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게 닫힌 입술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자아낸다.
해주의 표정을 살피며 다시 말을 이어가는 유란이다.
“네가 걱정 돼.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찬이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오래갈지.. 네가 돌아서는 순간 찬은 예전의 찬으로
돌아갈 수 없어. 우리한테 내려진 가장 무서운 벌이다.”
유란이 쓴 미소를 짓는다.
“넌 찬이한테 유일한 사랑이자 또 유일한 먹잇감이야..
구지 피를 탐하지 않아도 너만 곁에 있다면 찬은 인간처럼
살아갈 수 있지만 너한테 버려진다면 그 순간 더욱 괴물이
된다는 거."
“그.. 사람도 알고 있어?”
천천히 해주가 말을 꺼내든다.
“어. 얼마 전에 말했어. 이미 늦었지만.. 아마 찬도 무지
괴로울 거야. 그래서 더 널 곁에 두려하고 네 옆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거야. 말은 안 해도 아마 무지 무서워할걸. 그럴수록
너에게 더 집착하고 더 욕심이 생긴다는 걸 지금은 알고 있을
테니까. 너도 봤잖아. 괴물이되서 날뛰는 찬을..."
“어떻게 해야 하지..”
“넌 어때? 찬이를 받아들일 때마다 너도 그를 원하니? 너도
찬이와 같은 걸 느끼는 거야? 힘들지 않아? 괴롭지 않아?”
잠시 멈칫하던 해주가 말을 이어간다.
“어. 전혀 그렇지 않아. 나도 그를 원해. 그가 날 원할수록 내 몸이
그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그와 같이 똑같은 걸 느껴. 아마
그가 아니라면 그 누구와도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아..
그냥 좋아.. 솔직히 지금은 그래.”
“찬이 그러더라. 넌 자신을 위해 타고난 여자라고.. 근데 인간인
네가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네 몸을 탐하는
찬이 만큼 너도 그럴 수 있을까.. 아마 익숙해질 때까지 너는
매일같이 찬이 옆에 있어야 될 거야. 그게 익숙해진단 가정하에.
안 그럼...”
말끝을 흐리는 유란이다.
-안 그럼 넌 평생 찬이 곁에서 한시라도 떨어지지 못할 거야. 찬이
이겨내지 못한다면 넌 갈수록 너를 탐하는 그를 감당해야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유란이 혼자 답답한 가슴을 삼킨다.
해주가 일어나 침대로 가 앉는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생각 좀 해야겠다.”
겉옷을 벗는 해주다.
“찬이가 네 손에 길들려질까? 솔직히 난 너를 잃게 될까 걱정도
되지만 그 녀석이 괴물이 되는 건 더욱 싫어. 인간의 피를 자제
하는 것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 그 녀석 의지가 강해서 그래서
혹시나 나도 기대가 되는데.. 네가 지쳐 멀어질까봐...”
“아니라곤 말 못해. 그를 향한 내 사랑이 영원할 거란 장담 못해.
시간이 필요해. 그 사람과 나에 대한.. 지금 당장은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하니까..아직까지는 나도 그를 원하니까..근데..
모르겠어. 내 사랑이 얼마나 오래갈지.. 아니면 영원할지..”
해주가 남은 옷을 벗으며 속옷만 걸치고 머리를 질끈 올려 맨다.
유란이 쳐다보며 피식 웃는다.
“왜?”
“네가 벗은 몸을 보니까.. 나도 인간이었을 때가 있었구나 싶어.
여자의 벗은 몸은 처음 보거든. 내 몸도 너와 같을까... 남들이
보기에.. 하여튼 이쁘다. 나, 그만 가.”
“너도 여자야. 내 몸이나 너나 똑같아. 다를 게 뭐있어? 그래 네가
훨씬 아름답긴 하겠다. 부러워. 인정.”
“치. 기집애. 그건 당연한거야. 오늘 찬이 여기로 오겠다?
잘 생각해봐. 어떻게 해야 하는지.. ”
순간 창가로 떨어져 사라지는 유란이다.
“꼭 지말만 하고 가.”
해주가 스르르 옷을 벗어 욕실로 들어간다.
해주는 2층을 전부 쓴다.
해주의 부보가 어차피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고 집을 지을 때부터
그녀만의 방을 만들었다.
계단 올라오는 입구 앞에 문이 방문이고 창가 구석 자리에 커다란
욕실이 있다.
뜨거운 물을 받으며 욕조 앞에 걸터앉는다.
휴.. 크게 한숨을 내쉬며 여러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 해주는 마음이 뒤숭숭 하다.
설찬을 향한 사랑은 확실한 감정이지만 그 사랑이 영원할거란
생각은 못해 봤다.
유란이 말대로만 설찬은 해주에게 꽂혔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자신이 그의 단 하나뿐인 사랑이자, 먹잇감이다...
그것도 둘 중에 하나가 죽을 때 까지..
어느새 뜨거운 물이 차올라 해주의 손을 적신다.
푹 몸을 담그며 뒤로 기대어 눈을 감는다.
따스한 온기가 욕실 안에 퍼지며 기분 좋게 만든다.
“이 집을 떠나야 하나.. 엄마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지금은 이게 문제다.
요즘 동거쯤이야 흠이 되지 않는 세상이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겨 이혼하는 것 보다야 살아보고 맞춰
보고 즐겨보고 그런 다음에 결혼을 해도 늦지 않는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 세상이다.
해주도 그렇다.
그렇게 꼭 결혼이 필요한가.. 그 중요성을 잘 느끼지 못한다.
엄마에겐 미안한 소리지만 해주는 결혼이라는 풍속에
얽매이는 게 싫었다.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왔던 건, 죽어라 일만 하는 엄마의
뒷모습. 할머니와 고모들의 잔소리를 들어가면서도 한 마디
못하고 하라는대로 시키는 대로 일만 하는 엄마였다.
어린나이지만 그런 게 싫었다.
내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에 소속이 되어 그 소속된 집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건..정말 대단한 것이다.
누군가 그런다.
사랑한다면 그의 집안도 다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고..
그게 정말 진실 된 사랑이라고....
하지만 요즘 누가 그렇게 살까....
어느 정도 예의를 지켜가며 선을 넘지 않은 생태로 서로의
집안을 존중해준다면 그것으로 끝이라 생각하는 해주다.
그래서 지금까지 결혼이라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설찬에게도 그런 이유에서 동거를 말한 것이다.
뭐 설찬이 결혼을 얘기한건 아니지만 당분간 그에게 맞추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게 해주 생각이다.
갑자기 물속으로 푹 들어가는 해주다.
동거라는 생각에 쓸데없이 결혼생각까지.. 잡생각이 많아졌다.
똑똑, 엄마가 부른다.
해주가 급히 일어나 몸을 닦으며 수건을 두르고 욕실을 나선다.
“뭔 목욕이 끝이 없어. 아빠 오셨어. 내려와.”
엄마가 타박하듯 입을 삐죽 내밀다 먼저 내려간다.
주방으로 들어서는 해주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한 탓인지 빨개진 얼굴로 의자에 앉는다.
“아빠, 보고 싶었어요.”
환하게 웃는 해주다.
“보고 싶었다는 녀석이 전화 한통 없는 거니?”
“그러게.”
엄마가 맞받아친다.
“보고는 싶었는데 나름 바빠서..”
헤헤 웃으며 해주가 핑계를 댄다.
“기사 봤다. 위험해 보이던데.. 꼭 그렇게까지 파고들어야 했어?
다치기라도 하면..”
“아빠도 봤으면 알잖아. 사람들도 알건 알아야지..”
“그래, 그렇긴 하지만..“
“걱정 마요. 아빠. 나 알잖아.. 말려도 소용없다는 거. 조심 할게.“
“그렇긴 하지.. 누굴 닮아서 고집만 세고..남자로 태어났으면
나라에 큰일 할 인물 일 텐데..”
뭔가 아쉬운 아빠의 말투다.
“치, 딸을 앞에 두고 이 와중에 아들을 찾고 싶어?
딸은 뭐 아들 노릇 못하나? 아빠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게 섭섭해.
엄마는 모르지만.."
해주가 뽀로통한 표정을 짓는다.
해주엄마가 찌개를 올려놓으며 해주를 쳐다본다.
“난 아니거든. 기집애.”
슬쩍 해주를 흘기는 해주엄마다.
피식 웃으며 찌개를 떠먹는 해주가 맛있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역시 울 엄마 요리 솜씨는 끝내준다니까.. 그지 아빠?“
“네 엄마 장점은 요리 하나다.”
“여보...”
해주엄마가 슬쩍 흘기자 어깨를 으쓱이며 웃는 해주아빠다.
간만에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다.
웃고 떠들며 서로의 얘기를 받아주고 밥을 다 먹고 난후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커피를 마신다.
해주가 슬쩍 엄마를 살피며 말을 꺼낸다.
“나 동거하려고..”
갑자기 마시던 커피를 뿜어대는 엄마와 헛기침을 하는 아빠다.
“뭐? 뭐라고? 다시 말해봐. 뭘 한다고?”
다그치듯 묻는 엄마다.
“동거. 결혼 말고 동거. 같이 살고 싶은 남자가 생겼어.”
“그래서.. 그 놈이 결혼 하지 말고 동거하재? 그런 거야?”
아빠는 말이 없다.
“아니, 결혼은 내가 싫어. 살아보고 좀 살아보고 괜찮으면
그때해도 늦진 않겠지 싶어서.. 무작정 결혼먼저 하고 뒤늦게
후회해서 헤어지면 그게 더 복잡하잖아.”
“기집애가..”
해주엄마가 해주의 등을 잔잔하게 때린다.
“여자가 돼서 동거하고 헤어지면 나중에 소문나.. 그러면 그땐
어쩔 건데? 어떻게 다른 남자를 만나고 결혼 할 건데? 어?”
역시 말없이 커피를 마시는 아빠다.
“뭐하는 녀석이야? 직장은? 집안은? 능력은? 하나도 안 알려주고
그냥 통보하듯이 동거할래가 뭐니?”
“그 사람 사랑해.”
“그럼, 결혼해.”
“아니. 사랑은 하는데 결혼은 아직.”
“어차피 동거나 결혼이나...”
“그니까 동거나 결혼이나 그게 그거라는 소리잖아. 그럼 난
동거를 택하겠다고.”
“이 기집애가 정말..”
해주엄마의 높아지는 목소리다.
“해주야..”
나긋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해주를 부르는 아빠다.
“동거를 택한 이유가 단지 확신이 안서서야? 그럼 그건 사랑이
아니지.”
“아니. 아빠, 난 솔직히 결혼에 관심 없었어. 물론 남자도. 준영이
늘 함께 했지만 걔조차도 남자로 안 느껴졌어. 친구들이 하는 것
처럼 소개팅이나 미팅도 흥미 없었고, 그냥 때 대서 나이 좀 더
먹으면 그때 마음 맞는 사람이 있으면 노년을 함께하자 싶었지
꼭 결혼해야지 그랬던 건 아니야."
“동거를 하겠다는 건 확고한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해주다.
“데리고 와라. 얼굴은 봐야지..”
해주아빠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일어나 주방을 나선다.
“여보.. 여보..”
몇 번이고 남편을 부르는 해주엄마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나가는
해주 아빠다.
“엄마는 찬성 못해. 싫어. 데리고 와서 소개를 시켜준다고 해도
동거는 반대야.”
벌떡 일어나 주방을 나서는 해주엄마다.
그제야 한숨을 쉬며 의자 뒤로 몸을 기대는 해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