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돼.”
공을 잡았다. 펀칭으로 쳐낸 게 아니라 두 손으로 잡았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정원이 공을 잡아내자 “우와!”라고 감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공 진짜 빠르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어요. 이래서 월드 클래슨가?”
정원이 시온의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시온은 그 말이 자화자찬으로 들렸다. 그렇게 빠른 공을 잡은 넌 뭔데.
“공이 덜 감겨서…….”
“아아, 공이 덜 감겼구나.”
“한 번만 더 해요!”
시온이 정원의 옷깃을 잡고 늘어졌다. 정원은 목소리에 여유를 띄우며 말했다. “좋아요.”
오른쪽, 왼쪽, 방향을 바꿔가며 시온은 정원에게 도전했다. 단 한 골도 넣지 못했다. 선수들은 이 진기한 장면을 보며 수군거렸다. 천하의 정시온이 보기 좋게 밟히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히 정원에게로 옮겨졌다. 저 여자 정체가 뭘까, 하고 다들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훈련에 집중해!”
정원의 활약에 가볍게 웃더니, 청준은 두 사람을 구경 중이던 선수들을 제자리로 돌려놨다.
“아이씨!” 집중해서 찬 공을 정원이 막을 때마다 시온은 아쉬움의 탄성을 내질렀다. 어떻게 된 게 차는 족족 방향을 읽힌다. 마치 처음부터 그리로 찰 걸 아는 사람처럼, 정원은 공이 시온의 발을 채 떠나기도 전에 움직였다. 시온은 정원의 반사신경이 토트넘의 주전 골키퍼만큼이나 뛰어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저런 점프력과 반응 속도를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만하죠? 이제 재미 없는데, 나?”
“한 번만, 마지막! 진짜 마지막!”
시온이 또다시 공을 들고 와 서자, 정원은 글러브를 한 짝씩 벗어 던지며 그를 향해 걸어갔다. “들어갈 때까지 찰 참이에요?” 그리고는 시온에게서 공을 빼앗아 골대 쪽으로 홱 던져버렸다. 제법 멀리 날아간 공이 문전에서 리바운드 되더니 데굴데굴 굴러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 “됐죠?”
“소원은 나중에”라고 말한 뒤 정원은 훈련장을 나섰다. 시온은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멍청하게 서 있었다. 충격이 컸다.
“야, 괜찮냐?” 장우가 시온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저 여자 뭐야, 괴물이야?”
“사사형이 실존하다니…….”
“얘는 또 왜 이래?”
호세는 넋을 놓고 정원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소림축구」 아시죠? 방금 거기 나오는 번개손 같았어요, 저분.”
“「소림축구」를 알아, 네가?”
“제 인생 영화인데요?”
축구를 소재로 액션 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준 홍콩 영화 「소림축구」는 1999년생인 호세보다 겨우 두 살 어렸다.
“새로 오신 코치님이라더니, 우리 골키퍼들 전담인가?”
“응, 아니야.” 장우는 다시 시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부상 정도가 심각한데? 회복하려면 시간깨나 걸리겠어.”
* * *
그날 저녁, 대표팀은 버스를 타고 벨파스트(Belfast)로 이동했다. 더블린에서 북쪽으로 145km 떨어진 벨파스트는 버스로 두 시간 가량 걸렸다. 그곳에서 북아일랜드와의 평가전을 치를 예정이었다. 대표팀이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에서 사흘간 머무른 이유는 항공편 문제와 최적의 훈련 여건을 고려해서였다. 평가전을 하루 앞두고, 비로소 격전지로 향하는 선수들의 표정엔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월드컵 전 마지막 모의고사. 특히나 북아일랜드는 F조에서 맞붙을 스웨덴과 매우 유사한 스타일의 축구를 하는 나라였다. 그들의 강한 수비에 맞서 실점하지 않고 경기를 풀어나가는 방법을 모레, 단 90분 안에 찾아내야 한다.
어둠 속을 달리는 차 안에서 둘이 혹은 혼자 따로 앉아, 선수들은 차분히 마음을 다스렸다. 음악을 듣거나, 차창 밖 풍경을 눈에 담거나, 의자를 뒤로 젖혀 잠을 청하기도 했다.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은 청준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이따금씩 엉덩이를 들썩이는 게 자는 것 같진 않았다. 평가전을 앞두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으리라.
정원은 그로부터 두 자리 뒤에 있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선 컨트리풍의 팝송이 흘러나왔다. 「Paper Rose」란 노래였다. 살짝 허스키한 마리 오스먼드(Marie Osmond)의 목소리가 제법 흥겨운 기타 반주에 맞춰 ‘거짓된 사랑’에 대해 노래했다.
-처음 봤을 때, 당신은 참으로 다정해 보였답니다. 하지만 종이로 만들어진 크고 붉은 장미처럼, 당신의 마음엔 그 어떤 감정도 들어 있지 않아요.
심심할 때 들으라며 미성이 만들어준 리스트였다. 가사를 음미하던 정원은 음악을 추천해준 이를 떠올렸다. ‘자기 같은 노래만 듣네’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리듬을 타듯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굴렸다.
지나는 길엔 별도의 세관도 여권 검사도 없었다. 언제 영국령에 진입했는지, 버스를 모는 기사 외엔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다. 널찍한 고속도로를 지나 벨파스트 시내로 들어섰을 때, 하나둘 몸을 일으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버스 기사가 잠시 꺼두었던 실내등을 다시 켰다. 목적지에 다다랐단 뜻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화려한 호텔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호텔을 상징하는 심벌이 제일 먼저 선수단을 맞았다. 전구색의 은은한 조명 덕에 그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한층 배가되었다.
시온은 호텔 키를 받아들고는 곧장 엘리베이터로 갔다. 그가 오늘처럼 조용했던 적은 없었다. 아마도 오후 훈련에서의 일 때문일 듯싶다.
“어디쯤이야?”
밤 열한 시. 정원은 호텔 건물 주위를 배회하며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그녀가 입은 소라색 청바지에 연녹색 트렌치코트는 누가 봐도 외출용이었다.
“……응. 기다리고 있을게.”
이 늦은 시간에 약속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코트 주머니 안에 넣으려는데 바람이 횡 불었다. 더블린보다 더 차갑고 물기를 머금어 묵직한 감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원의 손에 접는 우산 하나가 들렸다. 혹시라도 비가 오게 되면 쓰려고 챙겨 나온 것이다.
로비 쪽으로 몸을 틀려고 할 때, 반대편 모퉁이에서 헉헉대는 소리가 들렸다. 정원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소리를 쫓아갔다. 갈색 벽돌에 대고 공을 차고 있는 시온이 보였다.
승부욕이 강하고, 축구에서만큼은 완벽주의를 추구한다. 그런 탓에, 말로는 즐기면서 공을 찬다고 하지만 부족한 면을 발견할 때마다 스스로를 모질게 채찍질한다. 이것이, 정원이 분석한 축구선수 정시온이었다.
인기척을 내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시온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풀지 않는다면, 그가 오늘 쉬이 잠자리에 들지 못할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다, 정원은 시온에게 들키고 말았다. “한 10분 됐나?”
시온은 공을 한 손으로 들어 옆구리 사이에 낀 채 정원 쪽으로 걸어왔다.
“훔쳐보려던 건 아니고, 말 걸 타이밍을 못 잡았어요. 하도 집중을 하길래.”
“어떻게 한 거예요?”
다짜고짜 묻는 질문에 정원은 “뭐가요?”라고 되물었다.
“어떻게 막은 거냐고요, 아까 낮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