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점심 식사를 마치고 인석은 하 대리와 황유나 사원과 함께 양재천 산책로를 걷었다.
세 사람은 각자 한 손에 테이크아웃커피 잔을 성화 봉송하듯 각자 들고 영동교 방향으로 나란히 걸었다.
계절은 벌써 10월 하순에 접어 들어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산책로 초입 주변에 복자기와 당단풍나무의 화사한 나뭇잎들이 가을의 파란 하늘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단 아쉬운 것은 이 좋은 풍경을 세 사람만 즐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인근 직장인들이 상큼한 가을의 냄새를 맡고 이곳으로 모여 들었다. 따라서 산책로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로 지나다니기조차 어려웠다.
세 사람은 처음엔 나란히 걷다가 사람들에 이리저리 떠밀려 나중에는 하 대리와 황유나 사원이 앞서 걷고 인석이 뒤 따라 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하 대리는 오늘따라 장밋빛 카디건으로 멋을 냈다. 안에 받쳐 입은 흰색바탕에 파란색 세로 줄무늬 셔츠는 장밋빛 카디건을 더욱 빛내 주었다.
그 옆에서 나란히 걷는 황유나 사원은 검은색 브이넥 스웨터에 검은색 스키니 진을 입었는데 균형 잡힌 몸매와 젊음이 주는 상큼함에 근접하기 어려울 만큼 눈이 부셨다. 두 사람은 한 쌍의 연인처럼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에 비해 인석은 하얀색 와이셔츠에 군청색 면바지를 입어, 딱 30대에서 40대 직장인이 즐겨 입는 복장을 했다.
앞에 걷는 두 사람은 빼놓을 수 없는 오늘 날씨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서 실험실 안전관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불쑥 하 대리가 고개를 뒤로 돌려 인석에게 어제 부동산중개소 일에 대해 물었다.
“제가 뭐에 홀렸는지 그날 계약까지 하고 왔지 뭐예요.” 인석이 허탈한 듯 말했다.
“정말요?” 황유나 사원이 놀라서 소리쳤다. “양재2동 어디쯤이에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인석이 무안해 하며 말했다. “부동산 사장님 차를 타고 다녀서ㆍㆍㆍㆍㆍㆍ.”
“집이 정말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에요?” 하 대리가 몸을 반쯤 돌려 거의 옆으로 걷다시피 하며 물었다.
“사실 완벽하게 마음에 든 건 아니에요.” 인석이 씁쓸하게 말했다. “전셋집 자체가 거의 없었고, 그 나마 가격대가 맞는 집이 이 집뿐인데, 혹시 누가 먼저 계약할까봐서ㆍㆍㆍㆍㆍ.”
“잘 하셨어요.” 하 대리가 다리가 꼬여 넘어질 뻔하다가 겨우 몸의 균형을 잡으며 말했다. “집이라는 게 살면서 정을 붙이는 거죠.”
“아무튼 환영하고요. 치맥 파티 안 잊으셨죠?” 황유나 사원이 노란 국화꽃같이 활짝 웃으며 말한 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아 묶었다.
“치맥 파티요?” 하 대리가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만 모르는 뭔가가 있는 모양인데ㆍㆍㆍㆍㆍ 저도 껴 주실 거죠?”
“양재2동 주민이신데 당연하죠.” 그녀가 하 대리의 어깨를 장난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세 사람은 소리 내어 웃었다. 섣부른 결단으로 자신의 성급함을 책망하던 인석은 두 사람의 격렬한 환경으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시 앞을 향해 걷고 있는 두 사람을 보자 인석은 문득 부동산중개소 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두 분도 부동산중개소 갔을 때 누군가가 하고 같이 갔었나요?” 인석이 물었다.
“전 혼자 갔는데요.” 하 대리가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그건 왜 물으세요?”
“거기 사장님이 그러시군요.” 인석이 말했다. “저희 연구원 직원들은 모두 둘이서 집을 구하러 오는데 전 혼자 왔다고요.”
자연히 두 사람의 시선은 황유나 사원에게 쏠렸다.
“전 맞아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엄마하고 같이 같거든요.”
“그 사장님 기억이 잘 못 됐네요.” 인석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럼ㆍㆍㆍㆍㆍ혹시 전세집이 거의 없다는 것도ㆍㆍㆍㆍㆍ.” 그가 허탈한 듯 멈춰 서서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설마요?” 그녀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말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몸을 부딪히거나, 몸을 꼬며 세 사람을 피해 가자, 그들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약 1분 정도 걸어가다 하 대리가 멈춰서며 소리쳤다.
“맞아!” 큰 소리 때문에 갑작스럽게 멈춰선 두 사람이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생각해보니까 난 그 부동산중개소에서 계약을 하지 않았네요.”
“어머나, 깜짝이야!” 황유나 사원이 심장에 손을 대고 하 대리를 향한 채 입을 크게 벌렸다. “깜짝 놀랐잖아요, 하 대님.”
“아, 미안 미안” 그가 말했다. “갑자기 생각나는 바람에ㆍㆍㆍㆍㆍ.”
“그러니까 하 대리님은 동산 부동산이 아니라 다른 부동산에서 계약하셨단 말이요?” 인석이 하 대리가 뒤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사람에게 부딪힐까봐 손으로 그를 옆으로 밀며 말했다.
“그렇죠.” 그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말했다.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ㆍㆍㆍㆍㆍ.” 그녀가 날카롭게 말했다. “소리를 그렇게 크게 지르세요.”
“그러게 말이에요.” 하 대리가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뒤통수를 손가락을 쓸었다. “혼자 와서 하든, 둘이 와서 하든, 동산부동산에서 계약하든, 다른 부동산에서 계약하든 아무 상관이 없는데.”
하 대리의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넋두리에 두 사람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다시 걷기 시작한 산책로에는 국화와 갈대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길가를 차지한 채 장관을 그려냈다. 또한 다소 강한 햇볕이 내리쬐는 양재천에는 네댓 마리의 오리가 한가로이 물속을 들여다보며 평화롭게 호시탐탐 사냥을 준비하는 모습도 보였고, 어느새 날아든 학 두세 마리가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니며 사냥터에 합세했다.
산책을 시작한지 40분이 되어 세 명은 다시 연구원으로 올라가는 산책로 분깃점까지 와 있었다.
“어, 저기 최유정 대리하고 김주이 사원이 있네요.” 하 대리가 테이크아웃커피 컵을 나란히 들고 약 10미터 앞서 연구원으로 올라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두 분이 점심같이 하셨나보네요.” 황유나 사원이 언덕길에 숨을 약간 몰아쉬며 말했다.
최유정 대리와 김주이 사원이 연구원 보안장비에 출입카드를 찍기 위해 지체하는 사이 세 사람이 그들 발치까지 이르렀다.
“산책 갔다 오시나 봐요.” 넉살 좋은 하 대리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날씨 좋죠?”
“오늘 날씨 너무 너무 좋아요.” 김주이 사원이 쾌활하게 말했다. “이대로 퇴근해서 멀리 놀러 가고 싶어요.”
“자, 지금 가지죠.” 하 대리가 손으로 안내하는 포즈를 취하며 능글맞게 말했다.
“아-잉.” 김주이 사원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아이처럼 심통 부리는 시늉을 하자, 모두가 웃었다.
즐겁게 농담을 나누는 두 사람과 달리 인석은 최유정 대리와 눈만 한 번 마주치며 고개만 까닥하는 하는 것으로 서로가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 5명이 차례로 후문을 통과해 현관으로 들어서는 통로를 지날 때였다.
“아참, 최유정 대리도 양재2동 살잖아요.” 하 대리가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요?” 최유정 대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 여기 조인석 대리님이 양재2동에 집을 요번에 구했는데.” 하 대리가 말했다. “동산부동산 사장님이 이상한 말씀을 하셨더라고 해서요.”
“무슨?ㆍㆍㆍㆍㆍ”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왜 혼자서 왔냐고 하더래요. 다른 연구원 사람들은 모두 2명이 왔는데.” 하 대리가 말했다.
“그래서요?” 최유정 대리가 눈을 치켜뜨며 쌀쌀맞게 물었다.
“아니 뭐ㆍㆍㆍㆍㆍ.” 하 대리의 귓불이 약간 빨개졌다. “최 대리는 어떤가 해서ㆍㆍㆍㆍㆍㆍ요.”
“전, 혼자 갔어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고 냉큼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항상 얼음장이라고 느끼는 게 나만 그런가?” 하 대리가 투덜거렸다. “이 질문이 그렇게까지 기분 나쁘게 들리나!” 그가 김주이 사원을 보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으이그!” 김주이 사원이 하 대리를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원래 성격이 내성적이시잖아요.”
“내성적하고 부동산하고 무슨ㆍㆍㆍㆍㆍㆍ.” 하 대리가 핏대를 세우려고 할 때 현관 홀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최유정 대리가 보이자 김주이 사원이 재빨리 그의 옷소매를 당겼다.
그들은 어색하게 엘리베이터를 탔고, 모두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냉큼 자기자리로 뿔뿔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