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은 세라와 단둘이 성 밖으로 외출을 보란 듯이 공작에게 요청했고, 공작은 당연히 허락했다. 본격적인 둘만의 데이트가 시작되었다고 흡족해 하면서 말이다.
하나밖에 없는 손녀에게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리 없는 공작은, 세라의 납치 사건을 계기로 둘의 관계가 확고해졌다고 생각했다.
아론의 감정이 확고해진 것은 맞았다. 문제는 다른 이면의 감정도 생겨버렸다는 사실.
그 날도 아론은 즉흥적으로 가고 싶은 곳이 생겼고, 싫다는 세라를 반 협박으로 데리고 나섰다.
세라에게 승마복을 입으라고 한 후, 말을 각각 타고 두 시간 쯤 간 곳에 수려한 장관이 펼쳐지는 바위산이 있었다.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경사가 심해지니 말들이 거부했다. 거기서부터는 둘의 등반이 시작되고.
“물체와 맞닿은 그림자의 안쪽을 좀 더 어둡게 표현하면 반사광이 더 살아나지. 어둠을 강조하면 빛이 살아나듯. 어둠 속에 있는 빛을 살리기 위해 그림자는 더 어두워져야 해.”
아론이 숨을 고르고 있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예전에 아가씨가 미술수업 때 한 말인데, 기억하세요?”
“그래. 내용은 기억나. 토씨하나까지 정확히 기억하는 너니까 그대로 옮겼겠지.”
“‘어둠 속에 있는 빛을 살리기 위해 그림자는 더 어두워져야 한다.’ 그거 구경시켜 줄게요.”
“또 날 가지고 무슨…….”
해괴한 짓거리를 하려고!
하지만 세라는 말을 조심해야 했다. 그를 자극해서는 안 되니.
그녀의 심장도 이제 단련이 되었으려나.
이유는 함구한 채, 그녀에게 분노하고, 좌절하고, 후회하는 그의 모습은 분명 처절하고 힘들어 보였다. 그러면서 언제까지 되풀이 할지 그 자신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세라에게도 답이 없었다.
아론은 그녀를 해칠 생각은 없는 듯 그저 그 자신에게 자극적인 뭔가가 필요할 때 이따금 그녀를 괴롭히곤 했다.
한 번은 그녀의 발코니에 한 밤 중에 나타나, 문을 열어주지 않자, 곧바로 뛰어 내려 세라를 기절시킨 적도 있었다.
그가 자신의 발목에 이미 줄을 매어 놓은 줄 알 턱 없는 세라는 그날 그가 죽은 줄로만 알았으니.
이상한 낌새에 서둘러 다시 올라 온 아론은 기절한 그녀 때문에 더 놀랐었다.
그 뒤론 좀 더 소소한 짓거리를 찾아 했지 멈추진 않았다.
예를 들면, 날카로운 깔 끝으로 그녀의 피부에 밀착 된 리본을 푼다거나, 가까이 접근한 독사를 잡아 장난치며 약올리기도 하고. 물론 위험한 장난을 하다보면 결국 다치는 것은 세라가 아닌 그 자신이었다.
“날 어쩌지도 못 할 거면서…….”
세라는 낮게 중얼거렸다.
*
바위산에 작은 흙 알갱이들이 미끄러웠다. 세라는 아론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꼭대기까지 가서 날 떨어트릴 생각이라면 그냥 이쯤도 괜찮은데.”
지친 세라의 입에서 무심결에 나온 말이었다.
그 말에 파란 눈이 싸늘해졌다.
실언했음을 뒤늦게 알아 챈 세라는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서둘러 앞장서 올라갔다.
아악!
하필이면, 힘차게 딛고 올라선 다음 행보가 바로 벼랑이었으니.
이리도 빨리 말이 씨가 돼버리고.
몸을 날린 아론은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안도의 숨을 쉬긴 했으나,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임을 그의 눈을 보고, 알아차리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5분 경과…….
10분…….
20분…….
마주 잡은 서로의 손목이 조금 미끄러져 내려갔다. 세라에겐 남아 있는 힘이 거의 없었다.
허공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몸이 이토록 무겁게 느껴질 수가.
살랑거리는 미풍이 폭풍처럼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 본 그녀는 허공의 깊이에 숨이 막혔다.
다시 한 번 간절한 눈으로 위를 올려 보았다.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 싸늘한 눈빛.
아론은 또 다시 장난을 치고 있다. 세라의 목숨을 가지고.
“살려줘.”
“…….”
“제발.”
“…….”
그의 힘이라면 거뜬히 끌어 올리고도 남았을 텐데 아론은 30분 째 그녀를 아찔한 벼랑아래 두고 있었다.
싸늘한 눈동자는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녀를 살려 줄지 그대로 벼랑 아래로 떨어트릴지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기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지만 매순간 확신할 수 없어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했다.
“정말 너무하다.”
“…….”
“ 널 미워하게 만들지 마.”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널 미워하고 싶지 않아.”
체념의 단계에 들어섰다.
넌 내가 포기하기 전엔 살려 줄 생각이 들지 않겠지.
세라는 알고 있었다. 아론이 어느 쪽이든 선택하도록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지만……알지만 죽음의 공포가 두려워 고통을 참아가면서도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버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증오가 커져감을 알았다.
아론의 팔에는, 중력에 저항하며 세라가 만든 손톱자국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벗겨진 피부 사이로 핏방울이 올라와 있었다.
결심이 서자, 심장이 격렬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팔을 잡고 있던 한 손을 허공에 늘어트렸다. 동시에 나머지 다른 손, 그의 손목을 맞잡고 있던 손아귀의 힘을 완전히 풀었다.
그 바람에 아론의 손아귀에 있던, 그녀의 손목이 쑥 미끄러져 내려갔다.
악!
추락을 알리는 비명소리.
그러나 낙하 느낌이 들지 않자, 세라는 눈을 떴다. 아론의 손아귀 안에 그녀의 작은 손이 들어간 채였다.
그도 놀랐는지 무표정했던 얼굴 위로 입술이 열린 채 경직되어 있었다.
“그냥 날 놔!”
“…….”
“다 잊어버려. 고통도 슬픔도……나도.”
“…….”
“그리고 자유롭게 살아.”
한참동안 밑을 향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 그의 머리 쪽으로 피가 몰렸다. 벌겋게 충혈 된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바닥에 생긴 땀 때문에 점점 빠져나가는 그녀의 손이 느껴졌다. 섣불리 들어 올리다가 그대로 그녀의 손을 놓쳐버릴 것 같았다.
다른 한 손은 몸이 벼랑 아래로 쏠리지 않도록 튀어 나온 바위를 잡고 있었다. 그 손을 놓자마자 둘이 함께 추락 할 것이다.
“잡아. 다시!”
아론이 명령했다.
세라가 따르지 않았다. 힘을 뺀 채 몸을 축 늘어트렸다.
“잡으라니까!”
세라는 그를 보지 않은 채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응시했다.
공중에 있는 스스로를 마치 비상 중인 새라고 상상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그럴만한 상상력이 발동되지 못했다.
서서히 그와의 분리가 느껴진다. 두렵다. 이건 감당할 수 없는 고문이었다.
등 뒤에서 서서히 덮쳐오는 공포가 눈앞에 닥친 끔찍함보다 더 감당하기 힘들어 사람들은 기절하곤 한다.
세라도 마찬가지였다. 눈앞까지 다가온 죽음은 매번 온 신경을 무섭게 뒤틀어 쥐어짜며 경련을 일으켰다.
그를 올려다보면 다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손을 올려 매달리고 말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추락에 대한 공포가 감당하기 힘들었다.
“내말 안 들려?”
“…….”
“잡지 않으면…….”
그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다 죽여 버릴 거야. 파갈성에 있는 사람들 모조리 죽여 버릴 거야.”
손의 땀이 둘 사이를 서서히, 빠르게 분리시키고 있었다.
아론이 이제 자신의 손가락만을 붙잡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턱이 잘게 부딪히며 떨렸다.
내 생을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아.
할아버지…….
“세라!”
공포에 절인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도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날 잡아!”
세라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어 올렸다. 그의 손목을 잡으려고 악착같이 있는 힘껏 손을 올렸지만 닿지 않았다.
이제 끝이다.
후회가 남는 선택이었다.
그의 손을 놓지 말 걸. 그의 괴롭힘을 받아들일걸.
그의 얼굴을, 그의 눈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눈꺼풀을 올렸다. 눈물이 솟구쳤다. 시야가 흐려진 사이로 그의 커져가는 눈이 보였다.
“아론……아론……미안해!”
그녀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눈부시도록 반짝이던 작은 소년을 처음 본 날이 눈앞에 펼쳐졌다.
천사가 땅으로 하강하듯.
그와 공부하며 보냈던 시간들.
남자로서 여자로서 서로의 성장을 지켜보던 순간들.
납치된 자신을 구하러 온 그를 본 순간.
그의 어둠이 드러난 첫 순간, 물에 빠진 그녀를 물끄러미 관망만 하고 있던 순간.
그 모든 순간들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처럼.
지금처럼?
그의 짙게 변한 푸른 눈동자가 가까이 있었다. 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그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심각하게 아픈 상태가 아닌 이상 땀을 잘 흘리지 않는 그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톡, 톡 세라위로 떨어졌다.
그의 호흡이 거칠었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직시하기 시작한 세라는 여전히 벼랑 끝에 매달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번엔 아론마저 허공에 거꾸로 대롱대롱 걸쳐진 채였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발끝을 벼랑 끝에 걸친 채로 그녀의 두 팔을 잡고 있었다.
입도 표정도 굳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론이 잠시 깎아지른 절벽 면을 훑어보더니,
“저기, 턱이 보이죠? 거기 내려 줄게요.”
아론은 번갈아 한 손씩 힘을 살짝 풀어 가며, 그녀가 좀 더 절벽에 튀어 나온 턱에 가까워 질 수 있게 해 줬다.
간신히 혼자 서 있을 만한 아슬아슬한 넓이였다.
절벽에 바짝 붙어 아래를 내려 보지 못했다. 절벽 아래로 몸을 끌어당기는 기운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도 허공에서 허우적대던 상태에 비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안전한 장소였다.
세라가 절벽에 잘 붙어 있는 것을 확인 한 아론은 허리를 접어 튀어나온 부분을 찾아 암벽을 잡았다. 벼랑에 걸친 다리를 풀어 몸을 비틀더니 벽에 안착했다.
정말 놀라운 악력이었다.
그는 세라가 있는 곳에 내려오지 않고 안착한 지점에서 그녀를 내려 보았다.
“지금 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요. 당신을 업고 절벽을 오르는 것은 위험하니까…….”
세라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설마, 이대로 나를 두고 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줄이 필요해요. 금방 다녀올게요.”
“아론!”
또 다시 내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걸까?
“금방 올게요.”
그가 세라의 불안을 읽고 있었다.
“정말이지? 또 장난치는 거 아니지?”
“…….”
“또 그러면……흐흑흑.”
늘 꼿꼿한 모습한 보이던 그녀가 최근 아론 때문에 울보가 되고 말았다. 결국 또 눌렸던 감정을 터트렸다.
못 된 아론 때문에 더 이상 세라의 감정엔 철옹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론이 잠시 그녀의 모습을 응시하다가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절벽위로 사라지는 그의 발을 보았다.
천년이 흘러간 것만 같았다. 해가 기울어 지평선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앉을 만큼 여유로운 넓이가 아닌 관계로 계속 서서 절벽에 붙어 있자니 다리의 떨림이 점점 커졌다.
금방이라도 다리가 풀려 꼬꾸라질 것만 같았다.
“아, 아……론.”
힘없는 부름이었다. 크게 외쳐 부르고 싶었지만 우렁찬 소리는 그저 마음속에만 존재했다.
“세라!”
그가 돌아왔다.
“줄을 내려 줄 테니 겨드랑이 단단히 둘러요.”
“왜 이리 오래…….”
그녀는 말을 삼켰다. 자신을 죽이려던 아론이었다. 다시 돌아와 준 것만도 감지덕지인데 늦었다고 타박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 근처는 바위뿐이라 좀 멀리까지 갔다 왔어요.”
그가 줄을 내리며 말했다.
“잡을 수 있겠어요?”
세라는 절벽에 붙여 놓은 손을 뗀 순간, 저 아래로 추락할 것 같아 손을 뻗을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고개조차 돌릴 수 없어 한 쪽만 바라보고 있는데 손을 떼라니. 불가능했다.
아래를 내려다 본 아론은 줄을 걷어 올렸다.
잠시 후, 어깨에 줄을 감은 채, 절벽을 내려오고 있었다. 줄의 한 쪽 끝은 절벽 위 어딘가에 고정 시켜 둔 모양이었다.
세라에게 도착한 아론은 줄을 풀어 그녀의 다리사이에 넣었다가 엉덩이 밑에 감아 고정시켜 주었다.
아까는 겨드랑이에 묶으라더니, 왜 거기에?
“두 사람을 지탱하기엔 줄이 약해요. 올라가서 당기겠습니다. 그때 줄을 꼭 붙잡으면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나무뿌리와 줄기를 꼬아 만든 줄은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벽을 타고 오르는 그를 보고 있었다.
그에게 저토록 간단한 오르내림이 세라에겐 지독히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준비 됐죠?”
그가 줄을 당기자 다시 허공에 몸이……매달린 것은 맞는데 이전과는 다른 편안함이 있었다.
마치 편하게 앉아서 공중 부양하는 기분이었다.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지도 않았고 뼈가 빠지는 기분도 들지 않았다.
허리나 겨드랑이에 줄을 묶었다면 이렇게까지 편안하지 못했을 것이다.
추락의 그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오자, 철푸덕 땅에 주저앉아 기다시피 벼랑에서 멀어졌다.
거친 호흡을 쏟아내는 그가 세라 앞에 섰다.
그의 등 뒤로,
하늘에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의 은발이 꺼져가는 불꽃처럼 흐린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태양은 사라졌지만 흔적이 남아, 산과 들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려놓고 있었다.
그 모호함을 삼키려는 듯 반대편에서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 짙은 어두움 때문에……꺼져가는 빛이 찬란하게 느껴지는 짧은 한 순간.
‘어둠 속에 있는 빛을 살리기 위해 그림자는 더 어두워져야 한다.’
세라는 그 순간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