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당의가 후레쉬를 비춰 원길의 눈동자를 확인했다. 전혀 반응이 나타나
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
"회장님이 약을 잘못 복용한 적이 있습니까?"
"약..이요?"
"저번 약물검사에서 마약 양성반응이 나왔습니다."
"그.. 것 때문에 못 깨어나시는 건가요?"
"글쎄요. 신경쇠약에 플러스된 원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못 깨어나나요?"
"걱정마세요. 일시적인 현상일 겁니다. 이런 환자분들 더러 봐왔는데 삼
일 내지 일주일이면 깨어납니다."
미령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내 기운이 빠져 의자에 덜썩 주저앉았
다.
"환자 간호하시느라 피로하신가보네요. 좀 쉬세요."
"괜찮아요....."
중환자실 간호부스에서는 나이트 근무 교대자와 인수인계하느라 바빴다.
미령이 간호사들을 대신해 환자의 자세를 바꿔주었다. 젖은 물수건을 닦
아내며 욕창이라도 걸릴까봐 걱정했다.
"원길씨... 조금 지나면 예전처럼 깨어날 수 있대요... 그때까지 참아
요..."
"나 당신 깨어나면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꼭 들어줄래요? 원길씨 회사
일 그만두게 하고 어디 조용한 데서 살고 싶다고 조를 거에요.."
"내년엔 이 모든 기억이 펑하고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밀레니엄 축제 같
이 봐요... 그때까지 원길씨한테 죄를 빌게요..... 용서해줘요...."
미령은 마치 대화라도 하듯이 주절주절 말을 걸었다.
"수건 빨고 올게요."
미령이 수건과 세제를 가지고 일어서는데 한쪽으로 세워져 있는 휠체어
가 보였다. 쓸쓸히 휠체어를 손가락으로 스치듯 만졌다.
간호사들은 저들끼리 떠드느라 신경쓰지 않았다.
복도 불빛이 어두침침해서 미령이 잠깐 위를 올려다봤다. 탁. 맞은편에
서 걸어오던 남자와 어깨가 부딪쳤다. 수술 가운을 입은 남자. 의사인
가... 미령이 죄송스러워 고개를 숙여 표현했다. 남자의 동공이 살짝 커
지다 비켜섰다. 스쳐지나가던 미령이 갑자기 멈춰섰다.
은은한 향수..... 익숙한 이 향.... 성현의 향수야....
미령이 돌아봤을땐 남자가 이미 사라지고 없을 때였다.
내가 예민해진거야......
미령이 고개를 젓고 피로한 눈을 비볐다.
수술 가운을 입은 남자가 중환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간호사들은 아
예 이쪽을 쳐다보지 못했다. 남자가 터벅터벅 구석 침대로 걸어갔다. 커
텐을 치고 그 앞에 앉았다. 마스크를 벗는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
름 아닌 성현이었다.
"눈 뜨고 날 봤다면 좋았을 것을... 이거 아쉽네. 이만 가줘야겠
어......"
잠든 원길은 어떤 반항도 없었다.
"내 어머니를 버리지 말았어야 했고, 날 인정해줘야했어!!"
"................"
"너의 목숨도 내겐 부족해. 이렇게 끝나는 걸 행복하게 여겨. 저승에서
니 아버지와 춤을 추던 파티를 하던 즐겨보라구! 더러운 인간들....."
성현이 주머니에서 면도칼을 꺼냈다.
산소마스크 호스를 만지다 착 끊어버렸다. 원길이 가슴이 부풀어올라 숨
소리가 커졌다. 성현은 다시 마스크를 쓰고 커텐을 열고 나갔다. 간호사
가 봤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성현이 나가고 얼마 후 중환자실은 소란스러
워졌다. 미령도 그만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