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예요, 지금.]
탁탁탁-
[ㅣ]
[ ]
[ㅣ]
[보고 싶어.]
탁탁탁-
“하….”
거진 48시간 깨어 있는 머리로 생각해 낼 수 있는 인사말을 모두 쏟아내고 나서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이 우유부단의 결말이 정해졌다.
‘10.04’의 이름 뒤에 숨어,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는 이수를 모른 척 지나가 주는 것.
리마 증후군에 걸리기라도 한 듯, 건은 그녀가 가여웠다.
그녀는 전력으로 질주해도 결국엔 덜미가 잡히고 마는 가젤. 곧 어깨가 다 으스러지게 꽉, 제 품에 안길.
어쩌다 술래가 되어 있는지 모를 이 숨바꼭질은, 이쯤에서 그만 끝이 나야 한다.
그러니 어설픈 접근은 관두고, 뒷발로 잔잔히 흙먼지 일으키며 확실한 한 방을 준비하련다.
달칵, 쪽지 창을 닫은 건은 이수의 블로그로 들어갔다.
찰나의 순간을 담은 사진 몇 장, 영어로 간단히 표기된 날짜와 장소. 사진이라고 해 봤자 풍경이 전부다.
“자긴 팬클럽까지 들어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봤을 거면서… 치사해.”
미운 말의 끝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안도의 웃음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 그 안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사랑. 지금쯤 모두 도말되어 작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까 봐 무서웠다.
그러나 그녀는 미쁜 사람이었다. 편지 말미에 적어 둔 약속을 착실히 지키고 있었다.
연락선 _ 안도현
네가 떠난 뒤에 바다는 눈이 퉁퉁 부어올랐다
해변의 나리꽃도 덩달아 눈자위가 붉어졌다
너를 잊으려고 나는 너의 사진을 자꾸 들여다보았다
잊으려고 들여다본 사진이 아닌 거, 안다.
그녀가 쓴 우리들 이야기, 그 글엔 그리움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서이수는 나를 잊지 못하였다.
[July 10th, Lake George, NY]
“…뉴욕.”
* * *
“Did you check the list?”
“10 teams, including the Little Mix’s special stage.”
곧 열릴 KPOP 페스티벌 참가팀을 줄줄이 꿰고 있는 이수는 동료의 물음에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It’s ele-ven, not ten.”
“What are you talking about? I just,”
“FYI, there is a list on the board. I heard that the last team barely made it.”
뭐라? 뒤늦게 한 팀이 추가 됐다는 말에, 이수는 일의 진행 상황을 적어둔 화이트보드 앞으로 갔다.
“누가 더 온단 거야….”
파란 펜으로 선명히 적혀 있던 터라 변경 사항을 확인하는 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그 이름을 발견하고 정신을 차리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을 뿐.
“여보세요, 선배.”
—이게 누구야. 집 나간 서이수가,
“칸 애들 이번 페스티벌 무대 서는 게 사실이에요?”
—싹퉁머리하곤… 넌 선배 안부 물을 줄도 모르냐?
정신을 차린 뒤, 이수는 자리로 잽싸게 돌아와 본사로 전활 걸었다.
오랜만의 연락이 대성은 반가운 듯했으나, 이수에겐 제법 급한 용무가 있었다.
“걔들이 뉴욕에 오냐구요…!”
—…깜짝아, 왜 소린 지르고 난리야. 귀먹을 뻔했네.
투덜투덜, 까칠한 게 여전하다.
—외국에 나가 있더니 내가 뭔 프로 하는지도 까먹었냐? 엠카 애들한테 물어봐.
그렇지, 담당자도 아닌 대성을 닦달할 게 아니지. 급한 마음에 그만 익숙한 번호부터 누르고 봤다.
알겠어요, 미안해요, 그렇게 전화를 끊으려 했던 이수는,
—…간다 그러는 거 같더라.
“뭐, 뭐라구요?”
엿가락처럼 늘어져 나오는 대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며칠 전에 윤재선이가 찾아왔더라고.
‘아… 서 피디님도 오랜만에 보고 싶다.’
‘서이수, 서이수 잘만 그러더니… 없으니까 피디님이냐?’
‘뉴욕에… 있다면서요, 지금? 잘 지낸대요…?’
—너 뉴욕으로 연수 간 건 어떻게 알았는지, 잘 지내냐고 묻길래 페스티벌 준비하느라 바쁠 거라고 해줬지.
‘아… 페스티벌….’
—그리고 얼마 안 있다, 지들도 간다대?
하, 목구멍에 힘을 줘 막고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이 화상, 진짜….”
—뭐?
귓가에 수화기를 댄 채로 이수는 책상 위에 얼굴을 묻었다.
가만히 이마를 대고 깊게 숨을 내쉬어 본다.
* * *
콘서트 당일, 공연장 앞엔 한국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여러 부스들이 마련되었다.
참가자의 대다수는 10대에서 20대, 작열하는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젊음의 열기로 공연 시작도 전에 장내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 시각, 이수는 저녁에 진행될 공연 리허설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하나둘 도착하는 아티스트들을 챙기기 위해 대기실을 찾은 그녀는 문 앞에 붙은 흰 종이 위, 검은 활자로 적힌 이름에 우뚝 멈춰 섰다.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주인 없는 빈방, 그래서 아직은 서늘한 공간 안에 발을 들여 이수는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그가 앉을지도 모를 의자, 그가 마실지도 모를 생수, 그가 볼지도 모를 거울.
이수는 제 마음 안에 갇혀 있던 건의 형상을 조용히 밖으로 꺼내며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가 온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해야 할지, 못 본 척 차갑게 지나가야 할지, 아직 결정 못 했는데… 생각만으로도 명치끝이 저릿하다.
먹먹해지는 가슴을 침 한번 꿀꺽 삼킴으로 달래며 이수는 뒤돌아 섰다.
“아, 비행기에서 잠 잘못 잤나 봐.”
“나처럼 딱, 어? 쿠션을 챙겨 왔어야지.”
문 쪽으로 몇 걸음 다가섰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주와 원해였다.
“너 안 졸려? 새벽까지 이불 밖 녹화하고 왔다면서, 비행기에서 눈 좀 붙이지.”
그리고….
“별로, 잠이 안 와서.”
깊은 밤, 고요를 깨고 머릿속을 가득 울리던 그의 목소리까지.
“…어떡해.”
반가운 건의 음성이 만든 파동도 잠깐,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이수는 정신이 아찔하여 발만 동동 굴렀다.
어떻게 하면, 나… 너와 만나지지 않고, 이 달콤한 악몽에서 깰 수 있을까.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선 워너원 멤버들은 소파와 의자에 나누어 앉으며 아이고, 아이고 앓는 소릴 했다.
“잠깐 쉬고 있어. 나가, 리허설 언제부턴지 알아보고 올 테니까.”
그렇게 매니저가 나가고, 멤버들은 조금 더 편한 자세로 휴식을 취했다.
재선은 건을 툭 치며 작게 소곤댔다.
“여기 어디, 서이수가 있단 건데…… 진짜 찾으러 갈 거야?”
“어.”
“아… 모르겠다. 너 알아서 해라, 형은 이만 빠질랜다.”
“고마워, 형.”
“치… 됐네요.”
재선에게 힘없이 웃어 보이는 건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하얗다. 아무래도 잠이 부족해 그런 듯싶다.
이 콘서트 때문에 무리하게 스케줄을 조정하느라 지난 며칠이 그에겐 정말 지옥 같았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서이수, 그 이름 덕분이었다.
건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올려놓을 데를 찾다, 마땅한 곳이 없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대기실 한쪽 구석에 있는 옷장으로 다가갔다.
쿵, 쿵, 쿵, 쿵.
아직은 마주할 용기가 없어 숨어버린 이수가 그 안에 있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바깥의 동향을 그저 소리로 짐작한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옷장 문고리를 잡는 건의 손.
파르르 떨리는 이수의 눈꺼풀.
끼이익,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는 옷장 문이 서서히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