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태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는 그런 기본적인 예의조차도 없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어른도 맞을 짓을 하면 당연히 맞아야 한다면 육십 년 내내 지껄여왔던 그의 주관을 심각하게 훼손하면서, 오로지 모욕 당한 자체에만 분개하고 있었다.
원인을 제쳐두면 과정과 결과만 보면 김성태가 화를 내는 건 당연했다. 버르장머리라고는 아예 없는 놈들이라며,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뇌까리면서 문상권을 향해 달려갔다.
김성태가 만나러 가는 문상권은 수리가 문상원의 아내를 누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문상권이 아내를 만나기 오래 전에, 그러니까 처남과 수리는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였다. 문상권이 들었던 수리는 처남과 단짝은 아니라고 했다. 병원과 합기도 도장을 다녔던 수리는 시험 때만 되면 처남 집인 처가에 아예 죽치고 살았다고 했다.
수리가 같은 일을 하는 걸 알고,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으라고 호통을 쳤지만 그만두고 난 뒤는 책임을 질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더 나이 들기 전에 창업하는 게 어떻겠냐며 말을 한적이 있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리가 정말로 창업을 해버렸다. 김성태를 만나러 가는 문상권의 심경은 복잡했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속이 후련했다.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동료들이 조삼모사 한 김성태로 인해 자신도 다른 동료들도 다른 회사로 쫓기듯 떠나야 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만난 김성태와 술자리에 앉은 문상권은 자신의 생각은 일체 함구했다. 때론 칭얼대듯 때론 폭탄이 폭발하듯 울분을 터트리는 말에 문상권은 오래 전에 자신이 김성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수리가 해준 것 같은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어떤 위로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성태가 한잔 더 하러 가자고 했지만 2차가 어디인지 훤히 아는 문상권은 건강을 핑계로 집으로 돌아갔다.
값비싼 양주에 여자. 공짜라면 언제던 좋지만 김성태에게 덮어 쓴 바가지만해도 서른 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샀을 것이다. 씁쓸히 걸어가면서 할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했다.
“너 이놈의 자식! 아무리 그래도 어른에게 그렇게 하면 안되지. 내가 한번 찾아가마.”
잔소리 듣기 싫다며 수리가 절대 오지 마라고 싹싹 빌듯이 하는 말에 문상권의 입에서 웃음이 저절로 나오고 있었다. 우연찮게도 만나야 할 사람이니 조만간 사과할 자리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수리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을 하는 바람에 또 한번 씁쓸한 웃음만 들려주고 전화를 끊는다.
김성태처럼 자신에게도 이런 날이 올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폭풍처럼 뇌 속으로 파고 들었다. 집에 도착할 무렵에 수리에게 문자가 왔다.
-매형! 제 밥그릇 박살내려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겠습니까? 이해해주십시오. 저도 언젠가는 똑같이 당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이어질 문자가 없는 건 문상권도 잘 알고 있어 한번 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집으로 들어갔다.
술에 똥 가루가 되어있었지만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김성태가 이부장에게도 박대리에게도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김성태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 뒤부터 박대리가 앉아있는 자리는 뾰족한 바늘방석이었다. 엉덩이를 계속 꿈틀거리고 있다. 유일한 아군인 김소장을 붙잡지 못한 것도, 뒤를 따라 나가지 못한 것도 모두 후회를 했지만 박대리는 바로 현실로 돌아왔다. ‘전혀 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소장에게는 갑이면서도 부장만 있으면 졸개가 되야 했다. 가끔씩 부장처럼 자신을 자기 회사 직원들처럼 취급하면서 무시하고 윽박지를 때도 있었다.
그런 연유로 김소장을 잘라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능력 밖이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부장이 항상 강조했던 말인 대폭적인 물갈이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지금이 기회다. 김소장은 이미 앞에 있는 이 놈이 한방에 제거됐다. 그러면 이제 남은 건 탱크로리 기사인 임운영과 터미널 직원인 최동호뿐. 이미 포섭된 상태다. 박대리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듯이 등치 큰 저 놈들도 돈으로 주물러버리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망상도 하고 있었다. 밖으로 슬쩍 쳐다보았다.
덩치 큰 놈들을 경호원으로 삼아 시내를 활보할 수 있다는 어린 아이 같은 생각이 이 와중에도 나오고 있었다. 박대리는 지금 세대교체의 주역이 돼 이부장과 같은 미래를 그리는 중이었다. 자세를 가다듬어 앉았지만 떨리는 가슴은 생각대로 가다듬어지지 않았다. 부장처럼 목소리를 연출했지만 자기가 들어도 기어들어가는 어색한 목소리였다.
“다른 지역에도 사무소가 있던데 거기도 직원이 많습니까?”
“예! 의심되면 저희 직원들하고 지금이라도 같이 가보시죠.”
지금까지 접해본 용역 회사 대표들에게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 그대로 시건방진 말투뿐이 지만 다소곳이 들을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김소장 같았으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가슴에 비수를 꼽는 말을 하고도 남았겠지만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직원만 봐도 거긴 보지 않아도 손바닥 보듯이 훤히 보인다는 생각을 박대리는 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객지에 가서 또 기겁할 불행을 자초할 사람이 아무도 없듯이 박대리도 그랬다. 갑의 위상은 온데간데 없었지만 그래도 위엄은 지키고 싶었는지 순희를 보고 위신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럼 제 실사는 이걸로 마치는 걸로 하고. 안주임 뭐해? 실험실 확인해야지.”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들이 깊은 잠 속에 나온 달콤한 악몽처럼 느껴졌던 안주임이 박대리 말에 정신을 번쩍 차린다. 지금부터 진짜 악몽이 벌어지는 순간인 걸 직감한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망신이었다. 그 바람에 박대리가 명령조로 한 말은 전혀 의식이 되지 않고 걱정이 먼저 앞섰다.
경리 업무라면 모를까 실험실 구경한지가 언제인데 갑자기 실험실에 들어간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망신만 당하지. 곧 당할 망신이 우박처럼 머리꼭대기부터 두드리고 있었다. 화학과만 나오지 않았다면 분석 장비를 보고 어디에 써는지 정도는 물어 볼 수 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난처한 처지였다.
긴장의 연속에 오금이 저리더니 이제는 오줌도 마려웠다. 누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남녀 할 것 없이 자연적인 생리현상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면 개나 돼지라고 했는데 설마 여기는 그런 동물은 없겠지 했지만 이 순간은 인간이 더 무서웠다. 그렇다고 팬티에 찔끔 지릴 수도 없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꺼냈다.
“저! 화장실 좀 쓰면 안될까요?”
그래도 제일 잘 생기고 커피를 가져다 주면서 안면이 터인 만만해 보이는 사람을 골랐다. 이런 젠장 굳이 화장실 앞까지 안내할 필요 없이 손가락 짓만 해도 되는데 무슨 고급호텔 프런트 안내원처럼 팔까지 뻗으며 뒤따라오고 있다.
눈에 가장 먼저 들어 온 건 우악스런 주먹과 바로 뒤로 대물 오징어 같은 손바닥과 손가락이었다.
순희는 그 순간 놀란 가슴에 손을 얹느라 찔끔하고 말았다. 너무 긴장한 탓이었는지 시원하게 볼 일을 마치고 나니 발뒤꿈치부터 시작해 종아리를 지나 짜릿한 전율이 아랫도리 아래까지 올라오면서 욱신욱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프지는 않았다. 그냥 나른하고 시원하기만 했다. 눈도 스스로 감겼다. 그렇다고 변기통 뚜껑을 등받이로 삼을 수가 없어 허리를 굽혔다. 양팔을 십자로 끼고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경한 깡패소굴에서 오간 협박들이 한편으로 액션 영화로 스치기도 했다. 김소장은 말로 협박을 하고 저 어린 대표라는 사내는 깡패 같은 직원들과 덩치로 협박했다. 순희는 발등까지 떨어진 정수리며 관자놀이를 찌릿찌릿할 때까지 꾹꾹 누르고 있었다.
이부장이 부서로 온 후로 순희는 사실상 버림받은 투명인간이었다. 박대리도 이부장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순희는 화장실에 가서 나오지 않고, 험상궂은 사내들은 호위가 아닌 구타할 것처럼 빙 둘러 서 있고, 혼자만 서 있는 지금 박대리는 시장에 갔다가 엄마를 잃은 심정이었다. 불안과 초조뿐이었다.
그런 마음을 헤아렸던 이대리가 편안하게 해주려고 등치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보냈지만 이 미소가 오히려 그나마 버티던 박대리 용기를 허물어버렸다. 허벅지 어느 한쪽에서 흥건하게 젖어가는 감촉을 느낀 박대리가 갑자기 휴대폰을 귀에 대고 다급하게 말을 하면서 고개를 돌려 이대리와 눈을 마주치고 아주 정중하게 상황까지 설명한다.
“공장장님이 급한 일이 있다며 빨리 들어오라고 해서 지금 가봐야겠습니다. 공장장님에게 오늘 실사를 보고하면 바로 시작할거니까 준비하고 계십시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대표는 수리인데 눈은 이대리와 마주쳤다. 정말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다소곳이 배꼽 인사까지 한다. 이대리도 자신도 인식 못한 채 박대리를 따라서 같이 허리를 숙였다. 박대리는 숙였던 허리를 곳곳이 세우지도 않고 꾸부정한 상태로 허둥거리며 나가버렸다. 문밖으로까지 배웅하려고 나오는 이대리를 힘을 다해 사무실 안으로 밀어 넣고 문까지 닫아주고 등을 문에 붙이고 있다. 못나오게 막으려는 행동은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데서 숨을 가누고 싶어하는 마음이었다.
갑이란 인식을 확실히 심어주려고 의기양양하게 우군까지 모셔왔다가 이게 무슨 꼴인가를 문에 등을 기댄 채 박대리는 가장 먼저 떠올리고 싶어했다.
앞으로 줄곧 만나야 할 사람들이지만 오늘만큼은 더 이상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게 지금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했다. 빨리 여기서 멀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같이 했다. 등만 기대고 더 이상 있을 상황이 아니란 걸 이제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서두른 만큼 발걸음은 따라지주지 않는 것 같았다. 빈혈에 걸린 듯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비틀대며 건물 출입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긴장에 풀린 것 같다. 휘청거리며 흐느적거리기까지 했다. 더 이상 앞으로 걸어갈 다리 힘도 용기도 없는 것 같았다. 옆에 기둥이라도 있으면 잡고 기대겠지만 그럴 처지도 아니란 걸 박대리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눈을 잠시 감고 딱 한번 정신을 추스르고 발을 앞으로 내딛는 순간 현기증이 갑자기 그를 덮쳤다. 헛디딘 것처럼 휘청거리고 있었다. 도로에 나뒹굴 위기의 순간에 누군가가 박대리를 낚아챘다. 고맙기는커녕 위협만 느끼게 하는 짓이었다. 박대리가 거대한 바위덩어리에 짓눌린 듯이 몸을 어기적거리고 있었다. 표정에는 공포뿐이었다. 웬만하면 놔줬으면 할 정도로 애처롭게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친절과 배려는 받을 사람에게만 베풀어야 하며 그렇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행하면 오히려 모독이란 걸 증명해주는 광경이었다.
“어! 괜찮으십니까?”
솥뚜껑이 아닌 자라가 확실하다는 걸 박대리가 인지했다. 직원들이 밖에서 서성이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슴은 더더욱 철렁 내려 앉은 것 당연했다. 한마디라도 무슨 말이던 입밖에 나오면 정말 오줌을 쌀 것 같아서 허리가 뜨끔할 정도로 굽혀 인사를 하면서 얼버무리고 있다.
“아! 예!”
박대리는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는 걸 실감하고 있지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오로지 차만 바라보며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