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장! 그 마음으로 열심히 해. 그까짓 학벌이 뭐 필요해. 내가 적극적으로 빌어줄 테니까 최선을 다해. 그럼! 공장으로 가 보게. 자네를 믿네”
평소에 호탕하게 웃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시원하게 한번 웃으셔 윤사장도 뿌듯했다. 윤사장은 공장장을 배웅하기보다 꼭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어 밖으로 같이 나갔다.
앞 뒤로 누가 있는지부터 확인을 하고는 팔을 끌어당겨 물었다.
“방금 왜 무릎을 꿇었어?”
동원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되묻는다.
“어? 방금 형수님이 다 얘기했잖아요. 다른 뭐 또 궁금한 게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고… 야! 그리고 너! 형수라 부르지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미간을 제법 세게 모아 비틀어 거북하다는 의사 표명을 확실히 했지만 동원이가 오히려 크게 소리 내 웃으며 반박을 한다.
“형수님이야말로 이제 야!, 동원아!, 이런 말 그만하세요. 저요! 공장장입니다 요. 허허허”
“그래! 그래! 아! 예! 공장장님! 저보고도 이제 사장님이라 불러 주세요. 공장장님!”
무슨 황소 엉덩이만한 동원이 팔을 세게 꼬집으며 머리를 구십 도로 푹 숙였다.
“아야! 아! 형수님! 무슨 손이 원래 이렇게 매워요”
그때 윤사장이 또 눈을 찡그려 노려보고 또 야단을 치고 있다.
“형수라 하지 말랬지. 그런데 참! 내한테 형수 직함 준 그 놈 요즘 잘 있어?”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저도 요즘 공장 일 때문에 바빠서 울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참! 형수님! 방금 전에 우리 회사에까지 조사가 들어온다는 말이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알고 있는 선과 형수님이 알고 계시는 부분에 어떤 차이가 있는 지 궁금합니다”
“글쎄! 비슷할 것 같은데 내가 아는 선은 감량 난 수량은 몇 퍼센트를 제외한 나머지는 보험처리로 보상을 받고 도둑질 해간 제품은 전량 회수되고 또 뭐 있나? 동원인 공장장 되고… 뭐! 이게 다네! 뭐 또 궁금한 게 있어?”
잠시 동원이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그런데 윤사장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쉽게 설명한 내용 전체가 아주 치밀하게 짜 논 계획대로 윤사장 자신도 여기 공장장인 동원이도 그냥 심부름만 한 것 같았다. 말하자면 완벽한 사기극에 공모한 결과밖에 되지 않았다.
“동원이 너!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해? 다 좋다. 너는 깡패에서 공장장이 되고 나는 부장에서 바로 사장이 되고 회장님은 손도 안 되고 코 풀듯이 작은 회사들을 인수 해버리고…. 그럼! 그 등신은 뭘 얻었어? 너는 그 등신이 등신이라고 생각 안 해?”
동원이도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해서는 끄집어 낼 게 없는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건 희대의 사기극인데 아무런 보상도 없이 그렇게 대범하게 치밀하게 작전을 짜서 보험금을 횡령할 수 있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지 회장님이 장학금을 줬다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른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원이가 공장으로 내려가고 며칠이 지났는지 까먹을 쯤에 수리가 불쑥 회사를 찾아왔다.
“야! 너는 공장에 안 있고 여기 왜 있냐? 요즘 경기도 좋지 않다던데 이렇게 사무실에 눌러 붙어 앉아 있는다고 떡이라도 생기냐? 그래서 월급쟁이 사장들은 아무짝에 필요가 없단 말이야. 너 돈 들고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현장을 쫓아 다녀나 봤나? 대출 내 이자부터 갚으려고 맨 발로 뛰어나 봤냐? 주는 월급, 기름 값 받아 호의호식하다가 턱 사장되니 전부 네 능력으로 된 줄 아냐? 너처럼 나도 꽃 길만 걷고 싶다’
이놈이 아침에 뭘 잘못 쳐먹었냐?
심사가 왜 저렇게 뒤틀려 있지?
불쑥 찾아와서 웬 시비야?
아무리 선후배 오빠 동생 연인 애인 있는 관계 전부 다 뒤져도 이런 말은 형제나 부부 사이에서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지!
그럼! 머리 채를 싸잡아 버려?
머리 털을 모조리 뽑아버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바르르 떨기까지 하면서 윤사장이 이 놈 뒤를 따라 가다가 ‘아차!’ 싶어 더 이상 따라 가지 못했다.
저 놈과 나는 아무에게도 말 못한 사이! 애인에서 어쩌다 불륜 사이가 돼 버렸다.
한 순간에 사람의 염장을 파헤쳐놓고는 노크 딱 세 번만 하고 회장실로 들어갔다.
정말로 후회가 되었다.
잠시 이혼하고 저 놈과 혼인 신고를 하자마자 머리채를 뒤흔들어 털이란 털을 모조리 뽑아 버리고 싶었다.
온 몸이 두 시간 내내 부들부들 떨렸다.
회장실이 아닌 화장실을 다녀 온 것처럼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저 표정은 시원하게 쾌변을 본 표정이었다.
다시 손을 잡고 싶을 정도로 화색이 돌았다.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꼴도 보기 싫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여기가 무슨 자기 안방인 줄 아나?
그때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천만다행이 대피 장소를 제공받았다.
정말로 오래 전에 고대리가 달려들 때처럼 무서웠다.
거의 도망치듯이 회장실로 들어갔다.
“윤사장! 잠시 시간 있어?”
어느새 상명하복을 행사하는 사람으로 변해 있어 머뭇거릴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예!”
무슨 일인지는 당연히 묻지 않았다.
“자! 이거 정형에게 전해줘! 자식이 유세가 얼마 심한지 아마 내가 죽으면 영전에서도 유세부릴 놈이야”
윤사장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아 멀뚱히 쳐다 만 봤다.
“얼른 쫓아가 봐! 저 놈 저거 저렇게 가버리면 내 문상도 안 올 놈이야”
회장님이 전해주라는 봉투를 들고 회장실을 나가다가 다시 돌아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회장님! 저 오빠하고 어떤 사이입니까?”
“응! 넘어지면 밟아줄 사이! 얼른 가봐. 벌써 갔겠다”
‘얼른 가봐’ 라는 말이 회장님과 오빠와의 관계를 듣는 것보다 더 반가운 말이었다. 내심 초조하게 회장님의 말씀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품위는 지켜야 해서 몇 초의 시간을 목례와 품위 있는 걸음을 유지하는 데 소모해야 했다. 회장실을 나와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밖으로 나가자 마자 지금 저 사람을 붙잡지 않으면 또 20년이 훌쩍 넘어 만날 것 같아 총총 걸음으로 뛰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버리지는 않을까 불안하고 초조하기도 했다. 숨이 턱밑까지 급속도로 차고 올라와 숨이 턱 멎을 무렵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고 싶어했지만 이미 숨통은 가쁜 숨에 막혀 있었다. 가슴을 두드렸다. 뒤에서는 이 놈의 주먹이 등을 세게 두들기며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내가 어디 도망갈까 봐 숨이 막힐 정도로 뛰어 와? 걱정 마!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렇게 말을 하고는 손을 툭 내밀었다. 이번에는 기도가 아닌 기가 막혔다.
“뭐야? 그 손은?”
“회장님께서 봉투 주셨잖아. 주셔요. 제겁니다”
“그게 다 야? 할말 없어? 나는 할 말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