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호는 눈을 떴다. 분명히 느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생생했다. 확실하냐고 묻는다면 뭐라 말할 순 없지만 은호는 느꼈다.
누군가의 손길을, 누군가 은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는 것을. 사실 그것을 느꼈다면 은호는 두려워했어야했다. 그러나 은호는 너무도 반가워서 그게 사실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빠...’
은호는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았다. 아까의 느낌을 다시 느껴보기 위해, 그 느낌을 기억하기 위해 은호는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어두었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과 함께 자꾸만 되뇌었다.
“아빠...”
은호는 밤새 아팠다. 어제 오후부터 시작된 열감기에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끙끙거리던 자신의 소리를 잠결에 들었던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공간 속에서 너무도 아파서, 추워서 깨어나 잠시 앉았다 다시 누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갑자기 서러웠다. 그래서 다시 이마에 손을 얹어보았다. 그 느낌을 떠올려야했다. 혼자가 아니었던 그 느낌을.
은호는 다시 잠들지 못했다. 너무 힘들어 다시 잠들었으면 좋겠는데, 좀 전의 느낌이 꿈일까봐,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기억 못할까봐 두려웠다.
이 어두운 집안에서 은호는 버텼다.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은호는 온 몸에 느껴지는 열기로 눈이 무거워지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은호는 버텨내지 못하고 잠이 들어버렸다.
은호가 눈을 떴다. 어두운 공간이었던 집안이 살짝 밝아져 있었다. 아침이었다. 은호는 어젯밤보다 나아진 몸을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은호는 이불을 몸에 감고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학교 갈 준비를 해야 되는데 무언가 모를 감정이 은호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분명 무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 무언가를 기억해야 할 것 같은데 떠오르지가 않았다. 은호는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은호는 혼자 지내고 있다. 2년을 그렇게 지내오고 있다. 중학교 들어오면서 은호의 인생은 많이 달라져 버렸다. 함께하던 아빠와 더 이상 그렇게 못한다는 사실이 은호는 너무도 힘들었다. 아직 어린 은호였기에 주위의 사람들은 은호를 보호해야 했다. 그러나 은호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냥 이렇게 있게 해달라고 울며 부탁했다. 그래서 은호는 지금 혼자서 살고 있다.
은호의 엄마는 어릴 때부터 같이 살지 않았기에 은호는 아빠가 없다고 해서 엄마랑 살아야 된다는 생각을 제일 이해하기 싫었다. 그런 은호를 설득하기 위해 엄마와 어릴 적부터 은호를 돌봐준 주영이 이모가 노력했음에도 은호를 이겨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은호를 돌봐주기로만 했다. 은호가 간절히 부탁했다. 그렇게만 해달라고.
은호의 아빠는 2년 전에 은호의 곁을 떠났다. 사실 은호는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방문만 열면 아빠가 있을 것 같고, 은호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은호를 깨울 것 같고, 은호와 함께 산책을 가고 함께 웃을 것 같은데, 그런 아빠가 이제 없다. 그래서 은호는 하루에도 몇 번을 참고 또 참았다. 너무 슬퍼서, 너무 아파서, 너무 그리워서.
은호는 살짝 남아있는 감기 기운에 몸을 떨었다. 세수를 하러 욕실에 들어간 은호는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손을 넣어 물의 온도를 느꼈다. 살짝 따뜻한 물에 은호는 얼굴을 적셨다. 그리고 멈췄다. 기억이 났다. 아침 내도록 은호를 복잡하게 했던 그 느낌이 무엇인지 기억이 났다. 은호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눈물이 났다. 확실했다.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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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호야, 아파?”
은호는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학교에서 오자마자 방에 누웠던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쓰러져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런 은호를 아빠가 오자마자 깨웠다.
아빠의 얼굴을 보자 은호는 괜히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아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빠의 걱정하는 얼굴에 은호는 눈물을 꾹 참았다.
“아니, 그냥 오늘 너무 열심히 놀았더니 졸렸어.”
아빠는 그런 은호를 말없이 바라봤다. 아빠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걸, 그런 은호라는 걸 아빠는 알았다. 그래서 미안했고, 그래서 고마웠다.
“배고프지? 아빠가 빨리 밥해줄게. 조금만 있다가 나와.”
아빠는 서둘러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아빠가 나가자마자 은호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다행이었다. 아빠가 보는 건 싫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껏 자신의 이마 위에 아빠의 손이 얹어졌었던 것을. 은호는 이마 위에 놓였던 아빠의 손을 기억했다. 그리고 자신도 손을 이마에 얹어보았다. 손과 이마에서 동시에 따뜻함이 느껴졌다. 이 모든 느낌을 새겨두고 싶었다. 꼭 그러고 싶어졌다.
은호는 일어나 앉았다. 밖에서 아빠가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은호는 이 상황이 갑자기 너무 좋았다. 아까 집에 혼자 왔을 때는 정말 이 세상에 혼자인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았었다. 그러나 지금 은호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빠가 함께 하고 있었다. 은호를 위해 아빠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은호는 아까 했던 자신의 생각들이 부끄러워졌다. 은호는 서둘러 주방으로 갔다.
“아빠, 뭐 맛있는 거 해줄 거야?”
“은호,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은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면.”
아빠는 단호한 표정으로 은호를 보며 말했다.
“안 돼. 오늘 말고. 그건 다음에 해줄게.”
“아, 진짜 라면 먹고 싶어. 계란 넣은 걸로.”
아빠는 웃으며 은호를 바라보았다.
“역시, 우리 딸 먹을 줄 아네. 그런데 오늘은 안 돼. 약도 먹어야 하고. 감기 다 나으면 같이 먹자.”
은호는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은호, 너 때문에 나도 먹고 싶어졌잖아.”
은호는 아빠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에 웃었다.
“아빠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하지. 아빠가 맨날 그랬잖아. 라면에 계란 넣어먹으면 아픈 것도 다 낫는다고.”
아빠는 그런 은호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넌 어려서 안 돼. 나중에 좀 더 크면 그렇게 먹어도 돼. 그리고 그렇게 먹으면 정말 낫는다니까.”
은호는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서두르는 아빠를 바라보았다. 은호는 아빠의 든든함을 다시 느꼈다. 은호와 아빠 둘만 있는 집이었지만, 집안은 보이지 않는 행복함과 따뜻함으로 가득했다. 은호는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