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슥한 밤, 정원의 방 침대 위에서 응급처치가 이루어졌다. 미성은 능숙한 손길로 정원의 상처를 꿰맸다. 어깨에서 빼낸 총알은 침대 머리맡에 있는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침대 위에 걸터앉은 정원은 오늘 받아온 다이어리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따금씩 “아!”라는 단음의 비명을 내지르며 얼굴을 찡그렸다.
“다음부턴 절대 혼자 가지 마.”
“오늘도 엄밀히 따지면 혼자는 아니었어.”
“그런 말이 아니잖아.”
정원이 고개를 돌려 상처 부위를 소독하는 미성에게 말했다. “오빠보단 정시온을 데려가는 게 전력상 유리한데?”
“까분다.”
미성은 “됐다”라고 하며 정원의 어깨에 드레싱을 마쳤다. 정원은 어깨 뒤로 넘긴 옷자락을 가져와 단추를 마저 채웠다.
“어떤 자식이 이랬어, 얼굴은 봤어?”
정원은 고개를 저었다. “검은 후드, 남자, 한국말을 쓰는 한국인, 키는 대략 180.” 그녀는 초점 없는 눈으로 시온의 묘사를 그대로 읊었다.
“어떻게든 잡았어야 했는데, 잡아서 물어봐야 하는데…….” 졸린지 정원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껌벽였다.
“모른다고 잡아떼면 별수 없는 거잖아.”
“이번엔 달라. 나를 총으로 쐈잖아.”
수긍한다는 듯 미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2012년 발신지 불명의 편지를 처음 받은 이후로 네 통의 편지가 더 왔다. 오늘 것까지 총 다섯 통. 편지에 적혀 있는 시간과 장소의 의미 같은 건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가 있으면 정원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다이어리가 전해졌다. 40대 중반의 여성 미술관 관람객, 우편배달부, 꽃집 아가씨, 책가방을 멘 남학생. 남녀노소, 각기 다른 모습의 딜리버러(deliverer)는 어김없이 정원을 찾아왔다. 오늘밤엔 그 역할이 시온에게 떨어진 것이다.
정원의 심문에 이들은 하나같이 다이어리를 누가 줬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사소한 차이는 있었으나 딜리버러들의 증언은 대체로 일치했다. 정원에게 전해 달라는 쪽지가 그녀의 사진과 심부름에 대한 사례와 함께 놓여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지금까지 보여온 루틴을 깨트리는 접근이었다. 일단, 딜리버러인 시온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덕분에 모른다는 말 대신 남자의 인상착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달밤의 추격신을 함께한 남자는 정원을 공격했다. 누군가에 의해 움직인 불특정 다수가 아니었다.
관계자, 라고 정원은 남자를 정의 내렸다.
“그 사람이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어깨에 구멍을 내면서까지 얻어낸 실마리에도 정원은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걱정돼서.”
“고모부?”
“응”이라고 하며 정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6년 전, 신시내티 아트 뮤지엄에서처럼 근우와 조우한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흐릿한 감촉만이 느껴질 뿐, 목소리를 들을 수도 눈을 볼 수도 없었지만 정원은 행복했다. 아빠였으니까.
“아빠 그동안 어디 있었어?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남생이도 나도…… 그리고 엄마도.” 목이 메었다. 침을 꿀꺽 삼켜 넣으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엄마 죽은 건 알아? 그날 병원에 왔다며, 근데 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투박한 근우의 손이 딸아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눈물을 닦아주는 것 말고 뭘 더 할 수 있을까.
“아빠 나, 시간을 여행할 수 있어. 혹시 아빠도 그런 거야?”
정원의 손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근우가 딸아이의 손을 잡아 이끈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정원이 그걸 느낄 수 있게 했다. ‘예’, ‘아니오’일 뿐이지만 처음으로 쌍방간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진 것이다.
“왜 우리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알아?”
좌우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삼촌이랑 축구 보러 갔다가, 경기장에서 처음 그랬어. 아빠도 혹시 그랬어?”
끄덕였다. 이로써 부녀의 시간여행이 출발선을 공유하고 있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며칠 전에 여기로 오란 편지를 받았어. 그거 아빠가 보낸 거야?”
물음이 끝나고도 한참이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근우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단순히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닌 듯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는데 손이 움직였다. 상하로 흔들렸다. 장고의 고민 끝에 나온 대답은 YES였다.
정원은 답답했다. 이런 형태의 만남으로도 충분하다, 여겼던 마음에 욕심이 자랐다. 얼굴을 보고 싶었다. 반가워 웃고 있을까, 미안해 울고 있을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부녀가 헤어진 지 벌써 10년. 강산도 변하는 세월 동안 정원은 숙녀가 되었다. 아빠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게 당연했다.
“내가 아빠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끄덕였다. 방법이 있단 뜻이었다. 정원은 천천히 제 쪽으로 다가오는 손을 바라봤다. 정원의 손끝이 목에 건 반지를 가리켰다.
“반지? 아빠 반지?”
목뒤를 만지는 근우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는 정원이 걸고 있던 목걸이 줄을 풀어 반지를 뺐다. 반지가 정원의 손끝에 닿았을 때 팟, 하고 근우에게 잡혀 있던 팔이 밑으로 꺼졌다. 바닥에 떨어진 반지는 또르르 구르다 자리에 멈춰 섰다. 그렇게 근우는 다시 사라졌다. 물거품처럼.
“아빠한테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몰라.”
정원을 공격한 남자가 아빠와 한 패일 리 없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아빠의 다이어리를 어떻게 갖고 있을까. 생각이 거기에 닿자, 걱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우선은 네 걱정부터 하자.” 미성이 정원의 왼쪽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상처 회복될 때까진 절대 안정. 내일 아버지한테 말씀 드릴 테니까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 있어. 기껏해야 평가전일 뿐이잖아.”
정원은 미성의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그 소리, 삼촌 앞에서도 해라?”
“못할 거 같아?”
미성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분노를 유발할 만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정원도 그 점을 잘 알았다. 굳이 그 말을 더하지 않아도, 미성이 자기 뜻을 관철시키는 데 어려움이 없을 거란 점도.
“아무 말도 하지 마. 일정 원래대로 소화할 거니까.”
“고집 부릴 걸 부려.” “고집? 벨파스트에서 호주프까지 비행기로 두 시간 반이야. 그것도 전세기. 한국은 직항도 없고, 열네 시간 넘게 비행해야 가는데, 어떤 게 더 고생스러울 거 같아?”
잠시 생각을 하더니, 미성이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럼 오프 사이드엔 가지 마. 그거 때문에 진 다 빠지는 꼴은 못 봐. 상처가 덧나기라도 하면 어떡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정원이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며칠 내로 낫는다니까.”
미성은 정원이 들고 있는 갈색 다이어리로 시선을 옮겼다. 정원이 펼쳐 보인 면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웬만한 상처쯤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