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얼거리는 콧노래소리의 박자에 맞춰 하급괴물들이 펑펑 터져나갔다. 늘씬하게 뻗은 검은색의 지팡이, 바이스 로젠블랏이 지휘를 하듯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면 은랑이 뭘 하기도 전에 상황종료였다. 요 며칠간 단아는 기분이 좋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약속한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은랑도 설레는 기분이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상황에 대한 생각만 하면 괜히 발끝이 말리고 얼굴이 벌게지는 달콤한 답답함이 꿀처럼 스며들었다. 세상에. 누가 보면 우리 생이별한 연인을 만나는 줄 알겠어. 거의 이산가족 상봉 수준이지. 단아의 말에 은랑은 작게 웃었지만 제윤은 웩, 하고 토하는 시늉을 했었다.
사실 무조건 일이 잘 풀릴거란 보장은 없다. 그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일이다. 다만 짧게 오고 간 메세지에 날이 선 긴장감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감이 차올랐으니 다 괜찮다. 단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잘 모르겠어. 정말 웃긴 것도 같아. 그렇게 치가 떨렸는데도, 막상 만난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정말로. 나 말이야, 정말로 지금 행복해.'
도서관 앞에서 새하얀 눈을 밟으며 단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쩐지 그 말이 익숙한 게 저번에도 했던 말인 것도 같았다.
단아와 은랑, 그리고 제윤은 문자를 받은 날 밤 늦게 두 번째 세계의 도서관에서 만났다. 눈송이가 떨어지는 밖에서 나란히 벤치에 앉은 그들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물론 멀찍이 떨어져 근처 나무에 기대어 서 담배를 물던 제윤은 두 친구와의 작은 실랑이 끝에 거의 억지로 옆에 앉게 된 거였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친근하게 붙어 앉은 제윤은 가만히 저마다의 생각에 잠긴 두 친구를 바라보았다. 여자애들이란, 지나치게 감성적인 존재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였지만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그마저도 묘한 기분이 들어 새하얀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변함없는 눈이 내리는 곳.
사각거리는 펜 소리에 슬쩍 눈을 뜨면 보이던 이들의 얼굴.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꾸벅꾸벅 졸고있는 단아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깨우던 은랑, 그리고 그 모습에 작게 웃던 문지기.
난폭한 일상속에서 가끔가다 찾아오는 잔잔한 시간. 분명한건, 자신은 그게 꽤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뱉어낸 숨에 길게 입김이 빠져나왔다. 그래, 그 여유를 깨고 어디선가 광대가 나타난다. 커다란 눈사람과 함께 말이다. 그러면 잔잔함은 사라지고 소란스러움이 냉큼 자리를 깔고 앉곤 했다.
사실 그 소란스러움도 나쁘지 않았던지도 모르겠다.
은랑은 두 사람과는 다르게 마냥 포근한 추억 속에 잠겨 있지는 않았다. 덤덤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제윤과의 재회를 기다릴 땐 괜찮았는데 문지기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끔찍한 기억이 앞섰다. 굳이 끔찍하다고 표현하자면 제윤의 어머니, 하연이 숨을 거둔 사건이 더 심하겠지만, 피하고 싶은 순간에 대해 거론하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 후의 시간이다.
은랑은 뒤집어 쓴 후드 위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내면서 웅장하게 버티고 있는 갈빛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중앙의 가장높은 곳인 첨탑에서 뻗어나온 기다란 평형의 구조물 끝엔 날개를 펼친 여인의 동상이 있었다.
하얀 입김을 따라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갔다.
* * *
시작은 따분한 잔잔함이었다. 괴물을 차단할 확실한 방법으로 추정되는 '겔샤르의 인'에 대해 알게 된 건 우연히 어느 책 귀퉁이에 적혀진 작은 글귀 덕분이었다. 그 후로 다섯 사람 모두가 도서관에 거의 살림을 차리듯이 모여 책들을 이 잡듯 뒤지고 있었다.
깔끔하던 내부는 경악할 만큼 지저분하게 변해있었다. 책상 하나는 거대한 쓰레기 더미에 점령당해 있었고 바닥까지 휴지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그건 감기로 훌쩍대던 단아의 소행이었다. 여러번 숙식을 해결한 흔적으로 포장음식 껍데기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고 책장 선반에는 주요 정보를 메모한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대저택과도 같은 겨울 도서관을 뒤지는 건 끈질긴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지금 수능공부를 이렇게 해야 할 시기에, 무슨 짓이람? 은랑은 눈가가 뻑뻑해져와서 안경을 벗고 눈을 부볐다.
"피곤하지?"
시선을 돌리자 펜을 놓고 웅크려 자고 있는 단아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문지기가 보였다. 그녀의 옆으론 포스트잇 플래그가 다다닥 붙어있는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징징대긴 해도 단아의 일 처리능력은 확실히 빨랐다. 문제라면 체력이 금방 방전된다는 거지. 은랑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웃음기를 담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전해졌다.
"많이 졸려? 너도 조금 자는게 어때."
"글쎄, 그렇게 졸리진 않아서."
그렇게 답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이불을 깔고 편하게 뻗어자고 있는 광대를 툭툭 발로 쳐서 깨웠다. 부릅 뜬 눈이 그려진 안대를 하고 있는 꼴이 어쩐지 괘씸했다. 번쩍 들린 손이 익숙하게 그녀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그러면 그녀 또한 익숙하게 그걸 탈탈 탈어낸다.
"우주야. 일어나."
썩 다정하지만은 않은 목소리로 문지기가 다가와 은랑의 발을 잡은 광대의 손을 매섭게 떼어냈다. 그러면서 손에 힘을 줬는지, 광대가 '아야야' 소리를 내면서 다른 손으로 안대를 내렸다.
"…자기야, 깨우는 방법이 잘못됐잖아. 좀 다정한 방법도 있잖아, 고전적인 키스라던가."
자다 일어나서 하는 말이라곤 역시나 미친소리다. 문지기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방금 전 실언은 잠결이라고 생각하고 참작해줄게, 거기서 더 나가면 재미없을거야. 그러니까 당장 일어나."
"어유, 무서워라. 들었어 부인?"
안대를 턱 끝까지 내린 광대가 실실거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랄도 참 가지가지한다."
떫은 표정의 은랑의 대답에 광대는 아랑곳않고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나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이불에 거의 파묻힌 단아를 보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가 이불을 휙, 걷어내고는 신나게 깨우기 시작했다.
"달링, 달링. 일어나봐. 나 일어났단 말이야, 응?"
"시끄러워, 개새끼야!"
광대는 순식간에 날아든 책에 얼굴을 얻어맞았다. 저 쪽 책상 끝에서 졸고있던 제윤이 소음에 참지 못하고 일어나 그를 향해 냅다 책을 던져버린 것이었다. 어쨌거나 덕분에 다섯 사람 모두가 눈을 뜨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더이상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단아는 입을 비죽내민채로 단잠을 깨운 광대를 노려보았고 제윤은 신경질이 났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가서 담배를 물었다.
"도저히 안되겠어."
입을 꾹 다물고 주변을 멍하게 바라보던 은랑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우리 청소부터 하자."
드디어 터질게 터졌다. 본디 결벽증 기질이 있던 은랑이 이정도 참은 것도 용한 일이었다. 살며시 자리를 피하려던 제윤도, 청소는 그래도 싫다며 항변하던 광대도 매서운 은랑의 짜증에 결국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언니, 나는 빼주면 안될까?"라며 시작 전엔 징징거리며 알량한 애교공세를 퍼붓던 단아도 막상 청소를 시작하니 빨리 끝내버리고 싶었는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여 생각보다 청소는 일찍 끝이났다. 마지막으로 공기정화를 위해 창문을 활짝 열었다. 거대한 창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이 닥치자 내부의 온도가 조금씩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단아는 창문턱에 걸터앉아 손목에 걸린 팔찌를 원형으로 되돌렸다. 바이스를 살짝 흔들자 촘촘히 밧줄처럼 엮여드는 문장 하나가 지팡이를 휘감아 돌고 있는 게 드러났다.
"세상에, 바빠도 그렇지 캐스팅도 안 해 두다니!"
근래엔 괴물사냥이 드물긴했다. 그동안 그들이 열심히도 휘젓고 다녔으니, 이 주변 괴물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게 분명했다. 겔샤르의 인이란 걸 실현할 수만 있다면 아예 괴물의 접근을 차단할 수 있을테니 편안히 수능공부에 매진할 수 있을 터였다.
단아는 익숙해져 거의 눈을 감고도 외울 칼날의 인을 한 번, 화살의 인 하나, 그리고 방패의 인을 한 번 그려 바이스에 그대로 흡수시켰다. 그러자 기다란 문장 하나와 세 개의 인이 물고기처럼 유영하듯 바이스를 타고 움직였다. 이제 캐스팅 할 수 있는 마법은 하나 뿐이다.
어떤 걸 해야하나 고민하며 손에 힘을 빼고 바이스를 까딱까딱 거리다가 공중으로 한 번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했다. 다시금 바이스가 그녀의 손을 떠나 공중에 떠오르는 순간, 새하얀 무언가가 휙, 하고 날아와 그것을 물고 포르르 날아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
어어? 잠깐 입을 쩍 벌려있던 그녀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 지도 모르고 크게 외쳤다.
"시발 도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