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형 SUV는 꽤나 많은 골목을 지나쳤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은 미로 같은 곳에서도 꿋꿋이 화살표를 나타내며 목적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현장은 큰 도로 옆 골목으로 들어가 4번째 골목을 지나 5번째 골목이 시작되는 초입 부근에 있었다. 골목엔 수많은 상가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하지만 이미 노래방이 위치해있는 상가는 입구에 노란 테이프가 덕지덕지 둘러져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현장에는 아직도 검은색 조끼에 ‘과학수사대’라고 적힌 감식반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형식과 이형사가 강남서에서 나왔다고 하자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꽤나 협조적이었다. 현장은 여태 사건들과 비슷했다. 같은 회사의 주방용 식칼. 가슴과 복부 총 2개의 자상. 지문도 없고 족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전과 다른 점이라면 이번 피해자는 여성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피해자 역시 전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살해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말 그대로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묻지 마 살인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매서운 눈매에 매부리코. 긴 얼굴에 사각 턱을 가진 강서구 형사가 담배를 태우고 있는 형식에게 물었다.
“뭘 말입니까?”
창현이 되묻자 남자 역시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이번 사건 말입니다. 보내주신 자료는 읽어봤는데 이건 뭐 방법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보통 놈이 아니란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협조고 뭐고 뭐가 나와야 수사를 할 것 아닙니까. 도대체가 생각이 있는 건지 정말. 이게 우리만 뺑이 돌린다고 없는 게 나오는 것도 아닌데 위에선 죽어라 우리만...”
하지만 형식은 이미 남자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골목초입 사건 현장을 보고 있는 누군가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인조적인 검은색 머리. 짙은 눈썹에 다른 사람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이목구비. 형식은 이상했다. 형사 생활만 10여 년. 경찰대를 졸업하고 꾸준히 형사 생활만 해왔다. 저런 아리따운 여자는 범인이건 참고인이건 뭐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낯이 익은 걸까.
그리고 그 옆으로 또 특색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더운 날씨에 짧은 반팔을 입었지만 팔에 허벅지가 달려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남자였다. 얼굴엔 모자와 검은 스포츠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뒤 저 멀리서 아주 눈에 익은 남자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큰 키에 특징 없는 얼굴. 밋밋한 코. 하지만 위로 봉긋 솟은 입술에 태평양처럼 넓은 어깨. 그리고 그 옆으로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남자까지.
형식은 아직도 절반이나 남은 담배를 바닥에 던져 끄고 황급히 일어섰다. 옆에서 말하고 있던 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래서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저기요?”
형식은 곧장 접근금지 테이프를 넘어 달리기 시작했다. 현장을 수색하고 있던 이형사도 갑작스레 달려 나가는 형식을 발견하고는 곧장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선배님!”
갑작스레 일어난 광경에 현장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좌우로 길을 비켜주었다. 형식은 빠른 속도로 맞은편 골목으로 접어들었지만 퇴근 시간 서울의 먹자골목은 그렇게 쉽사리 지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사람을 밀치며 형식은 열심히 앞으로 나아갔지만 골목의 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신이 찾던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뒤이어 나타난 이형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타나 물었다.
“선배님. 무슨 일이세요? 뭐라도 보셨어요?”
형식은 자신을 향해 물어오는 이형사의 물음에 불현듯 무언가가 머릿속을 지나갔다. 조금 전 그 여자.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떠올랐다. 바로 2년 전 이창현의 뒤를 밟다가 발견한 여자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형식은 다시 뒤를 돌아왔던 길을 힘겹게 되돌아갔다. 하지만 역시나 여자와 남자 모두 사라진 뒤였다. 형식은 바닥을 향해 거칠게 발길질을 하며 외쳤다.
“이런 제기랄!”
*****
북적거리는 식당 안 사람들 앞에는 하나같이 뚝배기가 하나씩 놓아져 있었다. 어떤 테이블엔 고기가 잔뜩 올라간 타원형의 접시와 세상의 고민을 잊게 해줄 초록빛의 소주가 있었다.
그런 식당 안 왼쪽 제일 구석 정수기가 있는 바로 옆 테이블에 형식과 반장이 앉아 국밥을 먹고 있었다. 다른 테이블과는 달리 딸랑 국밥 그릇 두 개였지만 형식은 세상 맛있는 음식을 먹는 듯 열심히 먹고 있었다. 그와 달리 반장은 깨작거리며 형식을 보고 있었다.
“형식아.”
“예. 반장님.”
형식은 깍두기를 집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반장의 눈빛을 본 형식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체하겠네.”
“그 여자 찾지 마라.”
“제가 누굴 찾는다고 그러세요.”
형식의 시치미 떼는 말투에 반장의 눈빛은 오히려 더 차분해졌다.
“내 꼴 나기 싫으면 그만둬라.”
“반장님이 왜 어때서요?”
“네가 저번에 말했듯이 우리 서에서도 알 사람은 다 안다. 아니 그때 경찰직에서 있었던 사람이라면 다 알 거다. 내가 왜 진급도 못 하고 만년 반장이 됐는지.”
*****
2008년 내 나이 39. 나는 롤러코스터를 탄 듯 빠른 속도로 진급을 해나가고 있었다. 경찰대학의 수석 졸업과 운 좋게 맞아떨어진 성과들은 내가 경찰청으로 들어가는 길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본청에 들어가기 위한 점수들만 채운다면 이제 이 지겨운 지방 생활도 청산할 수 있었다. 아내는 무리하지 말라고 나를 다독였지만, 이미 가속페달을 밝아버린 나에겐 더 이상 브레이크란 것은 없었다. 남들보다 많은 근무시간과 그에 따른 실적이 나의 삶의 목표였다. 그 실적들이 나를 본청으로 이끌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덕분에 나는 경기 외곽의 경찰서에서 나름의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다. 큰일을 할 사람이라며 윗사람들은 나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줬고, 아랫사람들은 질투 섞인 눈빛과 부러움의 눈빛 그리고 존경의 눈빛은 한껏 나 자신에게 취하게 만들었다.
승진심사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가을날 드디어 나에게 올 것이 왔다. 바로 서장님의 부름이었다.
‘이민재! 서장실로 가 봐.’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이 얼마나 기다리던 서장님의 호출인가.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단숨에 서장실로 향했다.
‘똑 똑 똑’
‘서장님 이민재 계장 왔습니다.’
‘들어와.’
서장님의 들어오라는 말이 마치 나에겐 본청으로 들어오라는 말로 들렸다. 문이 열리고 서장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혼자 쓰기엔 과분하리만치 넓은 방 안. 원목 느낌의 책장과 책상 그리고 그 중앙 고급스러워 보이는 소파가 낮은 탁자와 함께 있었다.
서장님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양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찰은 아닌 듯했다. 내가 들어가자 하던 말을 멈추고 서장님은 말했다.
“앉지.”
나는 양복의 남자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푹신한 느낌과 함께 긴장감이 밀려왔다. 맞은편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은 마른 듯한 느낌의 체구에 짙은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염색약의 인위적인 검은 머리색이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한껏 꾸민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보험사나 고급외제차 딜러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남자의 눈빛을 보는 순간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남자의 눈빛은 매우 무미건조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꽤나 오랜 시간을 형사로 지내온 나보다도 절대 아래가 아니었다. 남자의 눈빛은 사람의 모든 것을 뜯어 샅샅이 파해치는 그런 눈빛이었다. 마치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그런 불쾌한 눈빛이었다.
우리의 이상한 기류를 느꼈는지 서장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잘 알겠습니다. 나머지 자세한 사항은 따로 보고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럼.”
남자는 말투 역시나 간단하고 명료했다. 아무리 지방이라고는 하지만 경찰서의 서장이면 충분히 대접받을 수 있는 직책이었다. 하지만 검은 양복의 남자는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남자가 밖으로 나가자 나는 참을 수 없어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하지만 나의 질문에도 서장님은 불쾌한 기색 없이 대답했다.
“원재희 라더군.”
“예?”
“그게 전부야. 어제저녁 총장님께 개인 전화가 왔었다. 그분이 사람을 하나 보낸다고 하셨는데 그때들은 이름 빼고는 뭘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쓸데없는 소릴 했네. 자네를 오라고 한 것은 비밀스럽게 줄 임무가 있어서야.”
그 비밀임무가 그렇게 큰일이 될 것이라고는 나는 그때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