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울고 난 후, 조금 진정이 되자, 내가 잠들고 난 후에 일어났던 상황에 관해 물었다.
“그래서, 그다음엔 무슨 일이 있었어?”
“먼저, 검사 결과, 아가씨께서 드신 것은 해독제가 아니라 독으로 판정되었습니다.”
‘뭐? 독을 먹었다고?’
모든 것을 운에 맡기며 다급히 마셨던 것이 독이라는 것에 대한 충격이 빠르게 나를 훑고 지나간 후에는 그 와중에 살아난 나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그럼, 난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독을 드셔서 사실 수 있었어요.”
“으음, 좀 더 쉽게 설명해줄래?”
“아가씨께서 드셨던 독과 이후 마신 독이 서로를 중화하여 상쇄되었다고 보시면 돼요.”
“그럼, 해독제는 무슨 용도야?”
일리아나는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이 난처하단 표정을 지으며 노엘을 슬쩍 바라보았다.
일리아나는 빠르게 눈빛을 주고받더니 말해주기 싫다는 듯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해독제는 아벨의 독을 해독하는 용도였다고 합니다.”
“허, 그럼 둘 다 살려주려고 했다는 거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리는 내 눈치를 살피며 일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건 과시와 위협인가?”
“그런 것 같아요.”
자신의 생존 사실을 알리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듯이 위협하려고 그 짓을 벌였다?
“······정말 그 자식 답네.”
그가 이런 일을 벌인 이유를 알아차리자마자 그의 다음 행선지를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나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나와 절대로 어울릴 수 없었던 나의 다른 가족들을 찾아 나와 아벨을 위협할 사람들을 늘릴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도록 두진 않을 거지만.
나는 섬뜩함이 은은하게 묻어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정도 안정되면, 위험요소들을 하나씩 없애 버리자.”
내 말에 노엘과 일리아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로써 더는 잃을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던 사람들이 다시 한번 뭉쳤다.
이번에는 서로를 지키기 위해.
***
“저기, 그런데요······.”
긴장된 공기가 흐르는 와중에 노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저희한테 아무것도 안 물어보시는 거예요?”
“무엇을?”
내 말에 노엘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그, 아가씨가 모르는 이야기라던가, 아가씨가 모르는 이야기라던가, 아가씨가 모르는 이야기 같은 거요.”
왜 내가 다시 태어났는지 묻지 않는지 궁금해하는 노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르르 미소 지었다.
“너희에게 묻고도 싶지만, 아벨에게 직접 들을래.”
자신에게 묻지 않는 것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 노엘이 귀엽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빵빵하게 부풀린 볼을 콕콕 찔렀다.
“그가 모든 일의 시작이잖아. 그가 계획했고, 그가 실행한. 그러니까 그에게 직접 듣고 싶은 거야.”
“······그렇군요.”
내 말을 귀담아듣던 노엘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벌떡 일어났다.
“그럼, 지금 바로 아벨을 불러오겠습니다!”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노엘은 문을 급하게 열고 밖으로 튀쳐나갔다.
“후후, 노엘도 참, 아직 다리도 안 나았을 텐데······. 예나 지금이나 너무 열정적이라니까.”
“그렇게나 말이에요. 불같은 성격은 안 변했더라고요.”
일리아나는 노엘이 문을 열 때 망가뜨릴 뻔한 문을 조심스레 닫으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저도 이만 물러가겠으니 편히 쉬세요.”
“그래, 이따 보자.”
“네.”
떠들썩한 사람들이 나가자 다시 조용해진 방을 가만히 둘러보며 얼마 안 가 서둘러 달려올 아벨과 노엘을 기다렸다.
***
“황후 폐하! 폐하를 모셔왔습니다!”
“그, 그래. 너도 이만 물러가서 쉬렴.”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생각보다 늦게 도착한 노엘은 그 사이에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방을 나갔다.
나는 노엘에게 시달렸는지 피곤해 보이는 아벨의 얼굴을 쓸어 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노엘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단지······.”
아벨은 지루한 설교를 듣고 오기라도 한 듯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리즈가 궁금해하는 것에 무조건 성심성의껏, 진실만을 대답하라고 오는 동안 설교를······.”
“하하, 고생했어.”
잔소리와 설교를 합한 거로 일리아나를 이길 자도 없었지만, 노엘을 이길 자는 더더욱 없었다.
특히나 한 시간 동안 자기 할 말만 늘어놓는 노엘을 앞에 두고 버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도 못 버틴 그걸 아벨이 당했다니······.
괜스레 그가 너무 측은해졌다.
그는 갑자기 날 꼬옥 끌어안더니 자연스럽게 침대 쪽으로 안내했다.
“아직 몸이 많이 안 좋을 테니 누워서 들어.”
“으음, 알겠어.”
앉아서 마주 보며 듣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그렇게 말하면 죽어도 반대할 것만 같아 입을 꾹 닫고 침대 위에 앉았다.
아벨은 내가 침대 위에 누웠으면 좋겠다는 눈빛을 하였지만, 내가 애써 무시하자 그냥 넘어갔다.
“노엘에게 들었어. 네가 모르는 이야기를 궁금해했다고.”
그의 말에 내가 빨리 말해달라며 고개를 마구 끄덕이자 그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 조금 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지루해하지 말아줘.”
“당연하지!”
그는 내 반응이 귀엽다는 듯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시작은 내가 너와 손을 잡았을 때부터야.”
***
“내 손을 잡아줘. 난 내 편이 필요해.”
대뜸 자신의 편이 되어 달라 말하는 테레스티아의 말에 아벨은 상쾌하게 웃어넘겼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황녀님의 편이라니요?”
테레스티아는 모르는 척 웃으면서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는 아벨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넌 아버지를 싫어하잖아. 나도 싫어. 그러니 같이 없애 버리자.”
아벨은 슬쩍 테레스티아에게서 손을 뺐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벨의 마음속에는 황가에 대한 경멸과 테레스티아의 말에 대한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자신이 황제를 싫어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걸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끽해야 그의 가족들과 친우들 정도였다.
그걸 눈치챈 사람의 등장은 아벨에게 색다른 호기심을 주었다.
하지만, 호기심과 황제를 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전부터 세워 뒀던 내 계획이 새어나가면 안 되지.’
악독한 황제를 죽이려 몇 년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온 계획을 황녀가 눈치채고 무산시키러 왔을 수도 있어.
어머니를 죽인 가짜 황후의 일을 감춘 사람의 딸이야.
자신의 편이 되어 달라 하고 나중에 역적으로 몰아갈 수도 있어.
황녀가 일부러 자신을 떠보려 하는 것이라 생각한 아벨은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으음, 신하 된 자로써 어찌 폐하를 없앨 생각을 할 수 있나요?”
“그럼, 넌 신하 된 자로써 백성들이 죽어 나가는 걸 보고만 있을 거야?”
아벨은 테레스티아의 흔들리지 않는 곧은 눈을 보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아, 이 사람의 부탁은 진짜구나.
내 계획을 눈치챈 것도, 일부러 나를 떠보려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황제를 없애려고 하는구나.
아벨은 뜻이 같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에, 그것도 황궁의 중심부에 있는 황녀가 자신의 편이 된 것에 감사하며 사르르 웃으며 테레스티아가 뻗은 손을 잡았다.
“그럴 리가요. 혹시 몰라 질문드린 겁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그런 건 무례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먼 훗날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찬 그들의 첫 만남은 완벽한 계략과 협력으로 이루어진 의도만이 그들의 주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
“여긴 비밀 통로가 있는 곳이야. 아버지가 전쟁이 날 때마다 날 앞에 세워 두고 도망치시는 곳이지.”
“예.”
테레스티아는 어둑어둑하고 비릿한 오물의 냄새가 코끝을 건드리는 비밀 통로로 아벨을 안내했다.
아벨이 테레스티아를 따라 통로의 끝에 도착하자, 그녀는 굳게 잠긴 문을 열쇠로 열었다.
“여긴 비자금과 강제로 압수한 가게와 집의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어.”
"폐하께서는 이곳을 모르시나요?"
"아버지는 모르셔. 이곳은 내가 만든 곳이니까."
아벨은 그렇군요, 라고 짧게 대답하고는 문서들을 쭉 훑어보다가 선명하게 찍힌 국새 자국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원본을 가져오면 없어졌다는 것을 눈치채기 쉬울 텐데요?”
“복사본을 두고 왔으니까 괜찮아.”
“얼마나 정교한가요?”
“도장 빼고 다 진짜처럼 되어 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황궁 안에서 그걸 눈치챌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거고.
아벨은 테레스티아가 말하지 않은 뒷말을 들은 듯한 느낌을 받으며 신기함에 피식 웃었다.
‘황녀씩이나 되는 사람이 저런 걸 알다니······.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기득권층, 그중에서도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는 황녀라는 지위를 가진 사람이면서 왜 황제를 없애려고 하는 걸까?
게다가 일 처리를 하는 저 솜씨 좀 봐, 보통의 황족들은 저런 고된 일은 안 하지.
호기심에 따라 그녀를 따라다니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관찰했다.
어디를 가든지 같이 다녔고, 무엇을 하든지 같이 하곤 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그녀의 확고한 마음을, 그녀는 강한 눈빛을 좇아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그녀가 다른 황족들과는 다르게 필수적인 성교육을 빠지는 대신 황제가 해야 할 일까지 떠맡고 있다는 것에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 사실을 그녀의 가족을 제외하곤 자신만 알고 있다는 것에 몰래 웃기도 했다.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보고 싶어졌고. 그녀가 환히 웃는 모습을 보면 점차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은 느낌이 진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테레스티아가 환히 웃으며 아벨에게로 달려왔다.
“아벨, 거기서 뭐 해?”
그녀의 미소, 목소리, 동작 하나하나가 눈에 다 들어오던 그 날, 아벨은 그제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 그것도 무척이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그녀의 곁에 있으면서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싶었다.
그날이 오긴 전까진 말이다.
***
테레스티아는 살기가 어려 있는 오싹한 눈을 하며 다급하게 아벨의 방 안으로 들어와 그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황녀님? 갑자기 무슨······?"
“아벨, 내 애인을 연기해줘.”
“황녀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벨이 자신의 살기에 몸을 살짝 떨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테레스티아는 분노와 살기를 아낌없이 표출했다.
“아버지가 그 개자식과 나의 약혼을 성사시켰어.”
“개자식이라 하심은······.”
“헬트 디지라 로드리게스 말이야!”
테레스티아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
“제발, 부탁이야. 어떻게든 파혼해야 해.”
아벨은 테레스티아를 자신의 품에 감싸며 괜찮다는 듯이 토닥였다.
“괜찮아요, 황녀님이 파혼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고마워······.”
테레스티아를 계속 토닥여주면서 아벨은 창문에 비친 그림자에게 입을 움직여 말을 전했다.
‘헬트 디지라 로드리게스에 대해서 조사해.’
‘존명.’
그림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 아벨은 혐오감에 몸을 작게 떠는 테레스티아를 더욱 꼬옥 안아주었다.
“지금부터 저는 에드워드, 에디입니다. 황녀님은 리즈라고 하죠.”
“그래······.”
아벨은 품에 안긴 테레스티아를 가만히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작게 속삭였다.
가짜 애인으로라도 계속 당신 곁에 있고 싶어.
당신이 원한다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