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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도전! 에스퍼 리그
작가 : 은백
작품등록일 : 2016.10.28

수십 억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초능력 배틀 스포츠!
그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은 소년소녀의 작고 거창한 이야기

 
프롤로그 - 우상의 추락
작성일 : 16-10-28 20:32     조회 : 668     추천 : 1     분량 : 8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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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이 순간을 기점으로, 에스퍼 리그를 떠나겠습니다.”

  “…….”

 

  이 세상의 공명 활동이 모조리 정지한 듯 의미심장한 정적이 흘렀다. 기자들은 목전에 버티고 있는 정장 차림의 젊은 남성이 지극히 평탄한 목소리로 엄청난 소리를 해대는 걸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신문 1면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할 수 있는 특종거리를 두고도 이만한 이질감을 느끼는 건 너 나 할 것 없이 처음이었다. 초단위로 쉴 새 없이 터지던 카메라 플래시 역시나 작동을 중지했다. 일동 침묵.

 

  길고 긴 정적을 깨부순 건 뒤늦게 발동이 걸린 기자들의 직업정신이었다. 방해물로 꽉 막혔다가 일시에 트인 물꼬처럼 질문이 쏟아진다.

 

  “아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패러독스 선수!”

  “이게 웬 청천벽력 같은…….”

  “이 판에 싫증을 느끼신 건가요?”

  “마스터즈 플랜의 프런트 측과 이야기가 된 겁니까?”

  “딱히 부진한 기간도 없었는데, 혹시 데스페라도 사건 때문입니까?”

  “설마 아직도 헤일로 엔터테인먼트와 노아즈 아크 측의 음모론을 주장하시는 건가요? 마리오네트 선수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데요.”

  “음모론 부정과 이미지 실추에 대한 불만 표출입니까? 아니면 명확한 증거라도?”

 

  청년은 입이 두 개 달려있어도 일일이 답변하기 힘든 질문 쇄도에 대응하기 벅찼는지, 혹은 애초에 상대할 생각이 없었는지 계속해서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그리고 기자들이 제풀에 지쳐 조금씩 잠잠해지자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한 마디를 내놓았다. 그간 뛰어온 무대와 작별을 고하는 프로 선수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고저 없이 평탄한 어조였다.

 

  “짧은 기간이나마 부족한 저를 응원해주신 팬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증강현실 초능력 배틀 게임 ‘헤일로 비전’으로 여러분께 보여드릴 수 있는 모습은 이미 다 보여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평생 꿈꾸지만 거의 다다르지 못하는 정상의 근처까지 운 좋게 올라봤으니 더 이상 욕심도 없고요. 무엇보다 전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습니다. 제38회 에스퍼 리그 준우승 팀 마스터즈 플랜 소속 선수 패러독스가 아니라, 밑천도 백도 없는 평범한 24살 청년 패러독스로서 말입니다. 그간 이 판에 몸담으면서 과분하게 챙겨온 상금과 연봉은 제13지구 관리국에 기부했습니다. 비록 푼돈이지만 제13지구 주민들의 복지에 꼭 보탬이 됐으면 합니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진실은 언젠가 밝혀집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비장함으로 채색된 마지막 한 마디를 끝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자타공인 아르카디아 최악의 낙후 지역인 제13지구에서 배출한 전대미문의 스타플레이어 ― 패러독스의 자청으로 이루어진 공식 기자회견은 이 말과 함께 끝을 맺었다.

 

  정든 매니저와도 씁쓸한 작별을 끝냈다. 마치 불법 도박장이나 조직 폭력배의 아지트마냥 지하에 꼭꼭 숨겨진 개인 숙소의 문을 나서면서도 패러독스는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어지간한 그라도 막상 무명 시절부터 고락을 같이 해온 매니저와 헤어지자니 쉽사리 미련을 끊을 수 없었다. 그 매니저는 4년간 골치 아프기 그지없는 패러독스의 빡빡한 일정을 이리저리 조율하며 절묘하게도 그 바쁜 일과가 저녁 8시에는 반드시 끝을 맺을 수 있도록 했으며, 심지어 플레잉 코치와 멘토 역할까지 자진해서 훌륭하게 해내며 패러독스가 일류 선수로 거듭나는데 일조해왔다. 그런 그와의 작별이 의미하는 점은 형언할 수도 없이 컸다.

 

  이제 에스퍼 리그와의 모든 인연을 끊어낸 것이다. 서글퍼하며 재고와 복귀를 호소하는 팬들의 눈물까지 일일이 닦아줄 의무는 없으니까.

 

  패러독스 자신도 지하 숙소를 떠날 준비를 끝마쳤다. 중간 사이즈의 캐리어 하나에 넉넉히 들어갈 만큼 조촐한 짐만이 그의 유일한 길동무였다. 이삿짐센터도 필요 없다. 집을 옮기는 게 아니라, 집을 아주 버리고 떠나는 것이니만큼. 마침 이 제13지구라는 동네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동정심을 끌어 모으는 빈민촌이다 보니 마땅한 집도 없어서 길가를 전전하는 주민은 차고 넘칠 것이다. 까짓것 기부하는 셈 치지, 뭐.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굳게 닫힌 목제 여닫이문의 문고리에 손을 댄다. 자수정을 연상시키는 보라색 양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 문을 나서는 순간을 기점으로 과거의 자아, 에스퍼 리그의 슈퍼스타이자 제13지구의 영웅 칭송을 받던 패러독스는 사라진다. 한낱 옛 영광의 껍질을 내버리기가 이렇게 힘들었던가.

  어느새 자신이 주저하고 있음을 감지한 패러독스는 아직도 유약하고 나태한 마음가짐만 고수하려드는 본능에 일침을 가하듯이 제 왼쪽 가슴을 주먹으로 힘껏 쳤다. 통각 신경이 찡한 고통을 호소했지만 도리어 속은 후련해진 느낌이 들었다.

 

  자, 그럼 가는 거다.

 

  오른 손등에 핏줄이 설 만큼 문고리를 힘껏 쥐고 천천히 비튼다. 연륜이 지긋한 목제 문이 조금씩 열리다가 아귀가 안 맞는 부분에서 덜컥 내려앉았다. 수백, 수천만의 동경을 한 몸에 받으며 무한에 가까운 영광을 구가하던 스타의 숙소치고는 소박하다 못해 기이할 만큼 낡아빠졌다. 일류 스타나 재벌에게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속물근성과는 광년 단위로 떨어진 그 특유의 가치관 탓일까.

 

  서서히 어두침침한 바깥이 드러난다. 마지막 외출이라고 눈여겨볼 풍경도 아니다. 어차피 여긴 콘크리트 벽으로 위장한 가건물의 지하. 자기를 반겨줄 존재라 봐야 지상으로 올라가는 석조 계단과 철제 난간, 소화기뿐이고 찾아올 사람은 …….

 

  “어딜 가는 거예요?”

  “…….”

 

  있었다.

  야구 배트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패러독스는 내딛으려던 발을 멈추고 목전에 당당히 버티고 있는 불청객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그리고 전체적인 인상과 안면 구조까지 파악하자 이번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차 격통까지 밀려왔다. 그 어떤 깜짝 이벤트라도 저리가라 할 만한 임팩트다. 이게 만약 몰래카메라라면 여기에 수고를 들였을 스태프의 노고에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팔다리를 큰 대(大) 자로 뻗어 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자는 바로 어릴 적의 자신. 아니, 그렇게 착각할 만큼 그때의 자신과 꼭 빼닮은 소년이었다. 특히 이목구비의 배치는 정밀한 광학 기기로 스캔한 게 아닌가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혹시 어릴 적 결별한 쌍둥이인가? 설령 평생을 함께 해온 친부모라도 자신과 구별해낼 수 없을 만큼 흡사한 외모에 패러독스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

  다만 패러독스와는 차이점을 두기 위한 제 나름대로의 노력인지 패션과 스타일에서만은 확연한 차이가 드러났다. 패러독스의 머리는 청순한 콘셉트의 미녀처럼 부드러운 윤기가 흐르고 자연스럽게 길러 발목 부근까지 늘어뜨린 생머리다. 특이점을 찾자면 마치 자로 재어 반분하듯이 머리의 중앙 부근을 가르고 있는 경계선. 그 선을 기점으로 좌측은 유려하고 반짝이는 은색으로, 우측은 먹처럼 짙은 칠흑으로 채색돼있다. 신비로운 보라색 눈은 영롱하게 반짝이고 피부는 뱀파이어마냥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어딜 떠나려는 거예요, 도대체? 당신이 없으면 마스터즈 플랜은 뭐가 돼요? 언젠가 챔피언 자리에 오르길 염원하던 팬들의 마음은요? 아직 은퇴할 시기도 한참 멀었으면서!”

 “…….”

 

  눈앞의 소년은 꽤 특이했다. 우선 파라핀 소재로 만든 두피 위에 불꽃이라도 붙인 것처럼 하늘을 향해 날을 세운 적발이 돋보였다. 눈 역시 머리색과 유사하여 잘 가공한 루비처럼 빛났으며 피부색은 잘 익은 밀가루 반죽마냥 노릇노릇했다. 그 외에도 편하게 개조한 흑색 정장 차림의 자신과는 달리 검은 반소매 셔츠 위에 노란색 라이더 재킷, 스키니 진 조합의 캐주얼한 옷차림이었는데, 몇 달간 한 번도 빨지 않은 것처럼 얼룩이 잔뜩 지고 볼품없이 꾀죄죄한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물론 이 빈곤하기 짝이 없는 동네에서는 자신처럼 깔끔하게 차려입는 쪽이 오히려 별종이지만.

 

  그리고 체구가 상대적으로 작은 편에 속하는 패러독스보다 덩치도 아담하고 키 또한 약 5∼6cm 가량 더 작아 보인다. 짐작컨대 나이는 높게 쳐야 16살 정도일 듯하다. 거기다 묘하게 중성적인 느낌이 났다.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5:5 비율로 어울려 기막힌 조화를 이룬 모습……. 그래, 소년과 소녀의 중간 단계가 있다면 딱 이런 모습일 터다. 생긴 건 붕어빵인데도 시종일관 차갑고 무거운 분위기만 고수하는 자신과 인상만은 천지차이다.

 

  소년의 작고 예쁜 루비색 눈에는 성나고 슬픈 기색이 혼재해있었다. 아마도 패러독스의 열렬한 팬인 모양이다. 아니, 언론에 단 한 번도 공개된 적 없음은 물론 그 존재 자체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 패러독스의 개인 숙소를 뻔히 알고 있다는 시점에서 이미 팬의 수준은 아득히 넘어선 광신도라는 의미다. 평범한 라이트 팬이라면 멋모르고 소속 팀인 마스터즈 플랜의 단체 숙소를 찾아갔다가 허탕만 치고 돌아갈 텐데.

  도대체 언제부터 뒤를 밟은 걸까?

 

  이 빌어먹을 판은 정말 마지막까지 쉽게 보내주지 않는구나. 패러독스는 한탄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기자랑 매니저에 이어서 이번엔 팬까지 말썽이군. 좀 박수칠 때 떠나자.

 

  “그렇게 뻔한 질문은 이미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었다. 이만 해라.”

  “아니, 왜 초면에 무례하게 반말이죠? 꼬마라고 무시하는 거예요? 아니거든요, 16살이거든요! 다 컸거든요! 아니, 그보다 그 건방진 성격이 콘셉트가 아니라 진짜였나요!”

  “사전 예고도 없이 남의 은신처에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소리부터 지르는 네놈은 퍽도 성자로군.”

  “……크윽! 몰라요! 어쨌든 은퇴는 안 돼요!”

  “말문이 막히니까 생떼부터 쓰는 품이 어린애 맞잖나. 방해된다. 비켜라.”

  “싫어요! 차라리 갈 거면 절 죽이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퍽 하는 둔탁한 타격음이 소년의 영 좋지 않은 곳에서 났다. 곧이어 소년은 불쌍하게도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잠겨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무심한 무릎차기 한 방에 소년을 KO시킨 패러독스는 캐리어를 이끌고 소년 옆을 유유히 지나갔다.

 

  “우으으으으윽, 이 순간만큼은 사나이가 울어도 된다던데…….”

  “애 보는데 지장은 없을 거다.”

  “으으, 무슨 헛소리에요. 여기랑 애가 무슨 상관이에요? 여긴 소변보는 데라고요…….”

  “…….”

 

  패러독스는 천연기념물이라도 보는 눈빛으로 소년을 흘겼다. 구제불능의 녀석이로군. 왜 하필 저런 놈이 나랑 닮아서.

  그 붉꽃 머리의 괴짜 소년을 뒤로 한 채 패러독스는 태연자약하게 첫 계단을 밟았다. 이제 바깥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여기에 돌아올 일은 없어진다. 처음에 이 결정을 내렸을 때는 속으로 막연한 공포에 시달렸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니 오히려 가슴속이 후련해졌다.

 

  그래, 난 옳은 길을 가는 거다. 비겁한 돼지가 되느니 떳떳한 인간이 되는 거지. 속내 사정을 다 알고도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상관없어. 이 선택이 바로 내가 에스퍼 리그를 순수한 의미로 사랑하는 증거이자, 썩어 들어가는 에스퍼 리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니까. 내가 젊음을 통째로 들어 바친 끝에 크게 부흥시키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이게 오히려 손을 더럽히는 결과를 낳을 줄이야. 인생사 새옹지마로군.

 

  그렇게 깊은 감상의 바다에 잠겨들던 패러독스는 곧이어 눈살을 찌푸렸다. 딱히 무언가 켕기는 건 아니다. 다만 쇠고랑이라도 찬 듯 왼쪽 발목이 무거워진 탓이다. 감촉과 무게, 그리고 정황을 미루어 범인이 누군지는 뻔했다. 패러독스는 이번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위협했다. 좀 전과는 달리, 듣는 이의 청신경에 주름이 지게 할 만큼 섬뜩한 어조였다.

 

  “좋은 말 할 때 놓아라.”

  “싫어요! 싫다고요! 싫어―!!!”

 

  하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았다. 생떼인 건 여전했지만 이번엔 진지함이 가득 묻어나오는 호소를 토해낸다.

 

  “패러독스, 진지하게 들어줘요. 난 진짜 뭣도 아니에요. 제13지구에 개미처럼 들어차있는 수천만 인구 중 한 명이고, 아직 어른이 되려면 3년이나 남은 애송이에요. 그나마 좀 할 줄 아는 거라곤 헤일로 비전뿐인데 솔직히 특출한 실력도 아니고요. 그래도,”

 

  그때, 고집 세보였던 소년의 루비색 눈에서 투명한 액체가 주르륵 흘렀다. 단번에 봐도 감격, 절규, 행복, 좌절, 이해관계와 갖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겹쳐 이루어진 성숙한 슬픔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사주지 않았을 때, 맛있게 먹던 과자를 빼앗겼을 때 아이가 짓는 표정. 그 어떤 여과나 꾸밈도 없이 본연 그대로 드러난 감정.

 

  순수한 슬픔.

 

  “그래도, 당신은 내 우상이자 은인이라고요! 저한텐 부모님도 없어요. 어려서부터 보육원에서 자랐는데 사교성이 바닥을 기어서 친구도 없고, 성격도 유치하고 애 같다고 놀림 받고 살았어요. 그런데 14살 무렵부터 갑자기 주변인들한테 엄청난 관심을 받기 시작했어요. 제가 잘나서 그런 것도, 사고를 친 것도 아니에요! 왜인지 아세요? 에스퍼 리그의 스타플레이어인 패러독스와 꼭 닮았다는 이유만으로요!”

  “…….”

  “당시 저는 영상 매체랑 거리가 멀어서 패러독스란 사람은 물론이고 에스퍼 리그도 뭔지 몰랐어요. 사실 관심도 없었고 평소와 다름없이 외로운 일상만 보내고 있었는데 재작년 원내 축제에서 에스퍼 리그를 소재로 연극을 하기로 했어요. 전 당신 역을 맡게 됐죠.”

  “…….”

  “그리고 애들은 이렇게 밥상까지 차려놨는데 제대로 못하면 패버리겠다고 협박했어요. 그때 전 단순히 얻어맞기 싫어서 생애 처음으로 에스퍼 리그 관련 사이트를 뒤져봤어요. 그리고 당신의 경기 영상만 챙겨보면서 대사랑 행동을 달달 외우다시피 했죠. 그러다 보니 차츰 커뮤니티를 방문하면서 헤일로 비전이라는 스포츠, 에스퍼 리그라는 대회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갔고 당신이 얼마나 영향력 있는 선수인지도 깨달았어요. 제가 잘 한 일은 없지만 괜히 뿌듯해지더라고요. 바보 같은 이유지만…….”

  “…….”

  “정말 엉뚱한 계기이긴 해도 전 그때부터 자신감을 찾았어요. 연극 조가 반에 모여서 연습할 때 애들에게 처음으로 칭찬이란 걸 들었고요, 어엿한 친구도 여럿 생겼어요! 그리고 축제날, 연극에 대한 반응은 호평 일색이었어요. 그때부터 전 원내에서 나름 인기인이 됐고 그때부터 당신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꿈을 품었어요. 아르카디아 전역을 통틀어서 제일 낙후되고 인구수도 적은 제13지구의 악조건을 뚫고 어엿이 준우승 메달을 목에 건 당신처럼요. 아직은 어려서 자격이 안 되지만 꾸준히 헤일로 비전 연습을 해서, 성인이 되면 에스퍼 리그 지역 예선에 도전하려고 준비 중이에요.”

  “…….”

  “보육원장 엘피스는 제 초능력이 너무 빈약하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저한테 진로를 다시 생각해보라며 설득했지만 저는 패러독스 당신이 은퇴라도 하지 않는 한 의지를 굽히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래서 훈련에 훈련을 반복한 끝에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다고요! 그러자 엘피스도 끝내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어요. 대신에 그 고집의 원동력이 뭐냐고 묻더군요. 전 주저 없이 당신이라고 대답했죠.”

  “…….”

  “그래요, 패러독스는 제 유일무이한 인생의 롤모델이자 희망의 끈이에요.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은 비단 저뿐만이 아닐 거예요. 특히 제13지구에는 차고 넘칠 거라고요. 당신의 은퇴는 그 사람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과도 같아요. 그러니까…… 부탁이에요! 떠나지 마세요! 아직 늦지 않았을 거예요! 공식 발표라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았고, 표명한 입장을 철회하면 그만이잖아요! 팀 동료들이랑 팬들도 좋아할 거예요! 제발, 제……!”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목이 메어서 끅끅대는 신음만 계속될 뿐.

  붉은 머리의 소년이 흘린 눈물은 어느새 울퉁불퉁한 콘크리트 바닥의 굴곡에 고여 조그마한 웅덩이를 여러 개 이루고 있었다. 퉁퉁 부은 어린 눈이 이미 오래 전에 식은 줄 알았던 가슴을 새삼 아리게 만들었다. 패러독스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손은 이미 한참 전부터 악력이 빠져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패러독스는 소년의 절규에 가까운 호소에서 발목이 붙잡힌 것 이상의 인력을 느꼈다. 단순히 동정에 우러난 망설임이 아니다. 한겨울의 얼음처럼 차갑고 딱딱한 눈매가 조금 풀렸다.

 

  ‘정말 그때의 이 몸이랑 똑같군. 순진해 터진 거랑, 쓸데없는 갈망에 추태까지 합쳐서.’

 

  이대로 모른 척하고 지나가기가 힘들다. 자기답지 않다고 책망하면서도 패러독스의 손은 어느새 자신의 목덜미를 향하고 있었다. 마치 병약한 여자처럼 가냘프고 새하얀 그 목에는 비단 재질의 푸른 띠가 걸려있고, 손으로 천천히 벗겨내자 품속에서 육망성이 부조된 은색 메달이 차차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은 이미 패러독스가 마음을 되돌릴 리 없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한 건지 반쯤 포기한 상태로 바닥에 이마를 대고 흐느끼고 있었다. 그런 소년의 머리맡에 새된 금속음을 내며 무언가가 떨어졌다. 소년은 호기심에 그저 시선만 흘기다가 그 물건의 정체를 알아채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흐느끼는 와중에도 청산유수처럼 쏟아내던 말까지 더듬는다.

 

  “유, 유토피아? 화, 화, 화면으로만 보던 에스퍼 리그 준우승의 상징…….”

  “이젠 네 거다.”

  “뭐라고요?”

 

  패러독스는 그제야 소년의 부들부들 떨리는 손아귀에서 발목을 빼내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소년은 왠지 쓸쓸해 보이는 자기 우상의 마지막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만 볼 뿐, 좀 전처럼 생떼와 고집으로 붙잡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다고 무의식중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석고상처럼 굳어서 당최 움직이질 않았다.

  이대로 떠날 듯하다가 역시 뒷맛이 찝찝했는지 그는 말을 덧붙였다.

 

  “네가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우상 패러독스가 에스퍼 리그의 스타플레이어로 군림하던 영웅이라면 그 안에 있으니까, 데리고 있든 지지든 볶든 네 마음대로 해라. 이 몸은 이제 단순한 껍데기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이죠?”

  “갖고 있다 보면 언젠간 알게 될 거다.”

  “…….”

  “그리고 조만간이든 먼 미래든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군. 아마도 반가운 일은 결코 아닐 듯하니까.”

 

  이 모호한 말이 무엇을 암시하려는 것인지 소년은 곱씹어볼 새도 없었다. 유토피아의 찬란한 광채와 부조에 잠시 정신을 팔린 사이에 패러독스는 소년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소년은 발을 재촉해 계단을 박차고 올랐지만 지하에도 지상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본래 주인이 영원히 자리를 비운 그의 숙소, 그리고 불꽃머리 소년의 머릿속에는 허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유일하게 그 공허함을 채워주는 존재는 차갑게 식은 채로 소년의 손에 꼭 쥐어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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