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준과 재희는 커피를 손에 들고 최후의 만찬 앞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인간성 말살의 시대를 앞둔 마지막 만찬, 말이 필요 없네요. 주제도 너무 선명하고.”
“몇 년 전 부터 생각해 놓았던 작품인데 이제야 세상에 나오네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작가님!”
“늘 좋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휴 작가님도 참! 겸손도 과하면 실례예요.”
재희가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아, 예, 예.”
“참! 엊그제 판매 된 올랭피아 정산은 아마 내일 될 것 같아요.”
“예, 천천히 주셔도 됩니다.”
“어?”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갤러리 밖에서 지켜보던 젊은 남성이 재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재희는 반가운 표정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와! 어쩐 일이야?”
“바람 좀 쐬러 나왔지.”
“작업 좀 했어?”
“어휴, 작품이 무슨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 하면 나오나?”
“치! 꼭 실력 있는 사람들이 저래 말해요. 몰래 작업실에 가서 숨겨 놨는지 찾아 봐야겠다.”
재희가 처음 본 남자와 워낙 친하게 대화를 나누는 바람에 예준은 멋쩍게 서 있었다.
“저,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두 분 말씀 편하게 나누세요.”
“아참! 작가님! 어디 가세요?”
재희는 예준의 팔을 잡고 우진 앞으로 데려갔다.
“인사해! 작가님이야.”
“안녕하세요. 박우진입니다.”
“예, 안녕하세요.”
“제 대학 동기인데요. 지금 뚝섬 예술원에 있어요. 어찌나 잘났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아! 예.”
예준은 뚝섬 예술원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던 아픈 기억이 생각났다. 전국에서 모인 수많은 경쟁자들을 뚫고 예술원에 입주할 정도면 재희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실력을 알만했다.
“아닙니다. 재희가 농담하는 겁니다.”
“참! 여기도 겸손병 환자 한 명 더 있네.”
재희의 농담에 예준은 웃음을 지었고 우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쩐 일로?”
우진이 예준에 대해 묻자 재희와 예준은 잠시 당황했다.
“아! 아니, 상담 좀 하느라고. 작가님 작품이 좋아서.”
“응, 나는 언제쯤 상담 받을 수 있으려나.”
“치, 넌 벌써 걸어놨잖아. 작가님! 이것 보세요. 쟤 작품이에요.”
“아! 예. 멋지십니다.”
“아, 아닙니다. 예전에 그린 습작인데 친구가 농담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건 못 보던 작품들이네?”
“어!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작품들인데 어때?”
우진은 예준의 작품 앞으로 걸어갔다. 자신의 그림에 대해 전문가로부터 한 번도 평가를 받아 본 적이 없었던 예준은 우진이 무슨 말을 할 지 무척 긴장되었다. 더군다나 재희까지 귀를 쫑그리고 있어서 긴장감은 더했다.
“음,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컨셉인데? 우리나라 작가야?”
“느낌 괜찮지?”
“응, 좋다. 일단 컨셉이 신선하고, 메시지도 명료한 것 같아. 나름 해학도 있고.”
재희는 우진이 눈치 채지 못하게 예준을 향해 파이팅을 외쳤다. 예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예준은 우진이 우리나라 작가인지 묻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지금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그저 우연한 기획에 의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