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이게 누구야. 우리 학원 대표 강사님 아니야.”
“원장님, 그런 말씀 마세요.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원장의 능글대는 웃음에 H강사는 내심 기분이 들떴다. 자신에 대한 대우가 확연히 달라졌음은 요 근래 달라진 학원 분위기로 체감하고 있었다. 자신의 스케줄과 학생들을 따로 관리해주는 담당 조교가 배정됐고, 명강사의 공공연한 특권이었던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전용 주차가 가능해졌다. 학원에서 유명해졌다는 증거는 주차장의 특별한 전용구역과 전용 관리인이 생겼는지 여부로 판명된다는 것을 학원 내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선생님, 어서 와. 이번 등록 하루 만에 마감됐다며? 어떻게 몇 달 만에 학생 수가 열 배가 늘지? 처음에 왔을 땐 좀처럼 애들이 안 붙어서 걱정했는데 요즘 보면 진짜 괜한 걱정이었다니까. 요샌 애들이 완전 신자 수준으로 충성도가 높다니까?”
“하하.. 신자라니요, 원장님. 제가 무슨 사이비 교주도 아니고. 처음엔 좀 소심했던 거죠. 요즘엔 다 캐릭터 설정 싸움이잖아요. 나중에 바꾼 제 전략이 잘 먹혔어요.”
“그으래~?”
원장은 전략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더는 묻지 않고 엄지손가락을 한 번 휙 치켜들어보이고는 그대로 원장실로 가버렸다. 사실은 수업 따위 관심도 없을 터였다. 원장의 관심사는 오직 등록자 수다. 이미 강단에서 내려온 지 오래된 그가 그저 스타강사에 목마른 사업가가 다 됐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다행히 원장은 아직 학원 홈페이지의 게시판 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듯 했다.
사실 최근 H강사는 모든 것이 잘 돼가는 일상에서 한 가지 거슬리는 일이 있었다. 친하게 지내는 한 학원 직원에게서 학원 홈페이지에 이상한 글이 올라왔고 아이들 사이에서 말이 도는 것 같으니 한번 읽어보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홈페이지에 접속한 H강사는 게시판 글목록을 보고 유독 조회수가 높은 글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우스를 클릭하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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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요새 H쌤 약 빤 거 같지 않냐?
내가 한 달 전에 H쌤 수업 들었는데 솔직히 수업 X못하고 XX 별로였음.
그런데 갑자기 애들이 미친 듯 열광하길래 궁금해서 다시 등록해서 들어봄.
근데 완전 딴 사람임. 예전 그 버벅거리던 쌤이 아님.
같은 사람이 몇 달 만에 그렇게 변할 수가 있음?
이건 진짜 약 빤 거 아님? 진짜 가끔 열강할 때 눈에서 레이저 나옴.
진지하게 도핑테스트해봐야 한다고 봄ㅋㅋㅋㅋㅋㅋㅋ
나처럼 예전에 쌤 강의 들은 사람 소름 돋지 않음?
나는 진짜 요즘에 그 쌤 강의 듣고 있으면 소름 돋음.
진심 무서움ㄷㄷㄷㄷ
우리 다같이 학원에 얘기해서 도핑테스트 함 합시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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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투는 장난스러웠지만 H강사는 이 글을 우스갯소리로 넘길 수가 없었다. 바로 자신을 향해 ‘약 빨았다’고 쓴 부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 대목에서 예민해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H강사는 밀려오는 초조감에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끊은 지 일 년도 더 된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갑자기 스타강사로 급부상한 그에겐 사실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원장이나 학원 직원들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의 강의 스타일이 갑자기 바뀐 데에는 ‘특별한 처방’이 있었다. 그는 자연스레 뱀처럼 차가운 눈빛을 한 훤칠한‘그 녀석’을 떠올렸다. 그 녀석을 만나 유혹에 넘어간 것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신에게 기적과도 같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녀석은 처음 다가왔을 때 학원에 등록할 때의 이름과는 전혀 다른‘오림’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었다. 자신의 강의에서 뒷자리에 앉았지만 첫눈에도 그가 가진 남다른 분위기 때문에 H는 첫 만남부터 그를 의식했었다. 그는 다른 학생들처럼 듣는 둥 마는 둥 딴짓을 하지도, 그렇다고 열심히 뭔가를 적거나 책장을 넘기거나 하지도 않은 채 그저 강의하는 자신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 강렬한 시선에 H는 원래도 중언부언하던 강의를 더욱 엉망으로 마무리짓고 말았다. 끝날 때쯤엔 다른 학생들은 거의 포기한 듯한 얼굴로 시계를 보거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H는 그 순간 자신이 한심했고, 그 녀석이 원망스러웠다. 적어도 그가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녀석이 스스로를 ‘오림’이라고 밝히며 다가온 것은 자신의 강의를 3번째 듣고 나서였다. 오림은 수업에 관해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누가 자신이 질문하는 것을 듣는 것이 민망하니 학원 근처 카페에서 질문을 받아줄 수 있겠냐고 했다. 평소라면 학원 밖에서 학생을 만나는 일은 꺼렸으니 부드럽게 거절했겠지만 H는 그가 신경쓰여 자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호기심을 느끼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의 수업태도에 대해서 의문이 가는 점이 있었기에 신경쓰이던 문제를 해결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H는 그렇게 오림이라는 학생과 학원 근처 카페로 가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 강의하시는 거 힘드시죠?
- 뭐, 힘들 게 있나. 맨날 똑같지.
- 요즘 애들은 산만하고 수업태도도 안 좋고 걸핏하면 인터넷 게시판에 불만만 써놓잖아요. 자기들 태도에 문제 있는 건 생각 안하고 말이에요. 안 그래요?
H는 순간 아이스커피를 크게 꿀꺽 들이켰다. 마치 자신의 속을 꿰뚫어본 것 같은 말이었다.
- 제가 좀 사정이 있어서 여러 학원들 옮겨 다니며 강사님들 강의를 다양하게 들었는데요. 강사님은 여기서 이런 대접을 받을 분이 아닌 것 같아서 안타깝더라구요.
-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뭔데, 학생?
- 한 번 테스트 받아보지 않으실래요? 스타강사들이 비밀리에 쓰고 있는 비장의 무기가 있거든요.
- 비장의 무기?
- 일단 한 번 성능테스트 해보시라고 사흘치를 무료로 드려볼게요. 써보시고 좋으면 연락주세요.
H는 어느새 자신의 손 안에 상대가 뭔가를 쥐어준 것을 알았다. 손을 펴보니 작은 플라스틱 병이 하나 있었다.
- 식사랑 상관없이 강의 직전에 한 알씩 드시면 돼요.
- 뭐 이상한 약인 거 아니야? 아무 라벨도 없는데 내가 처음보는 학생말 믿고 이런 걸 어떻게 먹어.
- 물론 쌤 선택이죠. 이게 합법적인 약은 아닌데 하도 효과가 확실하니까 찾는 사람이 많아요. 내키지 않으면 버리셔도 되지만 혹여 드실 때는 남이 안 볼 때 드세요. 진짜 귀한 거라 소문나면 안 되니까. 아셨죠?
오림은 이쪽의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자신이 할 말이 마치자마자 그대로 일어서서 카페를 나가버렸다. 남겨진 H는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귓가를 맴돌며 사라지지 않는 말이 있었다. 스타강사들이 쓰는 비장의 무기. 항상 스타강사는 하늘의 별처럼 아득히 먼 존재들이고 자기와는 영 상관없는 말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 약을 먹으면 정말 나도 스타강사가 될 수 있는 걸까.
"스타강사라.”
H의 머릿속엔 더 이상 합법이 아니라느니 하는 위험한 말들은 사라져 있었다. 청년이 그에게 건넨 말 한 마디가 그야말로 뇌를 마비시킬 만큼 너무나 달콤했던 탓이다.
“오림아, 왔어? 그거 가져왔지?”
땀인지 기름인지 모를 것에 번들거리는 이마를 손수건으로 훔친 H강사는 초조함을 감추지 않고 오림이 내민 약에 바로 손을 뻗었다.
“근데 요즘 좀 과하신 거 아니에요? 절 너무 자주 찾으시는데.”
“불안해서 그래……. 나 이제 일주일에 천 명 넘게 강의해. 대형 강의실이 그득그득 찬다고.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아직도 약을 안 먹으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거야. 오림아, 근데 이거 효력이 왜 점점 짧아지는 거 같냐.”
“기분 탓이에요. 불안해하실 거 없어요. 약에 너무 의존하시면 좋을 것 없어요. 구하기 쉬운 것도 아니고 제가 시간이 매번 되는 것도 아닌데 어쩌시려구요.”
“그럼 어떻게 해. 넌 퀵은 절대 안 쓰지. 다른 사람을 시킬 수도 없으면 널 부를 수밖에 없잖아.”
오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없이 봉투를 건넸다. 봉투를 받는 H강사의 손이 흥분으로 잘게 떨렸다. 오림은 그 꼴이 내심 우스웠지만 얼굴에는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약을 복용할 때 자신의 음성을 듣게 하는 방식으로 그를 더욱 약에 의존하도록 강화시켜 왔다. 오림은 강사의 어깨를 톡톡 도닥였다.
“요즘 학생이 더 느셨다면서요. 역시 대단해요, 강사님은. 이 약만 있으면 천하무적이네요.”
“이 약만 있으면…….”
“앞으로 전국구 스타강사 되시는 것도 문제없겠어요.”
“응, 요즘 내 강의가 아주 좋아졌대. 지금 이대로라면 노량진 바닥에서 곧 이름을 날릴 수 있을 거랬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요?”
“잘 부탁한다고…….”
H강사는 슬슬 오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오림은 처음부터 간파했지만 평소의 그는 비굴할 정도로 소심하고, 남의 말에 신경을 쓰는 남자였다. 그런 부류를 오림은 한심하다고 느낀 동시에 자신의 실험대상으로 매우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아니, 오히려 이 약의 실험대상이 되는 것이 영광일 정도라는 게 정확한 사실일 것이다. H강사는 확실히 의존도가 급격히 높아졌는지 오림이 보는 앞에서 약을 허겁지겁 털어넣었다. 평소 정량을 지키고 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오림의 눈을 의식했는지 그 이상을 복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 약이 긴장을 풀어주고 자신감을 높여주는, 그래서 자신의 강의력에 도움을 주는 약인 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약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었다. 단지 그런 약이 필요했다면 우황청심환으로 족했겠지. 당신같이 겁 많은 쫄보에 희미한 존재감의 별볼일없는 삼류강사를 이렇게 인기강사로 탈바꿈한 것은 그렇게 단순한 효력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결과가 아니다. 오림은 내심 차갑게 웃었다. 이 사람은 오래 못 가겠어. 이제 갈아타야겠군. 애초에 이 약은 능력을 높여주는 마법 같은 게 아니다. 벌써 ‘성적은 안 오르는데 자꾸 보고 싶어지는 선생님’이라는 촌철살인의 댓글을 어제 학원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발견했다. 이 강사 3개월 내로 끝장나겠군. 무능력한 쫄보 강사가 약 없이 며칠이나 버티나 어디 한 번 볼까. 오늘 건네준 약은 예전의 그 약이 아니었다. 적당히 몽롱한 기분이 들뿐인 흔해빠진 감기약이었다.
공포스러울거야. 너를 바라보는 시선에 이제 환호와 동경은 조금도 남김없이 사라져 있을 테니까. 그게 바로 이 약의 진정한 마법이야, 쫄보 선생. 오림은 속으로 H강사를 비웃었다. 대규모 학원이 경쟁하듯 빼곡이 들어찬 노량진 골목을 빠져나오며 백 미터 전방에서도 또렷이 보이는 플래카드 속 남자의 얼굴을 한 번 슬쩍 올려다본다.
-결과로 말하는 1등 강사!
H강사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네온사인 틈에서 처연할 만치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