....... 겨우 휴가 맞춰 놨다고 다음 주까지 안 오면 죽여 버리겠다네요!”

  후발로 합류했던 후배가 아내와의 통화를 마치고 오면서 내게 말했다.

  “그렇겠지....... 결혼하고 첫 휴가 아냐?”

  내가 물었다.

  “네. 휴........ 난들 안 가고 싶겠냐고요! 안 그래도 죽겠는데 살인 협박까지 하니....... 에휴!”

  동료는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며 내게 말했다.

  “선배님은 결혼, 잘 생각하고 하세요. 할 거면 일을 때려치우고 하시든가........”

  그가 담배 한 모금을 빨고 연기를 내뿜으려 말했다.

  “그 정도 모르겠어? 아예 안 겪어 본 것도 아니고........ 난 그래서 결혼을 포기했어. 연애도 안 되던데 결혼은 무슨.......”

  난 한 모금 남은 커피를 마저 비우고 종이컵을 구기며 말했다.

  “어?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하하....... 언제 이렇게 비관적이 되셨어요? 우리가 뭐, 설마 만날 이렇겠어요? 열심히 하다보면 상황도 나아지겠죠?”

  그는 말했다.

  “한대리가 너무 낙관적인 것일 수도 있어. 한대리 말대로 직업을 바꾸면 모를까....... 하긴, 그것도 장담 못하지. 이 일도 애초엔 몰랐잖아. 차도 포도 다 떼고 멋진 일일 줄만 알았지. 그게 이상과 현실의 차이잖아. 일도 결혼도 연애도 생활도....... 뭐든 모든 건 실체가 분명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볼 줄도 모른 채 뛰어든다는 거야. 그러니까 시행착오도 겪고, 괴로워도 하고, 깨닫고....... 나빠졌다 나아졌다 하는 거 아니겠어? 그러니까 그냥 살짝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게 데미지를 줄일 주 있지 않을까....... 하는 거지.”

  내 말에 동료는 한 마디 툭 던지고는 담배를 종이컵에 넣고 문질렀다.

  “좀 겁이 많으신가 봐요.......”

  “..................”

  난 대꾸하지 못했다.

  “.........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내일 회식은 참석하시죠?”

  “글쎄....... 컨디션 봐서........”

  “그 동안 고생한 게 있는데....... 딱 회포만 풀고 올라가시죠?”

  동료의 제안에 난 대답 대신 그냥 웃어보였다. 한 달의 시간이 일일이 기억하지 못 할 만큼 훅 지나갔고, 오늘 마무리가 되었고, 내일은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밖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생각이 문득 스쳤다.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꺼내어 나도 모르게 뭔가를 뒤적거렸다. 무의식처럼 찾고자 하는 무언가의 흔적은 없었다. 내일 서울로 돌아가 쉴 수 있다는 안도감 뒤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쳤다.

 

  구름은 잔뜩 끼어 그야말로 가마솥 속 같은 토요일 오후였다. 일을 할 때와는 느낌이 다른 더위였다. 서울로 올라가는 고속버스 안.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너른 좌석이 마치 집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선배님, 서운해요. 말도 없이 가버리시고.......]

  후배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미안, 한 대리. 내 몫까지 실컷 즐기다 돌아와. 먼저 가서 기다릴게. 그 동안 고생했어!]

  회식 참석은 애초에 생각도 없었지만 후배가 간절히 원하는 것 같아 미리 얘기하지 않았다. 한 대리의 메시지를 확인한 후 난 이전 메시지를 뒤졌다. 스크롤을 한참을 내려서야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20분쯤 걸려요.]

  [그럴래?]

  시간은 그곳에 멈춰져 있었다. 난 그 때의 상황을 머릿속에 다시 그렸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을 따라 쭉 지나와 한 달 후 지금, 다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은 내 모습을 보았다. 빵빵한 에어컨 바람이 머리 위를 스치며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난 휴대폰을 만지작댔다. 저장되어 있는 그의 번호를 확인했다. ‘이건’이라고 되어 있는 그의 번호를 확인하고는 혹시라도 통화버튼을 실수로 누를까 얼른 주소록 창을 닫았다. 난 그냥 휴대폰을 손에 쥔 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창밖을 보았다. 버스가 곧 출발했다.

  광주 터미널의 풍경은 여름 휴가철과 토요일 오후임을 증명해 주는 듯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많은 버스들이 들어오고 나갔다. 사람들의 몸짓과 표정에서 날씨가 느껴졌고 주말의 여유로움 따윈 없었다. 난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해서 머리 위의 냉방구를 닫았다. 그래도 찬바람은 새어 나왔다. 난 다시 냉방 조절 버튼을 오프 상태로 돌려놓았다. 이내 한기가 사라지더니 비로소 편안함이 느껴졌고 난 눈을 감았다.

 

 이건

  설레었다. 사실 조금 긴장되기도 했다. 처음 참석해 보는 페스티벌이라서 인지 널따란 무대와 관객석을 보니 긴장감은 어쩔 수 없었다.

  리허설을 위해 무대 위에 올랐을 땐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말자 누나는 담담해 보였고 은수는 표정도 생각도 없는 인형처럼 잔뜩 경직되어 보였다. 미리 작업해 온 MR을 음향에 맡기고 라이브 연주와 맞춰 보는 1차 리허설이었다. ‘버닝 러브’는 신예 참가팀으로 오프닝 무대 중 하나를 맡게 되었고 세 곡을 부를 예정이었다. 음향 리허설이 비교적 순조롭게 끝났다. 남모르게 말자 누나가 많이 애 쓴 흔적이 보였다.

  연초에 발매 되었던 앨범에서 가장 대중적인 곡 두 개와 밴드 추천 곡 하나를 선곡했다. 잔뜩 경직되었던 은수가 조금 걱정이었지만 막상 리허설이 시작되니 그녀는 돌변했다. 문제가 되었던 건 오히려 나였다. 생각보다 무대가 커서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 않던 실수들이 나왔다. 은수는 미안해하는 내게 다가와 베이스를 맞춰 주었다. 그녀는 충분히 멋져 보였다.

  이렇게 우리는 1차 리허설을 마치고 우선 연습실로 돌아와야 했다. 본 공연은 이틀 후, 내일은 다시 공연장으로 가서 2차 리허설을 한 후 다음 날 공연을 준비해야 했다. 평소 좋아했던 국내외 밴드들을 내일은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좀처럼 신이 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스스로 나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연습실에 남아 노래 연습을 했다. 말자 누나는 체력소모를 걱정하며 컨디션 관리 차원에서 숙소로 바로 향했고 은수도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며 일찌감치 집으로 갔다. ‘하필이면 오늘........’ 이라고 생각하며 연습실에 혼자 남았다. 혼자 있기 싫은 날이었다. 연습에 집중하기가 힘들 것 같아 리허설 때 고전했던 ‘기다려’를 쉬지 않고 반복해서 불렀다.

 

  공연 당일 오후 7시. ‘버닝 러브’의 공연 순서가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셋은 이미 화려한 무대와 수많은 관객들의 열기에 압도되어 긴장할 틈도 없이 앞 무대를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그 때 진행요원의 싸인이 들려왔고 곧 무대를 준비했다. 그 때부터 공연을 마칠 때까지 약 20여분의 시간이 찰나처럼 느껴졌다. 황홀했다. 무대를 내려왔을 때, 잠깐 졸면서 꾼 꿈처럼 시간이동을 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나는, 우리 셋은 무사히 페스티벌을 마쳤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한 동안 그 반짝이던 무대와 관객들의 함성이 떠나질 않았다.

 

  파란 하늘에 농도 짙게 떠 있는 뭉게구름들은 한여름임을 증명하듯 움직이지도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진녹색의 도심 속 나무들은 마치 대형 스피커 마냥 도시매미들의 울음소리에 그늘이 아닌 소음의 원천지가 되어 있었다. 북적였던 홍대 거리에는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만 몇몇 보일 뿐이었다. 8월 5일 일요일.......

  난 어젯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되길 기다렸다가 카페가 문을 열 때쯤 홍대 거리로 나와 늘 사람들이 가장 많던 골목의 한 카페에 홀로 앉았다. 아침을 간단히 먹을 작정이었지만 막상 주문을 하려니 소화가 잘 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난 우선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했다. 카페는 이제 막 영업 준비를 하는 중이었고 사장님으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 창가 맨 구석자리에 앉아 있었다.

  “더우시면 에어컨 틀어 드릴게요.”

  뜨거운 커피를 호오........하고 불고 있는 나를 보시고는 사장님께서 물으셨다. 이른 아침이라 습도가 좀 느껴질 뿐 난 덥지 않아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아, 음악만 좀 틀어 주실 수 있으세요?”

  내 부탁에 인상 좋으신 사장님께선 미소를 지으시며 스태프 룸에 들어가셨다. 곧 음악이 흘러 나왔다. Randy Rhaods의 ‘Goodbye To Romance’.

 

  중학교 1학년 때 새로 알게 된 친구를 따라 기타를 배우러 다녔었다. 현식이라는 친구였는데, 현식이의 대학생 형이 동네 아이들 몇 명에게 주말마다 기타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 당시 유일한 단짝이었던 현식이를 따라 방과 후면 그의 집 지하실에 있는 형의 작업실에서 기타를 연습하곤 했다.

  형은 그 당시 대학 밴드에서 기타를 치고 있었는데 평일엔 늘 귀가가 늦거나 집에 잘 붙어있지 않는다 했다. 형은 행정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현식이 말로는 공부도 꽤 잘 했지만 대학을 간 이후로는 공부는 거의 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1학년 때는 성적관리도 엉망이었고 심지어 재적 위기까지 겪었다고 한다. 현식이는 그런 형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미친 듯이 공부해서 대학을 들어 가 봤자 저렇게 아무 쓸모없는 시간만 보내게 되니 자기는 차라리 일찌감치 대학을 포기하고 돈과 시간을 아끼겠다고 말하곤 했다.

  형은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런 것까지 현식이가 얘기해 준 것은 아니지만, 주말에 형에게 기타 레슨을 받으러 갈 때마다 가끔 보게 되는 광경은 그와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가 껄끄러움을 느끼게 하였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한 번도 대화하는 걸 본 적이 없었고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간혹 난 그의 아버지가 형을 노려보는 표정만 몇 번 목격했을 뿐이었다.

  현식이네 집은 부자까진 아니어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의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할아버지가 경영하시던 지업사를 물려받아 30년 동안 개미처럼 일만 하시며 자수성가하신 분으로 그 동네에서 유명하셨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 조신하게 내조를 해오신 모범적인 아내로 정평이 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야말로 ‘가정’이라는 의미에 기준을 제시하듯 여러모로 모범적인 가족이었다. 현식이도 그랬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예의바르고 신중한 아이였다.

  처음에 그의 집에 놀러 갔을 때, 주말이어서 부모님이 모두 계셨다. 내가 그들에게 인사를 하니 온화한 인상으로 날 맞아 주셨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지하실에서 형과 함께 있을 때는 달랐다. 형의 아버지는 형을 몹시 못마땅해 하셨다. 나 때문이었는지, 말씀을 하시진 않으셨지만 가끔 인기척 없이 지하실 문을 덜컥 여시고는 크게 헛기침을 하시거나 무서운 표정으로 혀를 차시거나 하시며 말없이 문을 열어놓고 나가시곤 했다. 처음엔 몹시 놀랐었는데 거의 갈 때마다 그러셨고 형과 현식이는 아랑곳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나도 곧 아무 내색하지 않게 되었다.

  형은 무척 열심히, 그리고 세심히 나와 현식이에게 기타를 가르쳐 주었다. 평소 좀 어두워 보이는 성격이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꽤 다정하고 재미있는 형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난 기타가 너무 재미있었고 매주 일취월장했다. 형은 많이 칭찬해 주었다.

  “오......... 대단한데? 이걸 어떻게 다 외웠어?”

  처음 들어보는 팝송을 형이 코드만 가르쳐주고 연습했었는데 일주일 만에 외워서 완곡을 연주해 보였더니 형이 처음 이렇게 칭찬해 주었다. 특이할 것 없는 칭찬의 말이었지만 그 때 형의 놀란 표정과 말투는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것 같았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만날 이 노래만 흥얼거리고 맨 손가락으로 코드 잡는 시늉하면서 다녔어, 이 새끼. 수업시간에도 멍 때리다가 혼나고....... 길 건너면서도 그 짓하다가 택시에 치일 뻔 했잖아. 그 덕에 택시기사 아저씨한테 나만 엄청 욕먹고........ 완전 미친놈이야. 얘!”

  “뭐? 하하하하.........”

  현식이의 증언(?)에 형이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 웃음은 마치, 어린 시절 미치도록 궁금하고 먹고 싶었지만 먹어 볼 수 없었던 궁극의 아이스크림을 비로소 한 입 맛보게 되었을 때의 느낌처럼 비현실적이었다. 난 황홀했다.

  그 때였던 것 같다. 난 형의 웃음소리, 나를 칭찬해 주던 그 목소리, 멋지게 연주하던 기타소리와 진지하게 주법을 가르쳐 주던 그 말투와 표정을 한 번도 내 머릿속에서 지운 적이 없었다.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던 피노키오 같았던 나는 그 때부터 내 머릿속을 채웠던 그것들로 생활의 활력을 얻었던 것 같다. 웃고, 달리고, 먹고 말하는 것이 가능해 졌다. 어쩌면 가족이 없었던 나에게 형은 ‘가족’이란 이런 것일까....... 라고 생각하게 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2003년 어느 여름 날, 방학을 맞아 난 처음으로 방학 계획이란 걸 세웠다. 학창 시절, 내게 방학은 지독한 괴로움 말고는 아무 의미도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시간을 보낸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아무도 모를 거라 장담할 수 있다.

  그 해 여름방학 처음 세우게 된 나의 계획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버는 것이었다. 기타를 사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학교 1학년 꼬마를 고용하는 곳이 있을 리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난 무조건 부딪치기로 하고 고용주에겐 열여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렇게 하게 된 일이 우유배달이었다. 난 운이 아주 좋았다고 생각했다. 아침 일찍 일을 하고 낮엔 현식이네 지하실에서 기타를 연습 할 수 있었다. 우유 대리점 사장님이 기특하다고 배달하고 남는 우유를 주시기도 했는데 가끔은 딸기 맛이나 초코우유를 주시기도 했다.

  가끔 다른 아르바이트가 결근을 하면 땜빵으로 연장근무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해서 모은 돈이 삼십만원 정도 되었다. 내겐 삼백 아니, 삼천, 삼억처럼 느껴지는 돈이었다.

  방학이 끝날 무렵, 난 들뜬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처음 낙원상가를 찾아 갔고 번 돈을 모두 털어 첫 기타를 구입했다. 내 덩치만 했던 기타를 둘러매고 난 한 걸음에 형을 찾아갔다. 너무나 흥분해서 형의 작업실 문을 열었는데, 그 때 형은 Randy Rhaods의 ‘Goodbye To Romance’를 연주하며 부르고 있었다.

  난 기타를 매고 한 손은 여전히 문고리를 잡은 채로 서서 형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꼼짝하지 않았다. 아름다웠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서 있었다.

 

  “어?! 언제 왔어? 안 들어오고 뭐해?”

  형의 노래와 연주가 모두 끝나고서야 난 내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 위로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눈물을 훔치며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너.......? 왜 울어? 무슨 일 있어?”

  형이 나를 보고 놀라서 물었지만 난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 자식, 기타 샀구나! 드디어! 역시 대단한 놈이야!”

  형은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서 심장이 뛰었다. 형은 나만큼이나 흥분하며 내가 등에 맨 기타를 내려놓자 얼른 케이스를 열어 재끼며 말했다.

  “하하하, 이 녀석....... 잘도 골랐네!”

  “거기 있는 기타는 거의 다 쳐 보고 골랐어요!”

  내가 말했다.

  “하하, 안 봐도 알 것 같다!”

  형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반짝이는 새 기타를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튜닝을 했다. 그리고 내게 기타를 건네며 말했다.

  “자, 해 봐!”

  “뭐.......... 뭘 해 볼까요?”

  형의 제안에 난 당황했지만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 내가 했던 거!”

  “..............!”

  형의 말에 난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 봐, 어서! 눈물까지 흘리며 들었잖아!”

  난 또 한 번 당황했지만 기타를 건네 들고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는 조금 전 느낌을 떠올렸다. 난 조금 더듬거렸지만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코드가 진행될수록 온몸에 전율처럼 그 곡이 느껴졌고 점점 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그러자 형은 조용히 가사를 읊조렸고 내가 고개를 들자 그는 눈을 감고 내 반주에 맞춰 조금 전처럼 노래하고 있었다.

 

  난 그 이후로 현식이네 지하실에 매일 출근하듯 했다. 방학이 끝나서 형도 좀처럼 자주 볼 수 없었고 현식이도 기타를 배우는 것에 대한 열정이 처음만 못했다. 방과 후, 저녁 7시 전까지는 그 집에 아무도 없거나 현식이와 단둘이거나 했다.

 

  9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난 기타연습을 위해 현식이네 지하실을 어김없이 찾았다. 형은 보이지 않았고 현식이 녀석이 혼자 기타를 연습하고 있었다.

  “......... 형은?”

  유난히 조용한 분위기가 감돌아 난 현식이에게 물었다.

  “우리 형? 입대했어.”

  현식이가 대답했다.

  “뭐라고?”

  나는 놀라 말했다.

  “군대 갔다고....... 오늘.”

  “뭐? 그런 얘기 안했었는데....... 형이.......”

  “나도 어제 알았어....... 이 씨....... 자원했대. 아오....... 동생한테 말도 안 하고!”

  현식이의 말에 난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서운함, 배신감 같은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이것만 놓고 갔어. 다 완벽하게 연습해 놓으래. 휴가 나올 때마다 확인한다고....... 휴우....... 난 안 할란다. 아니, 못해, 난.”

  기타 코드집과 비디오테이프 몇 개가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지미 헨드릭스, 에릭 클랩튼등 공연실황을 담은 비디오와 국내외 유명한 기타리스트들의 연주 장면들을 모아놓은 테이프들이었다. 테이프 케이스에 직접 쓴 리스트와 날짜들이 적혀 있었고 낡아서 너덜너덜한 기타 코드집이 투명 테이프로 억지로 고정되어 있었다.

  “너 가져! 난 예전에 다 본거야. 형은 이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무책임하게!”

  현식이가 투덜대며 내게 상자를 내밀었다.

  “그럼....... 언제 오는 거야, 형은? 휴가는 언젠데?”

  난 현식이에게 물었다.

  “나도 몰라. 입대하는 것도 말 안 했는데 그런 걸 얘기했겠냐?”

  난 그날 연습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멍해져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난 현식이가 건네준 상자를 들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상자를 올려다 놓고 가만히 생각 해 보았다. 서운한 마음이 우선 컸지만 형의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어차피 가야 할 군대였잖아. 형은 학교에도 친구들에도 별 관심이 없어 보였어. 부모님과도 그렇고........ 피하고 싶었던 거겠지. 잠시라도 도망치고 싶었을 거야.........’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난 잠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깨어났을 땐 다음 날 새벽이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창문에 비칠 때쯤 난 일어났고 눈을 뜨자마자 책상 위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난 상자를 내려놓고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낡은 기타 코드집을 열었다. 페이지를 하나하나 넘겨보았다. 형이 썼던 메모와 낙서들이 페이지들마다 빼곡했다. 반쯤 넘겼을 때 노란색 포스트잇이 눈에 띄었다.

 

  ‘건아, 현식인 이 메모를 발견하지 못할 거야. 말없이 가서 미안하구나. 현식이가 혹시 포기하더라도 넌 꼭 연습해서 언젠가 나한테 꼭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널 믿는다!’

 

  메모를 읽고서 난 그에게 서운했던 마음을 접기로 했다. 그날부터 난 기타연습에 다시 매진했고 새벽 우유배달도 다시 시작했다. 돈을 모아 비디오 플레이어를 장만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 달 후, 난 비디오 플레이어를 장만했고 형이 준 테이프들이 다 늘어나도록 보고 또 보았다. 손끝이 다 터지기도 했다. 밴드 몇 장을 겹쳐 감고 또 감고도 난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2003년 12월. 겨울 방학식 날이었다. 나 또한 기타에 정신이 팔려 지각을 하거나 간혹 결석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현식이의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현식이가 며칠째 결석을 했었다. 형이 입대한 후로 난 기타연습을 집에서 해왔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다.

  난 그저 친구의 상황이 궁금해서였다. 몇 달 만에 현식이네 지하실을 찾아갔다. 지하실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고 자물쇠에 묻은 먼지들로 봐서 폐쇄한지 좀 된 듯싶었다. 난 곧 1층 현식이네 집으로 가 초인종을 눌렀다. 응답이 없었다. 몇 번을 더 눌러 보고 문을 두드려도 보았지만 여전히 그랬다. 갑자기 소낙비를 머금은 먹구름처럼 불안감이 엄습했다.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옆집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나오셨다. 반복되는 초인종 소리와 노크 소리를 들으신 모양이었다.

  “그 집 막내아들 친구지?”

  아주머니께서 내게 물으셨다.

  “아........ 네.”

  난 대답했다.

  “다들 집에 없어....... 지방 내려갔을 거야........ 쯧쯧, 군대 간 아들이 죽었단다. 그저껜가.......?”

  아주머니는 혀를 차시며 말씀하셨다.

  “.................!”

  “에휴........ 그래, 너도 알지....... 내가 몇 번 봤어, 놀러 오는 거. 쯧쯧........ 놀랬지?”

  “......... 왜.............”

  “에이고........ 자살했대. 불쌍키도 하지....... 새파란 놈이....... 인사도 잘 허고, 착한 놈이었는데....... 으이구.........”

  아주머니는 눈가가 촉촉해 지시며 말씀하셨지만 난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에고! 얼마나 놀랬을 껴! 낼이나 모레나 올 꺼여, 이 집 식구들....... 추운데 어여 집에 가, 학생도....... 응? 갔다 다시 와........”

  난 다리에 힘이 풀려 현관문 앞에 주저앉았다. 옆집 아주머니는 날 한참을 보시다 혀를 차시며 집 안으로 들어가셨다. 난 자물쇠로 잠겨있는 지하실 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무엇이 현실인지 헷갈렸다. 그저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난 그 해 겨울방학부터 쭉 학교에 가지 않았다. 현식이도 그 이후 볼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와 기타연습만이 내 생활이었다. 그 때부터 홍대와 대학로 근처를 난 떠돌기 시작했다. 직업이 있는 것도 학생인 것도 아니었지만 난 잠이 모자랄 정도로 시간을 쓰려 했다.

  어느 날 아침, 우유배달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연히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현식이와 마주쳤다. 내가 그를 발견했을 때부터 이미 그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내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난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가 그를 향해 움직이려 하는 순간, 그는 날 외면하더니 돌아서 버렸다. 난 한참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잠시 후 등교 버스가 오고 현식이는 그대로 버스에 올랐다. 그것이 내가 본 친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렇게 난 혼자서 7년을 생활해 왔고 여전히 내 방 한 구석엔 형이 남긴 그 상자가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감춰진 것인지 나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상처로부터 7년이 지난 어느 날, 난 내가 다시 웃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난 우유배달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맘씨 좋은 사장님이 사정이 안 좋아지시자 다른 일을 내게 추천해 주신 적도 있지만, 사장님과 나의 생활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이 일을 계속 하고 싶었다. 강남 쪽 한 구역을 맡아서 배달 일을 이어갔다.

  내가 그의 회사 앞 편의점을 처음 가게 되었던 작년 어느 여름날, 그곳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꾸역꾸역 쑤셔 넣어 두었던 형의 기억이 툭 터져 나오듯 꺼내어졌다. 이른 아침, 편의점에서 배달을 마치고 나왔을 때, 누군가 통화하는 목소리에 놀라 난 그가 있는 쪽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냥한 말투와 나지막한 목소리, 말하는 입 매무새와 가끔씩 짓던 미소는 나를 놀라게 했다. 정신없이 바라보는 내 시선을 감지한 그가 잠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눈이 마주친 시간은 1초도 되지 않았다. 난 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뛰기 시작한 심장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난 얼른 맘속으로 ‘형이 아니야!’라고 외치며 뛰는 심장을 달래었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왜 그랬을까 싶었다. 난 아마도 현실을 부정하려 했었나 보다. 감당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자꾸만 자신을 속이려 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억지로 쑤셔 넣지 않고 차곡차곡 정리해 두었었더라면, 혹은 쓸 만큼 실컷 쓰고 미련 없이 버려버렸다면, 그 때 난 그를 보고도 가슴 뛰지 않을 수 있었을까. 형과의 좋은 추억을 그저 흐뭇하게 떠올릴 수 있었을까. 그 날 이후로 그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하는 내 욕망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을까....... 그 땐 어렸다고 핑계를 댈 수조차 없었다. 바보같이 자신의 상처도 수습하지 못한 채, 다칠 줄 뻔히 알면서 난 그곳을 또 지나갔다.

  어김없이 난 또 아프다. 그래도 난 여전히 모르고 있다. 어떻게 상처를 매만져야 하는지도. 내가 이런 멍청이란 걸 그는 알까.

  회색 하늘, 꿉꿉한 여름 날 아침. 난 아침으로 커피 한 잔과 마주하며 겨우 아픈 곳을 쑤셔대고만 있었다.

 

 강호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왔다. 집은 그대로인 게 분명했으나 낯설었다. 그래도 한 달 전 나의 행적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체처럼 쭉 뻗어 있고 싶은 마음도, 땀에 젖은 몸을 개운하게 씻어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난 거실 창문을 열었다. 바람은 들어오지 않고 더운 공기만 느껴질 뿐이었다. 하늘은 회색이었다. 흩날림 없는 진녹색의 가로수들이 내려다 보였고 2차선 도로를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음이 조금 들렸다. 사람들은 잘 눈에 띄지 않았다. 눈을 감아 보았다. 잠이 오지도, 피곤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손에 잡히는 것도 없었다. 그저 허망한 느낌이랄까,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그 무언가도 흔적 없이 사라진 듯했다.

  눈을 뜨고 텅 빈 방안을 바라보니 눈앞이 흐려졌다. 곧 눈물은 또르르 뺨 위를 흘러 내렸다.

  ‘너의 마음은 비어있지 않아. 너를 가득 채워주고 있는 그토록 사랑스러운 사람을 왜 외면하려 하는 거야? 그를 찾은 건 너야. 그는 그 자리에 있었을 뿐, 너의 자리에 비집고 들어왔던 게 아냐. 그의 존재를, 그의 의미를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그에게, 너에게 상처를 주려고 하는 거야........’

  내면에서 꿈틀대던 내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것이 나라는 것조차 인정하려 하려 하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를 난 깨닫고 있는 것일까....... 혼란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가 미웠다. 그래도 무엇보다 계속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이 그였다.

  ‘젠장.......!’

  난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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