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 재가 되어가는 성. 귀가 아플 정도로 고함을 지르는 병사들. 서슬 퍼런 분노에 죽어버린 부패한 관리들과 가족들.
이 모든 것은 당연한 업보였다.
황제였던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들의 사치와 폭력, 그로 인한 어머니의 죽음은 어린 내가 혼자 견디기에는 너무 버거운 일들이었다.
그들의 횡포가 백성들에게까지 퍼지자 도저히 참기 힘들어 그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하려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편만 늘어져 있는 황궁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넓은 황궁에서 내 편 하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그날을 기점으로 차츰 날을 세우며 아무도 믿지 않고 오직 가족들과 함께 백성들의 분노와 야유 속에 죽으려 노력했다.
언제나 후환을 걱정하는 백성들은 내 결백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기에 내가 물귀신이 되는 것만이 그들을 제대로 처벌받을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잡아라! 테레스티아 황녀다!”
큰 소리를 내며 병사들이 내게 다가오자. 그와 약속했던 대로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순순히 잡혀주었다.
병사는 나를 강제로 꿇리더니 저 멀리 걸어오는 사내를 보고 경례를 했다.
“공작님, 황녀를 생포했습니다!”
“그래, 수고 많았다.”
이 잔인하고 참담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그는 나의 애인, 정확히는 애인인 척하는 아벨 살바토르였다.
아버지의 심복인 척하며 내 편이 되어준 그는 악독한 황가를 단죄하겠다는 생각이 확고했고, 그렇기에 나에게 쉽게 협력해주었다.
그에게 최고의 무기가 됐을 황실의 비밀통로, 내부 상황, 비자금이 적힌 문서를 전부 넘겨주었다.
그것들이 추진력이 되었는지, 그는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단죄를 이루었다.
나와 그로 인해 정리된 황가를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됐다.
죽기 직전까지, 숨이 멎을 때까지, 나는 사람들 기억 속에 악녀로 남아야 했다.
“아아, 에디. 나의 에디. 날 구하러 와준 거구나! 역시 너라면 와줄 줄 알았어!”
그는 낮게 혀를 차더니 냉소적인 어조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어차피 내일 처형당하겠지만, 조금이라도 편히 죽고 싶으면 조용히 있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나는 화가 난 척 눈을 희번득 뜨며 버둥거렸다.
“에디, 넌 내 애인이잖아?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애인? 하, 애인이라······.”
그는 우습다는 듯이 조소를 흘리고는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내가 정말 당신의 애인인 줄 알았어?”
순간 터져 나올 것만 같았던 뻔한 대답을 삼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정말 악녀였고 멍청했다면, 당신을 내 애인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미 원하는 것이 뚜렷한 우리는 절대 애인이 아니야.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일 뿐.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만 같은 표정을 지으며 애절하게 물었다.
“······넌 내 애인이 아니었던 거야?”
나는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분을 토하듯이 소리쳤다.
“그럼 네가 나한테 해준 건 다 뭔데? 날 걱정해주고, 위로해준 건 다 뭔데?”
정말 이런 말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악녀라는 것을 모두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우리 좋았잖아. 손도 잡고, 안기도 하고, 키스까지 했잖아? 너도 좋아했잖아?”
“그게 진짜 좋아하는 걸로 보이셨습니까?”
나는 그의 말과 혐오한다는 듯이 바라보는 눈빛이 충격적이라는 듯이 움찔했다.
그는 무릎을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랬다니 다행이네요. 그만큼 당신이 제 연기에 잘 속아 넘어갔다는 얘기니까.”
“에디!”
그는 내가 버둥거리며 소리치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짓을 했다.
“끌고 가.”
“예!”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일이 계획대로 흘러간 것에 대한 만족감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겨우겨우 참으며 연기했다.
“아둔한 것들아! 지금 황녀인 내가 아닌 저런 공작 따위의 말을 듣는 것이냐? 이젠 너희의 주인도 못 알아볼 정도로 멍청해진 거구나!”
내일 아침, 내가 처형될 때까지 계속될 이 연기를 마지막으로 내 모든 계획은 성공했다.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이기에 차마 그를 향한 내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것이 슬프긴 하지만, 내 마음은 오래전부터 바라왔던 단죄를 위해서라면 버릴 수 있었다.
“당장 놓아라! 안 그럼, 내 너희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감옥 안으로 끌려가면서 아무도 모르게 후련하게 웃었다.
“이 멍청한 것들아, 당장 놓아라! 난 고귀하고 위대한 샤르레지나 제국의 황녀란 말이다!”
“닥치고 빨리 들어가!”
병사는 나를 감옥 안으로 거칠게 던지듯 밀어 넣고는 문을 잠갔다.
“내일 아침까지 조용히 있어!”
그는 일부러 나보고 들으라고 그러는지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쯧, 이래서 악마 같다는 말이 나오는군.”
그가 혀를 끌끌 차며 나가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에디가 들어왔다.
그가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태연하게 웃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너라면 왠지 올 것 같았어.”
“그러셨습니까?”
그를 밀어내려 언제나 그랬듯이 사르르 웃으며 말을 꺼냈다.
“에디······아, 이젠 이게 아니구나.”
“원하신다면, 에디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야, 처음부터 넌 에드워드도, 에디도 아닌 아벨이었잖아.”
복잡하다는 듯 입술을 꾹 닫는 그를 애써 무시하며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네가 날 찾아온 건 다 이유가 있겠지. 그래, 뭐 때문에 온 거야?”
내 질문에도 그는 아무 대답이 없이 그저 입술만 짓씹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그를 밀어내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숨겨둔 재물의 위치? 황실 금고에 다 들어있어. 강제로 빼앗은 집들? 그건 너한테 다 알려줬지. 그 외에도 다 알려줬는데, 뭘 더 바라는 거야?”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당신의 삶이요.”
“나의 삶? 왜? 나는 어차피 죽을 거잖아.”
나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의 삶을 왜?”
그는 세상 불쌍한 표정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황녀님의, 리즈의 애인으로서 리즈가 살아있었으면 합니다.”
그의 대답에 너덜너덜한 치맛자락을 꽉 쥐며 입술을 살짝 말아 깨물었다.
저 말은 거짓말이야. 그의 말에 속으면 안 돼.
그냥 형식적인 말이야.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한 것처럼, 그 망할 약혼자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야.
마냥 그가 좋다고 해서 덜컥 살겠다고 하지 마.
내가 죽지 않으면 이 단죄는 미완성으로 끝나버려.
나한테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 아니야. 단죄를 확실하게 끝내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거야.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 그가 뭐라 말하든 다 연기하는 거라고 생각해.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그의 말이 웃기다는 듯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거짓말하지 마. 너도 내가 죽기를 바라잖아. 내가 그런 것도 모를 것 같니?”
“아닙니다!”
그는 돌연 소리를 꽥 지르고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저는 진짜로 당신이 살아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가 그렇게 소리를 지를 줄은 꿈에도 몰라 깜짝 놀랐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그렇게 열심히 연기할 필요 없어. 그딴 연기도 이제 내겐 안 통하니까.”
“리즈!”
그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어떻게든 죽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의해서 죽는 것이라도······.
“이젠 다 끝난 사인데, 그렇게 부르지 마.”
“싫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넘어가지 않으려 눈을 질끈 감았다.
왜 날 살리려고 하는데? 왜 나보고 살아남으라고 하는데?
그냥 죽이면 안 돼? 차라리 뭐라 욕이라도 해봐. 날 악녀라고 욕하고, 매도하고, 손가락질해. 차라리 그렇게 해.
내가 널 사랑하지 않도록, 널 미워하고 저주하며 죽을 수 있도록. 제발 그렇게 해 줘.
그는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는 무릎을 꿇고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저는 단순히 악독한 샤르레지나를 없애기 위해서 애인인 척한 게 아닙니다.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나는 무표정을 한 채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전 정말 당신을 사랑해요. 제발 믿어주세요.”
그는 뭐가 그리도 애가 타는지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런 그가 불쌍해 당장이라도 다가가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와 나 사이에는 이 철창처럼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절대 그 선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전 제가 사랑하는 당신을 죽이기 싫습니다.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고, 꼭 제 옆에서가 아니더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내가 그런 걸 바라도 되는 걸까?
나는 행복할 이유도, 가치도 없는 사람인데, 나 같은 사람이 행복해진다면, 차라리 다른 사람이 행복해지는 게 낫지 않을까?
“저는 당신이 없는 미래는 상상해 본 적도 없단 말입니다!”
죽지 않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것은 나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 때였을 뿐. 나에게는 그와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할머니부터 아버지와 새어머니까지. 지독하게 얽히고설킨 이 악의 연쇄를 끊어야만 했다.
설령 목숨과 함께 사랑과 행복과 그 외의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죽음으로 악의 연쇄를 끊을 수만 있다면, 괜찮았다.
오히려 기꺼이 목숨을 버릴 것이다.
“제가 몰래 빼내 드릴게요. 어떻게든 살려 드릴게요. 그러니, 제발······부탁이에요, 같이 살겠다고 말해 주세요.”
그렇기에 나는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무표정이라는 가면으로 덮으며 울며불며 애원하는 그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싫어.”
그는 충격적이라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울상을 지었다.
“난 그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말리지 못 했어. 그러니까, 난 죽어 마땅한 죄인이야.”
내가 살게 해 주겠다고? 나를 몰래 빼내 주겠다고?
웃기지 마. 내가 빠지면, 우리의 목표는 완벽해지지 않아.
그러니까 나한테 도망치라고 하지 말고, 살아남으라고 하지 마.
“내가 죽어야 모든 게 완벽하게 끝나. 내가 살아남으면, 어떻게 될지는 너도 알고 있잖아?”
원망스러운 눈빛을 한 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을 짓씹으며 눈물을 또르르 흘리는 그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이게 바로 악녀의 말로에 어울리는 거지. 안 그래?”
"리즈!"
그가 내게 뭐라 말하려고 하자, 더는 듣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휙 돌렸다.
“이런 지지부지한 말싸움을 계속할 거면, 그만 가 봐.”
그는 한참을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내 손만 애타게 잡다가 일어났다.
“······다음 생에서는 절 사랑해주실 거죠?”
다음 생? 갑자기 뭔 뜬금없는 소리래?
다음 생이라는 건 기약 없고, 일어날 리도 없고, 가능성이 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정말 다음 생에서 그와 만난다면, 이런 이용하는 관계가 아닌, 정말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로 만나기를 아무도 모르게 바라보았다.
“그래, 다음 생에서 만난다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랑하자.”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슬며시 일어났다.
“사랑합니다, 리즈.”
“나도 사랑해, 에디.”
몸을 돌려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부디 당신은 행복하게 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