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악!"
동이 트자 방이 밝아졌다. 그녀가 소리치는 통에 그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으악! 왜, 왜요? 뭐, 바퀴벌레라도 있어요?"
"악, 파랑씨? 파랑씨는 여기 왜 있는 거죠? 난 왜 여기 있고? 여긴 어디에요?"
헝클어진 머리에 부스스한 얼굴로 로사가 이불을 몸에 감싼 채 파랑을 쳐다봤다. 그녀가 침대를 차지한 덕분에 그는 바닥에서 홑이불을 둘둘 감고 자고 있었다.
"아, 난 또...놀라라."
"이게 무슨 상황이냐구요? 여기 어떻게 내가 온 거에요? 그리고...내 옷, 옷은요?"
"저기 의자에..."
"설마 지금 내 옷을 벗긴 거에요?"
그녀가 눈에 불을 켜고 파랑을 쏘아봤다.
"나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술에 취한 여자 덮치는 그런 파렴치한은 아니라고요."
"그럼 이 상황은 뭔데요?"
"아...기억 안 나요?"
"뭐를요?
"그거 혼자 다 벗은 거에요. 게다가 나도 벗겼다고요. 이것 봐요. 여기 내 가슴팍하고 등짝에 손톱 자국."
그가 윗통을 벗어 그녀에게 보여주자 로사는 눈을 가렸다.
"아, 왜 옷은 훌러덩 벗고 그래요? 말해주면 되지."
"말하면 곧이 듣게요? 날 지금 성추행범으로 몰고 있는데?"
정말이지 그의 상반은 하루 사이에 손톱 독까지 부어올라 갈갈이 채찍이라도 맞은 형국이었다.
"이거 누가 보면 완전 오해할 상이라고요. 마치 엄청나게 변태스러운 밤을 보냈다고 할 거라고요."
"변태?"
"메조키스트와 새디스트의 만남이라고 할지도 모른다고요."
"내가 이랬다고요?"
"그럼 내가 혼자 외딴 모텔방에서 자해나 하고 있겠어요?"
"헐..."
"어디까지 기억나는 데요? 아, 이건 기억하겠지."
그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어? 이건 어디서 났어요? 내 거잖아요."
"이것까지는 기억 나나보네."
"이건 내가 2년 전에 산...엥? 새 거네?"
"이것도 기억에 없는 거에요? 이거 타겠다고 사람들 앞에서 옷 벗고 춤추겠다고 한 사람이잖아요."
"누가요? 내가요? 내가 옷을 벗었다고요?"
"아, 이 샘...정말 아수라백작도 아니고...술주사에요? 필름이 끊긴 거에요?"
"미쳤다고 노트북을 타겠다고 그랬다고요? 완전 말도 안 돼. 그럼 진짜 내가 벗은 거에요?"
"벗기 직전에 내가 구했죠. 내가 벗었다고요."
"엥?"
"나 어디 가서 춤추다 벗고 하지 않거든요. 프로가 그렇게 싸게 놀면 격이 떨어지죠. 그런데 샘이 너무 너무 간곡하게 저걸 원해서 내가 받아주려고 벗었다고요."
"헐..."
잠시 말을 잃은 그녀였다. 그러다 문득 뜬금없이 그에게 물었다.
"근데...어디까지 벗었는데요?"
"네에?"
"아, 아니에요."
얼굴이 빨개지는 그녀였다.
"진짜 기억이 없으시군요."
"아, 암튼 난 기억이 안 나요. 모, 모른다고요."
"허, 참...청문회도 아니고 모른다면 끝이네."
"어쨌거나 우리는 안...한 거죠? 그렇죠?"
"그럼요."
"흠, 흠...그럼 됐고. 다행이네요. 저기, 이제 상의 좀 입으시고 뒤로 돌래요? 옷 좀 입게요."
"아, 네, 네."
그는 입을 삐죽거리며 상의를 휘리릭 입었다. 아직도 아쉬운 마음 한가득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입맛만 쩝쩝 다실 뿐 이제와서 어제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그럼...그 노트북은...어쨌든 내가 타긴 탄 건죠?"
"네?"
"뭐, 어쨌든 내가 참가해서 탄 거잖아요. 주세요."
"네, 그러세요."
"파랑씨 오토바이로 갈 거죠?"
"그럼요."
"아, 어쩐지 일어나는데 엉덩이가 베기더라. 양아치 자식 피해 꼬불꼬불 가는 걸 죽을 힘을 다해 끌어 안았더니 팔뚝에 알이 다 생겼네."
그가 노트북을 넘겼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녀가 섹시댄스대회에 참가했다는 걸 기억하고 있고, 그의 오토바이를 탄 거랑 양아치 차를 피해 도주했다는 걸 어떻게 기억하는 거지? 분명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사람이 말이다. 그래서 그가 은근 슬쩍 물었다.
"나한테 오늘 맥주 산다고 했죠? 그 약속은 지킬 건 가요?"
"맥주가 아니라고 양주겠죠."
그녀가 옷을 입으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이에 그는 어이가 없었다. 세세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감쪽 같이 필름이 끊긴 것처럼 위장하다니 참으로 여우스러웠다. 그런데 문제는...그게 파랑은 얄밉지가 않다는 거였다. 그냥 귀여웠다. 이 사실을 밝혀 당황스럽게 만들까 싶었지만 여기까지 하는 걸로 했다. 왠지 이런 기회가 또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밖에 나와서도 그녀는 파랑의 오토바이를 한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아주 익숙하게 올라탔다.
"오늘 일은 피차 없었던 걸로 합시다."
"없었던 걸로 하기엔 증거가 있는데요?"
그가 능글맞게 그녀가 든 노트북을 쳐다봤다.
"어떻게 보면 저게 우리 둘 사이의 결실이죠. 힘을 함쳐 출산한 거 아닙니까?"
"어머,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아니, 파랑씨가 뭐 슈퍼컴퓨터라도 되요? 어떻게 인간이 노트북을 낳아요? 내가 프레데터도 아니고 어떻게 기계를 낳습니까?"
"와...여기서 나이가 나오네. 프레데터가 웬 말이래?"
"아, 그거야...인터넷 검색하면 나오는 거죠."
"설마 그걸 영화관에서 본 건 아니죠?"
"네에? 뭔 소리래? 그땐 15세 관람불가...아, 이런..."
"엥? 그럼 나이가 지금 몇이라는..."
"나도 들은 거에요! 빨리 시동 걸어요. 오늘 수업 있는 거 몰라요?"
"아, 네, 네..."
그가 못 이기는 척 바이크에 올랐다. 그리고 발을 굴렀다. 해가 중천으로 뜨고 있었다, 그녀가 또 다시 매서운 손바닥으로 그의 등짝을 쳤다.
"달려, 이랴!"
"아, 쫌...!"
그녀가 파랑의 투정을 모른 척하며 그의 등 뒤에서 안 보이게 웃었다.
***
시아의 핸드폰 금단 현상은 학교에서도 이어졌다. 손톱에, 볼펜까지 잘근잘근 물고 있는 그녀를 보자니 린은 친구로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내가 도저히 오빠 가방은 뒤질 수가 없었어. 내가 하려고 하니 이미 눈치채고 자기 주머니 속에 니 폰을 쏙 집어넣더라니까."
"여우 같은 인간이야. 그 인간 으..."
이틀 됐을 뿐인데 눈가에 다크써클이 먹구름처럼 얼룩져있었다.
"오늘 학원에 가면 잘 구슬려봐. 힘으로 하거나 꾀를 내거나 하지 말고. 알잖아, 서연대 출신인 거...똑똑하다니까. 니 머리 위에 있어."
그때 시아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누가! 누가 내 머리 위에 있대! 지가 똑똑해봤자지. 그래봐야 청소년 성추행범에 절도범이라고! 흥!"
그런 그녀의 외침을 모두가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 씩씩거리며 교실을 나가고 있었다. 린은 한숨을 쉬었다.
"아...우정이냐, 사랑이냐 그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