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아... 아기? 정말 아기요?”
작은 의자에 걸쳐놨던 몸이 차가운 바닥으로 정처 없이 허물어졌다. 입술은 말라붙은 건지 쉽사리 소리를 내지 못했다.
눈에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정말 아이를 가지고 있었던 거야? 그의 아이를?
로넨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목이 멘 소리를 뱉어냈다. 내 안에 귀한 아기가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난 날 동안 그렇게 살았는데.
의원은 딱딱한 바닥에서 끅끅 우는 로넨을 보다못해 한쪽에 있는 간이 의자로 데려다주었다.
임신 소식을 알고 나서 우는 여인들은 꽤 보았지만 이리 서럽게 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입고 있는 차림새가 눈에 띄었다. 대충 봐도 귀한 옷감으로 만들어졌으나 구겨지고 흙물이 들 때까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사실 혼자 임신 사실을 확인하러 온 것만 해도 이상했다. 지난 2년여 동안 대체 무슨 일을 겪고 왔기에.
할 말이 많이 보이는 의원을 앞에 두고 로넨은 얼굴을 가리던 손을 떼고 훌쩍훌쩍 눈물을 닦아냈다. 그가 손수건을 가져다주자 조만한 얼굴에 가득하던 물기가 점차 사라졌다.
“저... 이 아이 낳고 싶어요...”
로넨이 손을 뻗어 의원의 팔을 덥석 잡았다. 순간 그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그게 뭐가 문제라고? 쉽게 답을 해주려던 의원의 입이 아교를 바른 듯 굳었다.
“아이. 정말... 정말로. 낳을 수 있을까요?”
아까 잡았던 맥은 확실히 임신이 맞았으나 불안전한 상태였다. 아직 조심해야 할 시기인데 몸에 무리를 준 일들이 있던 모양이었다.
의원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 불안에 떨고 있는 두 손을 잡아주었다. 아기를 계속해 부르고 있는 것을 보니 어느새 엄마가 된 아이부터 진정시켜야 했다.
로넨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넋이 나간 채 뱃속의 있는 아기를 찾았다. 어릴 때부터 여린 데다 착한 아이였으니 작은 일에도 큰 상처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기 아빠는 어떤 사람이냐.”
그제야 로넨은 눈을 깜빡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아기 생각에 그를 잠시 잊고 있었다. 그에게도 이 소식을 빨리 알려줘야 하는데.
로넨은 눈앞의 의원을 똑바로 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손을 배 위로 올려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이 안에 아기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의원은 진심이 역력한 로넨의 말을 들었지만 어째 감이 좋지 않았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겠다만. 다년간의 의사 생활은 해온 감이었다.
고개를 아래로 콕 박고 작은 탄성을 내뱉는 로넨을 빤히 보던 의원은 다시 한번 손목을 내어달라 했다.
다시 맥을 짚어봐도 나이 든 의원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정말로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지켜온 것이 천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난 한 달은 힘들었지?”
“네... 네. 음식도 안 넘어가고 아까는 배가 아프고….”
로넨이 아까 몸의 맥을 못 추릴 정도로 아팠다는 말까지 하자 의원은 주름 잡힌 미간 아래로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은 그저 운이 좋았던 거다. 아기... 위험한 상황이라는 거 알고 있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욱 눈에 띄게 마른 모습을 보니 한숨만 푹푹 나왔다. 이런 애를 어떡하면 좋아. 더 큰 어른으로서 해줄 말이 없었다.
“돌아가면 아기 아빠한테 말하고.”
그 말에 로넨의 눈동자에 다른 것이 떠오르는 듯해 의원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문 쪽에서 서성거리면서 이미 알고 있는 몸 상태를 묻는 아이에게 더해줄 말이 없었다.
그저 몸에 충격을 줘선 안 된다는 말 말고는.
로넨은 나가기 직전 드레스 안쪽에 숨겨 두었던 금화 몇 잎을 꺼내서 문 바로 옆에 위치한 테이블 위에 슬그머니 올려두었다. 황후궁 안에 있는 것을 들고 온 것이었다.
그때 귀신같이 반짝이는 금화를 발견한 의원은 문밖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로넨을 부리나케 뛰어가 잡았다.
“로넨! 여기 시세 알잖아!”
결국 완전 범죄에 실패한 로넨은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냥 모른 척 가지면 되는데. 하지만 그가 이 금화 몇 잎을 가져야 할 핑계는 많았다.
“아저씨가 우리 엄마 맨날 치료해줬잖아요. 그리고 이곳에서의 일은 이미... 까마득한 과거가 되어버렸어요.”
책상에 올려진 금화를 도로 주워 의원의 손안에 꼭 쥐여준 로넨은 다시 드레스 위로 배를 어루만졌다.
의원은 로넨의 정체에 대해 다시금 의구심이 들다가 결국 한 손에는 금화를 쥐고 한 손으로는 문을 열어주었다.
“감사합니다.”
로넨이 문 아래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의원은 손바닥을 펴 받은 금화의 개수를 새 아렸다.
자그마치 여섯 개. 한 손에 집기도 힘든 금화는 이 근방에서 최소 십 년은 먹고 살기 충분한 금액이었다.
받으면 안 될 것을 받아버린 것 같아 의원은 마음 한쪽이 무거워졌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황후 폐하.”
“응. 괜찮아.”
작은 마차 앞에서 들리는 속닥거림은 누군가가 들었다면 놀라 까무러칠 호칭이었다. 로넨은 사복을 차려입은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로 조심조심 발걸음을 올렸다.
지켜야 할 것이 생긴 탓이었다. 익숙한 연갈색 머리의 남자는 살몬 옆에 매일 붙어있는 남자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 혹시 그윈 경 동생이야?”
“네. 그렇습니다. 오늘 처음 뵙습니다. 근데...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주위에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자 연갈색 머리 기사는 마차의 문을 닫고 짧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맙다고 말하기도 전에 기사는 모습을 감추었다. 로넨은 등받이에 몸에 기대고 시선을 배 위로 내렸다.
정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였다. 로넨은 속 깊은 곳에서부터 밀고 올라오는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내가 어떡하면 좋을까 아가야?”
그와의 사랑의 결실이 분명한 아인데.
솔직히 말해 자신이 없었다. 존재를 알자마자 지키고 싶었는데. 내가 널 지켜줄 수 있을까? 내가?
지금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포근하게 감싸줄 수밖에 없었다. 로넨은 부드럽게 배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우선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멀리해야 했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고 했으니.
무척이나 소중한 아이였다. 그와 내 아이.
“... 말하면 기뻐해 줄까?”
지금 상황이 어찌 되었건 아이가 생긴 것은 당연히 축복받을 일이었다. 이 안에 있는 아이는 딸일까 아들일까. 그를 닮았으면 좋겠는데.
그 전에 아이를 무사히 낳는 것이 더 중요했다.
로넨의 바람이 하나둘 쌓여가고 아까는 분명 멀기만 해선 길이 금세 끝나가고 있었다. 투명한 창밖으로는 점점 화려해지는 황궁이 보였다.
“황후 폐하. 잘 다녀오셨어요?”
“응. 잘 다녀왔어.”
비토리어는 떠나기 전과 확연히 로넨의 밝은 기색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웃음 띤 얼굴은 몇 주 동안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치 몇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로넨은 이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가장 먼저 전해줄까 고민하다 결국은 입을 다물었다. 그게 어떠한 파장을 일으킬 줄도 모르고.
‘그에게 먼저 말해야지.’
*
순간 황량해져 버린 티파티의 중심을 다시 잡은 건 발레리안 부인이었다. 그녀는 안 그래도 완벽한 연둣빛 머리칼을 슬쩍 정리하곤 얼빠져 있는 오를란도 부인을 쳐다보았다.
“네? 네. 발레리안 부인.”
오를란도 부인을 매번 챙겨주던 엘리오르가 황후를 부축해 잠시 자리를 비운 탓에 그녀는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오를란도 부인도 발레리안 부인도 아닌 테이블 중앙쯤. 어중간하게 앉아있는 쨍한 금발의 부인이 말을 꺼냈다.
“왕녀가 황제의 아이를 가진 거랍니까?”
“그렇지 않겠어요? 아 그래서 이제껏…. 불쌍해라.”
그러자 테이블 뒤쪽에 위치한 나이 어린 부인들 사이에는 안타깝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통적으로 키우고 있는 아이들이 어린 탓이었다.
아이를 얼마나 어렵게 낳았는지 멀지 않게 기억하고 있었다. 공통적으로 한 두어 살쯤 되는 아기 엄마였다.
갑작스레 티파티의 분위기가 자리에 없는 황후 쪽으로 돌아가자 오를란도 부인은 발레리안 부인의 눈치를 봐가며 말을 꺼낼 타이밍을 엿봤다.
하지만 아까보다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도 불쌍한 여자가 아닌가. 이제껏 모진 수모를 겪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는데.
저였어도 가지고 있는 아이를 잃어버리면 하면 매일 통곡을 할 것이다.
“...분위기가 왜 그래요? 황후를 내쳐야 한다는 걸 잊으셨습니까?”
꽤나 날카로운 말투가 들렸다. 귀족파를 위해서라면 이유를 가리지 않고 황제의 옆자리를 우리의 사람으로 채워야 했다. 물론 알고 있었다.
웅성거림이 가속되며 각각 나누어져 이야기를 나누던 무리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활짝 핀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는 아까 그 금발의 부인이었다.
그 눈동자들은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그 속도대로 따라붙었다. 얼마 안 가 발걸음을 멈추고 비어있는 상석 옆에 앉아있는 발레리안 부인에게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황후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던 엘리오르와 부딪혔다. 그러자 인상을 찌푸리고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왜 그 아이가 황제의 아이라고 단정 지으세요?”
그 황당한 발언에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던 발레리안 부인의 차분함도 와장창 깨졌다. 그리고 이곳에 온 내내 앙다물고 있던 입술을 뗐다.
“...그럼 자네는 황후가 품고 있는 아이가 누구의 아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이러니 귀족파가 황제파에 뒤진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었다.
황제가 매번 황후의 침실을 찾은 것을 황궁을 오가는 사람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황제만 왔다 가면 황후가 지쳐 쓰러져 있는다는 말도 있건만.
이번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한곳으로 모인 시선을 즐기던 금발의 부인은 부채를 탁 소리가 나게 접더니 드러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4황자의 아이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