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야, 간신히 제 때 도착했네. 이 근방부터 철길 따라 쭉 올라가면서 양 옆으로 둘러보면 될 거야. 이제 들어가 봐야해. 나중에 또 보자.”
“9시에 끝난다고 했지? 끝나고 연락해라.”
“그 때까지 있으려고? 일단 알았어.”
태영이 뭔가 말하는 것 같았지만 7시 4분전이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유리문을 힘껏 밀고 넘어지듯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아, 오셨구나. 이 쪽으로 오세요.”
“늦어서 죄송해요. 끝나자마자 왔는데도 이 시간이에요.”
“아닙니다, 제 때 오셨어요. 이 쪽으로 들어가셔서 테이블 위에 있는 앞치마 착용하시면 됩니다.”
습관적으로 이상우의 머리 위를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가진 색도, 그 덩어리의 움직임도 알 수가 없다. 이상우에게만큼은 내 눈도 그저 평범하다. 이상우가 안내한대로, 튼튼해 보이는 검정색 롤러가 달린 반투명 모루 유리 미닫이문을 밀고 수업 장소로 들어갔다. 꽤 널찍한 작업공간이 등장했는데, 유리문을 경계로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비밀의 장소에 초대받은 기분이 들었다. 중앙에 커다란 정사각 테이블을 두고, 왼쪽에는 각종 재료가 정리된 선반이, 오른쪽에는 냉장고와 믹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유리문 맞은편에 커다란 오븐이 있다. 테이블은 검정색 철제 다리 위에 하얀색 인조대리석 상판을 얹어 만들어졌다. 검정색 페인트로 칠한 손잡이 없는 서랍이 문 쪽과 오븐 쪽에 세 개씩 달려있었다. 오븐과 냉장고, 믹서, 철판이 걸려 있는 랙은 모두 회색계열이었고, 재료를 정리해 놓은 흰색 선반에는 철제꽂이에 이름표를 넣을 수 있는 하얀색 플라스틱 바구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매장과 작업장을 전혀 다른 분위기로 만든 것은 벽면이었다. 오븐과 냉장고 등에 많이 가려있었지만 공간 전체의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연노랑으로 칠해져 있었다. 매장처럼 오픈한 뒤 하얀색 페인트를 칠한 천장과 매장과 달리 하얀색 타일이 깔린 바닥이 노란빛을 더 돋보이게 했다.
“준비 되셨나요?”
낯선 공간을 둘러보느라 이상우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제 목소리가 컸나요? 놀라셨어요?”
“아니에요, 이런 장소는 처음이라 구경하느라 들어오시는 줄 몰랐어요. 이 앞치마 사용하면 되죠?”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회색 앞치마를 얼른 짚었다.
“2시간이면 제과 수업하기에는 짧은 시간이니까 시작할게요.”
앞치마를 입고 가방에서 작은 수첩과 펜을 꺼냈다. 수첩을 넘기고, 펜을 누르고, 이상우에게 준비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자, 보라님과 총 4회 수업을 통해 최종적으로 타르트 케이크를 만들 예정인데요, 오늘은 먼저, 타르트 반죽을 밀대로 밀어 타르트 틀을 구워내는 작업을 해 볼게요.”
두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시간의 흔적은 내 플랫슈즈와 정장바지 여기저기에 묻은 밀가루와, 테이블 위에 놓인 오늘의 작업 결과물로 남았다.
“첫 시간인데 잘 따라 오셨어요. 오늘 했던 타르트 틀 만들기 작업은 4회 동안 매 시간 반복해서 해 볼 거예요. 오늘 만든 크렘 파티시에의 경우, 오늘은 첫 시간이라 믹스를 사용했지만 다음 시간에는 직접 재료를 계량해서 만들어 볼게요. 오늘 고생해서 직접 만드신 과일타르트 맛있게 드시고,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앞치마를 풀어 테이블 위에 얹었다. 너무 모서리에 놓았는지 앞치마가 스르륵 바닥에 떨어졌다. 주우려다가 잠시 멍하니 앞치마를 바라봤다. 바닥에 떨어진 건 앞치마만은 아니었다. 매장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 쏟아진 정신을 주워 담고, 수첩과 펜도 가방에 담았다. 유리문을 밀고 나갔더니 이상우가 매장 직원과 얘기 중이었다.
“유정씨, 수고 많았어요. 얼른 퇴근하세요. 보라님, 여기. 오늘 만드신 타르트 상자에 담아뒀어요. 상자에 넣으니까 더 예쁘네요. 처음 해 보신 분 같지 않게 정말 잘 하셨어요.”
정말 잘 해서 하는 칭찬인지, 적당히 잘 했는데 더 잘 하라고 하는 칭찬인지 구분하지 못 하고, 이상우의 배웅을 받으며 ‘G’를 나섰다.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바로 앞에 보이는 느티나무 공원으로 들어가 제일 먼저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도 내 플랫슈즈에 묻은 밀가루가 눈에 거슬렸다. 가방에서 휴지 한 장을 꺼내 대충 닦아냈다. 휴지 버릴 곳을 찾아 고개를 돌리니 타르트 상자가 보였다.
“오늘 뭐 한 거지.”
제대로 닦이지 않은 것 같아 한 번 더 닦아내려고 몸을 숙이려는데, 그림자 하나가 내 발 끝을 덮었다.
“굳이 금요일 저녁에 베이킹클래스를 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구나.”
낮은 목소리 하나가 발등으로 떨어진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 앞에는 안개 낀 태영이 서 있다.
“오늘 여러 번 깜짝 등장이네. 지금도 ‘나’ 기다린 거야?”
오른쪽 집게손가락으로 쇄골을 눌렀다.
“응. 꼭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뭔데? 꼭 묻고 싶다는 거?”
이 말을 해서는 안 됐다. 이런 흐름이라면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한다. 피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질 못 했다. 지금 태영의 색이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색이 보이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난 무슨 색이야?”
“지난번에도 물었잖아. 넌, 바다색이….”
“그 대답이 아니야. 난 무슨 색이야?”
“…넌….”
“이보라, 난 무슨 색이야?”
“넌…. 넌 붉은 색, 어두운 붉은 색. 차가울 땐 가을에 어울리는 립스틱이 생각나고, 따뜻할 땐 벽난로가 떠올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고개를 숙이고 해 버렸다. 꽤 긴 정적이 흘렀다. 발끝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태영과 눈을 마주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머리 위로 큰 손이 이불처럼 덮였다.
“이제야 너만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았어.”
“나만? 그럼 너도 볼 수 있어?”
태영의 손을 밀어내듯 고개를 들고 머리 위가 아닌 눈을 봤다.
“대답해. 너도 볼 수 있어? 나만 안 보이고?”
“어떨 것 같은데?”
“어떨 것 같다니? 말해.”
“이보라, 너도 날 좀 궁금해해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곧 또 보자.”
“야, 남태영! 남태평양!”
태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며 벌써 저만치 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