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1일┃
더블린(Dublin)의 오후 풍경은 아침과 사뭇 달랐다. 환한 햇살이 구름을 뚫고 나와 오늘 하루는 맑겠구나, 싶었는데 착각이었다. 오후 두 시를 넘기자 ‘세계의 구름이 시작되는 곳’이란 명성에 걸맞게 검은 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었다. 바다를 타고 넘어와 짠내를 풍기는 바람도 세차게 불어댔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에, 일기 예보하는 사람들이 딱 굶어 죽기 좋은 도시였다.
한국 대표팀은 두 차례의 원정 평가전을 앞두고 전지훈련 차, 이곳 더블린에 위치한 내셔널 트레이닝 센터를 찾았다. 입성 이틀째인 오늘, 현지 환경에 적응한 선수들의 표정이 전날의 비해 밝다.
“아, 쫌! 잘 좀 차라고.” 시온은 대표팀의 막내뻘인 찬영과 짝을 이루어 공을 주고 받았다. 살짝 짜증이 난 듯한 목소리였지만, 얼굴엔 장난스런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팔다리 바깥 면에 형광 노랑색 띠가 둘러진 검은색 트레이닝복, 백호 문양이 가슴팍에 그려진 군청색 패딩 조끼를 입었다. 그러나 코끝까지 끌어올린 넥워머를 하고 있는 건 시온뿐이었다. 다들 답답하다고 거들떠 보지도 않는 걸 시온은 꼬박꼬박 챙겨 나왔다.
시온은 추위에 약했다. 한여름이 아니고서야 팔을 드러내고 경기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장갑을 끼지 않을 땐 소매를 말아 쥐고 달렸다. 반팔을 입더라도 안에는 꼭 컴프레션 웨어를 받쳐 입었다. 여기엔 부상 방지와 운동 효과 극대화란 이유도 따랐다. 프로 선수가 몸 관리하는 건 기본이지만, 시온이 이렇게 자기 몸을 돌보는 건 어머니 때문이었다.
“돈 많이 벌어다 주는 거, 남들한테 인정 받는 거, 다 필요 없어. 엄만 뭐니 뭐니 해도 내 아들 안 다치는 게 제일이야!”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되뇌는 그 말을 시온은 결코 잔소리로 듣지 않았다. 축구 하면서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는 것. 그게, 할 수만 있다면 아들 대신 뛰어주고 싶다던 어머니에게 보답하는 길이었다.
“오, 역시! 프리미어리그 패스!” 아부성 발언으로 찬영은 시온의 짜증에 응수했다. 170을 겨우 넘는 키에 똘망똘망하게 생긴 얼굴. 대표팀 형들이 지어준 ‘까불이’란 별명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도와 적절한 강도! 토트넘은 좋겠어요, 형이 에이스라서.”
“뭐래.” 시온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일반인도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수준의 패스를 두고 하는 소리에 얘가 날 놀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찬영이 찬 공이 시온이 받을 수 있는 반경을 또 벗어났다. “진짜!”라며 후배에게 짓궃은 무안을 준 시온이 가뿟한 걸음걸이로 공을 주우러 갔다. “분데스리가 똥볼.”
대표팀 선수단은 K리그, J리그, EPL, 분데스리가, 세리에A 등 국내를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활동 중인 리거들로 구성되었다. 이는 한국 축구가 성장해가고 있단 방증이기도 했다.
“아직 몸이 덜 풀려서 그래요!”
“몸만 풀다 가게 생겼네, 윤찬영이?”
인천이나 동경에서 출발해 장거리 여행을 한 다른 선수들에 비해 시온은 첫 날부터 여유를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런던에서 더블린까지는 순수 비행 시간이 고작 50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따로 시차 적응할 필요도 없으니 남들에겐 죽을 맛인 훈련도 그에겐 놀이로 느껴졌다. 공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묘기에 후배들이 “우와……”라고 감탄하는 걸 시온은 내심 즐기고 있었다.
“정시온, 너 인마 또 찬영이 괴롭히냐?”
“괴롭히긴 뭘 괴롭혀요! 내가 얘를 얼마나 예뻐하는데.”
수석 코치인 일수가 다가와 시온을 건드렸다. 선수들과 구별되는 회색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있었다. 지퍼를 끝까지 올려 입은 게, 역시나 추운 모양이다.
“그게 문제야. 너의 그 어긋난 후배 사랑. 나한테 들어온 민원이 한두 건이 아니에요.”
“뭐요, 뭐. 내가 뭘 어쨌다고.”
“시도 때도 없이 뽀뽀에 포옹에, 잘하면 고소도 당하겠던데?”
“아아, 프리미어리그 스킨십!” 곁에 있던 찬영이 한 번 써먹은 농담을 재탕했다.
“여기가 런던이냐? 이 진지한 훈련장에서 애정 표현이 웬 말이야. 시정하도록! 알겠어?”
치, 하고 시온은 입술을 쭉 내밀었다. 자식들, 싫다면 싫다고 말할 것이지, 사내놈들이 치사하게 고자질을 하냐.
“어? 정원아……!” 일수가 정원을 알아보고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위로 올린 손도 신나게 흔들어 보였다. 시온을 비롯해 다른 선수들도 일제히 낯선 인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수가 모두의 시선을 정원에게로 집중시킨 셈이다.
정원은 검은색 트레이닝 복 차림에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건장한 사내들만 있는 훈련장은 금녀(禁女) 지대와도 같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무리에 섞여 들었다. 정원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걸어왔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와, 이게 얼마만이야!”
일수는 정원과 가볍게 포옹했다. 둘의 사이가 꽤 친밀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일수는 근우가 ‘FC 서울’의 감독으로 있을 때부터 함께였다. 2002년 월드컵 때, 그는 대표팀의 중원을 책임지며 핵심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선수들과 허물 없이 지내며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던 근우였기에, 일수는 그의 딸인 정원과 만날 기회가 잦았다. 다른 선수들보다 일수가 특히 정원을 예뻐했고, 정원 역시 일수를 잘 따랐다. 그런 둘의 사이를 근우는 은근히 질투했다. 이유 모를 위기 의식까지 느꼈다. 언젠가 딸아이가 “아빠 말고 일수 아저씨랑 결혼할 거야”라고 폭탄선언을 하진 않을까 남몰래 걱정하기도 했다.
“아저씨.”
“떽! 그놈의 아저씨는, 오빠라고 하라니까.”
“잘 지내셨죠, 아저씨?” 정원은 ‘아저씨’란 단어를 부러 강조했다.
“이놈 봐라?” 그는 정원의 목에 헤드록을 걸었다.
“이 진지한 훈련장에서 무슨 짓이에요.” 시온이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일수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정원을 놓아주었다.
“아, 인사해. 둘 다 처음 보지? 얘는 윤찬영, 그리고 여긴 슈퍼스타 정시온.” 일수의 소개말엔 빈정거림이 섞여 있었지만 시온은 개의치 않았다. 슈퍼스타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 같은 게 느껴졌다.
“난 처음 아니지, 경기장에서 종종 봤으니까. 이분들은 날 몰라도.”
“아, 그게 그렇게 되나?”
정원은 “안녕하세요”라고 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자 찬영과 시온도 덩달아 목례를 했다.
“근데…….” 시온이 이맛살을 모으며 정원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익숙한 몽타주였다. “그럼…….” 정원은 걸음을 뒤로 옮겨, 더는 볼 일이 없다는 듯 멀어지려 했다.
“그래, 가. 이따 보자.” 일수가 뒤돌아서는 정원의 등에 대고 말했다.
“어어!” 그때였다. 시온이 갑자기 허공을 손가락으로 막 찌르더니,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의 검지 끝은 정원을 겨냥하고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온은 빠른 걸음으로 정원에게 가 그녀를 돌려 세웠다. “맞죠? 2월에, 안필드 화장실에서!” 이 순간을 벼르고 있었던 사람처럼 표정에 묘한 희열감이 묻어났다.
“네? 그게 무슨.” 그러나 정원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시온의 말을 못 알아듣는 척했다.
“맞는데? 나한테 왜 끼어드냐고, 몸이 재산이면서 그 정도 의식도 없냐고, 기억 안 나요?”
“기억, 안 나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도통…….” 정원은 태연했다. 마치 이런 상황에 대비라도 하고 온 것처럼.
“그래.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냐, 너 지금? 나도 못 알아듣겠다.”
일수까지 합세하자, 시온은 답답한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이 여자분을 봤다구요, 안필드에서, 한 달 전에.” “외국 물 먹은 거 티 내냐? 어순이 왜 그 모양이야.”
“한 달 전에 안필드에서 이 여잘 봤습니다. 됐어요?”
시온과 정원 사이에서 중재자를 자처한 일수가 이번엔 정원 쪽으로 몸을 틀었다. “진짜야? 안필드에 갔었어?”
“아니요, 쭉 한국에 있었어요.”
“미치겠네!” 시온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한국에 있었다잖아, 넌 왜 엄한 사람을 잡고 그래?”
“아니에요, 그날 남자 화장실에서 봤다니까요? 어떤 남자한테 잡혀 있길래 내가 막 구해주고 그랬다고!”
정확히 말하면, 구해준 건 아니었다. 그녀의 요청대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을 불러 온 시온이 다시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땐, 이미 상황이 정리된 후였다. 남자는 사타구니 쪽을 움켜쥐고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정원은 없었다.
“내가 그날 덕분에 얼마나 황당했는지 알아요?”
“덕분에 제가 지금 그러네요.”
“와아, 오리발을 내미시겠다?”
“우리 어디선가 보지 않았어요? 이 수법은 좀 올드한 거 같은데.”
처음 본 여자에게 수작이나 거는 놈으로 몰리자, 시온은 억울함에 목소리를 키웠다. “2월에, 안필드 남자 화장실에서! 어디선가가 아니고!”
“정원아, 너 그만 가라.”
“네”라고 한 뒤, 정원은 유유히 자리를 떴다. 멀어지는 정원을 보며 시온은 뜨거운 감자를 입에 넣은 사람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코치님, 저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 그래, 그렇다고 치고. 얼른 훈련이나 마저 해. 네가 그렇게 예뻐하는 찬영이가 목 빠지게 기다리잖냐.”
정원이 모르쇠로 나오는 마당에 안필드에서의 일을 증명하는 건 현재로선 역부족이었다. 일수에게 떠밀려 자리로 돌아가면서 시온이 체념하듯 물었다.
“저 사람 대체 정체가 뭐예요? 잘 아는 사이 같던데.”
“우리 감독님 영애.”
“우리 감독님 딸이라고요?”
“아니, 내 감독님.”
일수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시온은 힐끔 눈을 들어 일수를 훔쳐봤다. 애수에 젖은 얼굴이었다. 시선을 느낀 일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너도 들어봤을걸?”이라며 운을 뗐다. “2002 월드컵 신화의 주역, 불세출의 명장, 유근우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