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시간조차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던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던 ‘무(無)’의 세계, 하지만 ‘무’는 필연적으로 ‘유(有)’를 낳는다.
그것이 최초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을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자각조차 없는 채로 그저 또 다른 ‘허무(虛無)로서 그곳에 존재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세계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세계는 자신에게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존재의 정보를 근원으로 하여 끝없는 복제를 시작했다. 최초의 탄생을 모방한 복제품, ‘차원(次元)’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세계의 욕구에 의해서 탄생한 차원이라는 존재들은 최초의 탄생이 지니고 있던 정보들을 근원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근원에 새겨진 정보는 무한하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방대했고 하나의 차원이 담을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 결과, 제각기 다른 정보들을 특성으로 지닌 다양한 차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거대한 우주가 뒤틀리며 그들은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온다.
“…”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세 사람은 입을 다물지못한 채 에르스를 쳐다본다.
“이게 사실이라면 너는 어떻게 이런 것들을 알고 있는 거지…?”
“그건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들이기 때문이야”
지루한 듯 에르스에게 장난을 치고있던 라이시나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에 모두의 생각이 멈췄다.
“잠깐.. 그 말은 설마…?”
“그래. 에르스는 흔히 인간계라고 불리는 차원, 그 자체라는 거지”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 세 사람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에르스를 바라본다. 터무니없는 현실을 가장 먼저 인정한 것은 서지훈이었다. 에르스의 정체를 알게 되자 그동안 에르스가 보여주었던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 정도의 힘이 있으면서 어째서!!”
어찌 보면 당연한 질문이다. 에르스는 죄책감에 고개를 숙인다.
“인간계에는 곧 거대한 재앙이 찾아올 겁니다”
“재앙이라니…”
“인간계의 멸망, 혹은 그에 가까운 무언가가 일어나게 될 겁니다”
“그 정도의 힘이 있으면서도 막을 수 없다는 거냐”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아니.. 저이기에 막을 수 없었습니다.”
“…”
“그렇기에 저는 준비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계의 고리를 풀어줄 수 있는 존재들을 만들어냈죠”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는 이미 생각의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정보들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서지훈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어둠속에서 생각을 정리해본다. 새로운 정보들에 수많은 과거의 기억들이 풀려나간다. 생각을 반복하던 서지훈은 결국 하나의 진실에 도달하고 말았다.
“하… 설마…”
“…”
“모두 네놈이 꾸민 짓이었냐!!!”
순식간에 차오른 분노는 타오르는 살기가 되어 이성을 불태운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라이시나가 서지훈의 살기에 대응한다. 그녀의 표정에선 더 이상 장난기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뿜어내는 기운에 공간이 오염되어간다.
“죄송합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봐야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하…”
품속에서 느껴지는 자그마한 몸부림에 그녀가 남기고 간 마지막 미소가 떠오른다.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인 에르스를 바라보며 서지훈은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서지훈은 주먹을 움켜쥔 채 에르스를 노려보았다. 에르스를 보호하기 위해 라이시나가 서지훈의 앞을 막아 서려 했지만 에르스는 그런 라이시나를 저지한다.
“에르스?”
“죄송합니다…”
에르스는 다시한번 서지훈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그런 에르스의 모습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던 서지훈은 결국 등을 돌렸다.
“하… 됐다. 이미 지나간 일이야… 하지만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다”
“…”
“그래서 우리가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지?”
“저와 했던 계약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언젠가 부탁을 들어 달라고 했던 그걸 말하는 거냐”
“그렇습니다”
“… 여기까지 와서 뭘 더 바라는 거냐”
“언젠가 다가오는 미래를 위해 그 아이를 지켜주십시오”
“지켜달라니… 무엇으로부터?”
“인간들로부터, 그리고 그 힘이 엇나가지 않도록 그 마음을 지켜주십시오. 당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믿고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어”
“…”
“내 역할은 여기서 끝이야”
“그렇습니까…”
“대신…”
서지훈은 품에 안고 있던 아들을 조심스럽게 사쿠라에게 건네 주었다.
“사쿠라.. 현이를 부탁할게”
“응…”
“잠깐! 그 아이가 이곳에 남는다면 나도 이곳에 남겠어”
“라이시나?!”
“당연한 거야. 저 아이의 몸에 심어 둔 봉인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반쪽짜리 봉인이니까 당연히 내가 옆에서 관리를 해야지”
“정령계는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거긴 괜찮아. 나 말고도 둘이나 더 있으니 어떻게든 유지되겠지”
“하지만…!!”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녀석이 누구를 걱정하는 거야?”
“라이시나!”
“너는 어서 네 자리로 돌아가기나 해. 네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균열이 생기고 있잖아”
“후…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부탁드릴게요”
“걱정하지 마”
에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순식간에 에르스의 몸을 집어삼킨다.
에르스가 사라지자 라이시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로 주위를 둘러본다.
“후후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할게?”
세 사람은 그런 라이시나를 바라보며 왠지 모를 두통을 느꼈다.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결국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다.
“후 나도 이제 슬슬 가볼게”
서지훈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아들의 모습을 눈에 새기며 아직도 잠들어 있는 그 자그마한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었다.
“사쿠라… 현이를 잘 부탁해”
“응.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낼게”
그녀들이라면 믿을 수 있다. 그렇기에 서지훈은 안심하며 등을 돌린다.
“오빠…!”
사쿠라는 끝내 참지못하고 떠나려는 서지훈의 옷깃을 붙잡는다.
“정말로 어디로 가는지 안 알려주는 거야?”
“미안…”
서지훈이 몸을 숨기려는 곳은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되는 곳들 중 하나, 사쿠라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쿠라는 미련이 새어 나오지않게 입술을 깨문 채 붙잡았던 옷깃을 놓아주었다.
“그럼 두 사람 다 잘 있어”
“응…”
“또 쓰러지지 말고 몸 조심해”
점점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며 억지로 눈물을 삼켜낸다. 하지만 끝내 한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쿠라… 감기 걸리겠다. 어서 들어가자”
김지현은 들썩이는 어깨를 토닥여주며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일부러 자신을 망가트림으로써 차원의 균열을 발생시켜 다른 차원의 힘을 끌어들이려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균열을 통해 또다른 재앙이 넘어올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죄악의 고리를 풀어줄 ‘열쇠’는 충분히 모였다. 다가올 미래에 그들의 존재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곧…”
에르스는 점점 희미해지는 자신의 존재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1부 Another World 프롤로그 그 세계의 모순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