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호는 잠에서 깨어났다. 방안은 환해져 있었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감에 은호의 의지와 상관없이 슬픔에 빠졌다. 혼자라는 사실을 매일 아침 깨닫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아빠가 떠난 후 은호가 선택한 것이었기에 은호는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은호는 이불을 몸에 감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베개 밑에 있던 액자를 꺼냈다. 아빠의 사진이었다. 아빠의 사진을 보면 은호는 슬펐지만 혼자라는 생각을 덜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사진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났지만, 이제는 가끔, 아니 자주 사진에 대고 혼자 말도 건넨다. 그렇게 하기 까지 쉽지 않았다. 그만큼 은호는 아빠가 너무도 그리웠다.
.....................................................................
사진 속 선우는 다양한 색깔의 소국이 핀 꽃밭 안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선우는 소국을 좋아했다. 단정하고 선명한 색에 화려하지 않아서 소국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은호는 그래도 꽃은 화려해야 예쁘다고 했지만, 선우는 자신의 취향을 만족스러워했다.
“아빠, 소국이 왜 좋아?”
은호의 질문에 선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언제부터 소국을 좋아했는지 기억하기 위해서.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인사갈 때 처음 사가지고 갔어. 꽃집에 가서 뭘 골라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는데 너무 예뻤어.”
그러고는 선우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은호는 선우의 표정을 보고 선우의 손을 잡았다. 선우는 은호를 향해 웃었다. 자신의 마음이 들킨 것 같아서, 자신의 슬픔을 은호가 눈치 챈 것 같아서 선우는 그냥 웃었다.
“그랬구나. 그럼 나도 오늘부터 소국 좋아해야지.”
은호의 말에 선우는 미소를 지었다. 은호는 소국 속에 선우를 세워두고 사진을 찍었다.
“아빠 멋진 포즈 좀 해봐. 내가 멋있게 사진 찍어줄게.”
은호의 말에 선우는 어색한 듯 그러다가 장난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아빠 좀 멋진데.”
그날 선우와 은호는 소국 속에서 행복했다. 소박하지만, 조그맣게 활짝 핀 꽃들 속에서 위로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은호는 선우에게 물었다.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랑 언제 헤어졌어?”
은호는 궁금했다. 그냥 아빠에 대해 알고 싶었다.
“음... 내가 10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은호는 자신보다 어렸던 아빠를 생각하자 마음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럼, 어떻게 지냈어?”
은호는 아빠가 그때를 무사히 잘 지나왔음에도 바로 지금의 일인 것처럼 걱정스러웠다.
“아빠가 클 때까지 이모가 많이 돌봐주셨어.”
은호는 아빠의 시간들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냥 할아버지, 할머니 없이 지냈을 아빠를 생각하자 마음이 콕콕 아팠다.
선우는 그때가 먼 기억처럼 희미해졌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때의 아픈 기억들이 선우의 삶에서 매 순간 떠올라서 늘 힘들었던 선우였다. 그때의 아픔들은 선우의 기억 속에서 점점 선명해졌고, 어떠한 다른 기억으로도 덮어지지 않았다. 그랬던 선우가 서서히 그때의 기억들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제야 그 사실을 알 만큼 선우의 삶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아빠는 할아버지, 할머니랑 뭘 제일 해보고 싶어?”
은호의 질문에 선우는 지금까지 해왔던 생각들 속을 되짚어 보았다. 선우는 매순간 그런 생각들을 했었다.
“나에게 아빠, 엄마가 있다면...”
선우는 부끄러운 듯, 민망한 듯 말을 시작했다.
“음... 웃지 않을 거지?”
“내가 왜 웃어?”
선우는 은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자신이 신기했다. 은호랑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선우에게 또 다른 위로가 되고 있었다.
“사실은... ‘우리 아빠, 엄마한테 다 말해...’ 라는 말을 해보고 싶었어.”
선우는 그 말을 끝냄과 동시에 가슴 한 구석에서 올라오는 슬픔을 깨달았다. 다시 그때의 어린 선우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목이 메어 왔다
.
“그게 뭐야? 꼬맹이도 아니고...”
은호는 장난처럼 웃다가 선우의 표정을 보고 순간 당황했다. 선우의 눈은 10살 아이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내가 어릴 때 그 말이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다른 아이들이 그 말을 하면 정말 무서웠어. 어느 순간 그 말이 정말 부러웠고, 나도 해보고 싶었어. 정말 너무도 해보고 싶었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다른 아이들의 그 말은 선우에게 무서움이었고 두려움이었다. 아빠, 엄마의 존재는 아이들에게 엄청난 힘이었고, 더 이상 아빠, 엄마의 힘을 가질 수 없는 선우에게 그 말이 주는 위력은 상상이상이었다. 그리고 선우가 커가면서 그 공포는 점점 잡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바뀌고 있었다.
선우는 그때가 떠올랐다. 조그만 아이가 세상에 홀로 남겨져서 버텨내고 견뎌내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자신의 탓이 아님에도 늘 혼자라서 겁이 났고 두려웠다. 매 순간 눈물이 났지만, 울면 안 될 것 같았던 그 아이가 떠올라 선우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아빠, 엄마가 너무도 그리웠다.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아빠, 엄마. 그 사실을 혼자 남게 된 아이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매일 밤 꿈속에서 아빠, 엄마를 찾아다녔다. 한참을 헤매다가 발견해서 다가가면 사라졌다. 그러면 선우는 엉엉 울었다. 그 꿈속에서도 혼자라는 두려움에, 자신만 두고 가버린 아빠, 엄마가 그리워서 그렇게도 울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울음에 한밤중에 깨는 일이 반복되었다.
선우는 그때의 기억 속에서 그 아이를 위로했다. 잘 견뎠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아빠, 고마워...”
선우는 은호의 말에 그 기억 속에서 나왔다.
“응? 뭐가?”
선우는 갑작스런 은호의 말에 물었다. 은호는 야무진 표정으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내 옆에 있어줘서...”
선우는 은호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은호의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이 쉬운 말을 하기 까지 은호는 용기가 필요했다. 진심으로 아빠를 위로하고 싶었다.
“오, 은호 덕분에 아빠 감동했다. 김은호, 넌 걱정 말고 ‘우리 아빠한테 다 말해.’ 실컷 해. 알았지?”
“진짜지? 나 무조건 그렇게 말해버린다.”
은호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선우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선우는 은호가 어른이 될 때까지 늘 옆에서 함께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은호에게 자신이 필요할 때까지. 선우는 자신이 느꼈던 것을 은호는 모르길 바랐다. 이미 엄마라는 존재가 은호에게 없기에 자신은 은호에게 모든 것이 되고 싶었다. 은호가 자신에게 올 것이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선우는 다짐했었다. 그리고 기도했었다. 한 번도 한 적 없고, 그래서 들어준 적 없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간절히 바랐다.
‘저에게 가족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아이를 잘 지키게 도와주세요...’
그것 말고는 선우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