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그 길을 자신의 의지로 다시 오른다.
가문의 조율자들에게 서지훈의 존재가 달가울 리는 없다. 더군다나 결계의 입구를 무력으로 뚫고 올라온 상황, 산을 올라가는 서지훈의 존재를 그들이 모르고 있을 리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간간히 멀리서 느껴지는 기척은 그저 감시가 목적인 듯이 일정거리이상 다가오지 않는다. 그들이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데엔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함정이라고 할지라도 지금은 그저 이 길을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서있는 문을 넘어 가문으로 들어선다.
서지훈이 문을 넘어서는 순간 수십의 조율자들이 뒤를 가로막았다. 어차피 서지훈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돌아갈 생각이 없다. 서지훈은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서정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나가더니 결국 네가 필요해지니 다시 가문을 찾는 것이냐?”
“지애가 많이 아픕니다…”
“알고 있다”
“가주님…!”
서지훈이 서지애를 살리겠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세계의 정보를 관리하는 조율자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지애를 도와주십시오…”
서지훈은 가문의 조율자들이 보는 앞에서 서정욱에게 무릎을 꿇었다. 과거의 서지훈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서지애의 상태가 그만큼 좋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망할 새끼가…! 그 정도로 위험하다면 왜 좀 더 일찍 찾아오지 않은 거냐!”
서정욱의 외침에는 딸에 대한 걱정과 서지훈에 대한 분노가 담겨있었다.
“지애보다 네놈의 자존심이 더 중요했던 거냐 그러려고 내 딸을 데리고 간 거냐고!”
“죄송합니다”
움켜쥔 주먹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린다.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서지훈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딸의 행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서지훈 뿐이었기에 서정욱은 애써 살기를 억누르며 서지훈을 일으켜 세웠다.
“안내해라! 당장 출발하겠다”
서정욱은 곧바로 단주들을 소집하여 서지훈을 따라 가문을 나섰다. 겨우 붙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서지훈은 초조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런 곳에 자리잡고 있었을 줄은…”
서지훈의 뒤를 따라가던 조율자들은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요새에 걸음을 멈추었다. 사실 공간의 가문은 서지훈과 서지애를 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었다. 두 사람이 조율자들을 피해 공간의 가문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결국 두 사람의 정확한 위치는 찾아낼 수 없었다.
눈앞에 자리잡은 거대한 결계를 바라보며 그들은 자신들이 어째서 두 사람을 찾아낼 수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은차산의 결계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의 결계였다.
“하…”
서지훈을 따라 결계의 내부로 들어선 조율자들은 그곳에 펼쳐져 있는 또 다른 세계에 질렸다는 듯이 서지훈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세계로부터 격리된 거대한 공간, 그 내부에는 또 다시 수백의 공간들이 마치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서지훈의 안내가 없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서지훈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분명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곳의 결계는 이미 한 사람이 유지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서지훈도 그만큼 필사적이었다는 뜻이리라, 이쯤 되니 서정욱도 어느정도 서지훈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서지훈의 의지에 따라 땅에 박혀 있던 마력석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력석의 배치가 바뀜에 따라 결계가 변화하며 자그마한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애는 안에 있습니다”
“알겠다”
서정욱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힌다.
“혹시 미행이 붙었을지도 모르니 너희는 주변을 지키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가자…”
서정욱은 서지훈과 함께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제대로 된 문이나 창문조차 없는 허름한 집, 안으로 들어가자 초라한 내부가 보인다. 지난 십 년 동안 이렇게 살아왔던 것일까, 서정욱은 씁쓸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있는 것은 그저 생활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물건들 뿐이다. 그것들조차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버리고 떠날 수 있는 그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누워있는 자신의 딸을 발견한 순간, 서정욱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한걸음, 한걸음, 서정욱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자신의 딸에게 다가간다.
“지애야…!”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분명 그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십 년 만에 만난 딸의 모습은 자신이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었어야 했던 딸은 지금 자신의 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서정욱은 그토록 그리워했던 딸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왔어…?”
따듯한 손길이 자신을 감싸는 것을 느낀 서지애가 힘겹게 눈을 뜬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것은 서지훈이 아니었다. 슬픈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 사람, 많은 것이 변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빠…”
꿈이다. 그녀는 그것이 꿈이 보여주는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꿈이 아니고서야 자신의 아버지가 이곳에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꿈에서도 시간은 흐르는 것일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얼굴은 많이 늙어 있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응…”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그저 잠시라도 이렇게 바라보고 싶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따듯한 손길이 너무나 그리웠다.
“아빠...”
서지애는 고통 속에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정신을 잃었다. 감겨진 그녀의 눈가로 한줄기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
서정욱은 조심스럽게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이를 악물었다.
“네가 바라던 것이 이런 것이었냐”
“…”
“도대체 왜 이제서야 찾아온 거냐.. 왜 이렇게 늦게 찾아온 거냐고…!”
주름진 눈가로 참고 있던 눈물이 고인다.
“이런 모습을 보여줄 거라면… 아니 애초에 이렇게 될 것이었다면 지애를 데리고 가지 말았어야지…!”
“죄송합니다…”
“가문으로 돌아와라”
“…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럼 이대로 지애가 죽어가게 놔두겠다는 것이냐!”
“…”
“네 녀석이 지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거냐”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질타에 서지훈은 고개를 숙였다.
“네가 진정으로 지애를 살리고 싶다면 가문으로 돌아와야 할 거다. 만약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때는 강제로라도 지애를 데리고 갈 것이다”
“가주님…!”
“일주일… 일주일의 시간을 주마. 그때까지 대답이 없다면 내가 직접 지애를 데리러 오겠다”
사실상 서지훈에게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정욱은 하나밖에 없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더 이상 네놈의 어리광을 받아 줄 생각은 없다.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여라”
“…”
“혹시라도 또다시 숨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서정욱은 고개를 들지 못하는 서지훈을 뒤로한 채 밖으로 나간다.
“가문으로 돌아가자”
“정말 이대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그래… 지금은 이대로 돌아간다”
“알겠습니다”
당장이라도 딸을 데리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시간을 준 것이다.
서정욱은 씁쓸한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하…”
남겨진 서지훈의 눈가로 투명한 눈물이 흘러 내린다. 떨어진 눈물은 그녀의 눈가에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