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사랑해요.”
내 위로 덮쳐 온 은오는 나를 끌어안고, 그렇게 말했다.
“진... 당신이 10년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복수를 하고 싶어하는 것 알아.”
은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섰다. 몇 번이고 휘청거리면서도 똑바로 서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민혜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지. 당신이 그 아이를 사랑했던 걸 아니까.”
민혜?
지나가 좀 전에 은오에게 전화를 걸어 이곳을 민혜의 집이니 찾아오라고 했었다. 은오의 말에 진은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 애는 어떤 이들에게 사냥당했었잖아. 당신이 지금 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왜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는 거야?”
“네가!! 그때 그 자리에 있었잖아! 왜 민혜를 흡혈귀로 만들지 않았어!?”
진이 버럭 외쳤다. 내내 침착하던 그가 이성을 잃었다. 어두운 방이 그의 고함으로 울렸다.
“그때…. 말했잖아. 그 애는 그걸…. 원하지 않았어.” 은오는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점점 말할 기운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아니야, 분명히 살고 싶었을 거야. 정말 살고 싶었을 거야! 네가 뭘 알아! 넌 그 애의 마음을 짓밟았어. 그래놓고 그녀를 살리지도 않았지!”
진은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때로는 사람들은…. 그냥 죽음을 선택하기도 해. 그녀도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았고, 흡혈귀로 살아남기를 원하지 않았어. 나도 정말 살리고 싶었지만, 그녀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
“아니야!!!! 아니야!!!!”
진은 손에 들고 있던 칼을 휘둘렀다. 내 앞을 가리고 있던 은오를 밀쳐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칼 끝이 다가왔다. 은오는 다시 달려와 나를 감싸안았다. 그의 등이 피로 흥건해짐을 느꼈다. 진은 그런 은오를 뜯어내며 다시 내게 칼을 휘둘렀다. 순간 은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도망치라고 내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바로 그때 날카로운 비명이 귓가를 때렸다. 동시에 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도 났다.
“여기 있었구나.”
소란의 끝을 알리는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
검게 반짝이는 물이 보였다. 사방은 어두웠다. 아주 인적이 드문 강가 같았다. 나는 시린 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누워있던 내 곁엔 누군가 서 있었다. 낯설었다. 은오도, 지나도, 켄도 아니었다. 그는 서서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낯이 익었지만, 누군지 단번에 생각나지는 않았다. 긴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테르라고 합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누워있던 나를 일으켰다. 흡혈귀 파티에서 봤던 정부에서 일한다는 흡혈귀가 틀림없었다. 그가 내가 정신을 잃기 전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이곳으로 데려와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까 그곳은 너무 위험했어요. 상황은 마무리 됐습니다. 진은 흡혈귀들에게 잡혔습니다.”
“그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지금은 가둬뒀지만, 곧 처형당할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혼란을 준 대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테르는 원칙주의자인 것 같았다. 진은 이제 처형 당할 것이다. 10년 전 사랑했던 한 인간의 죽음이 그를 복수에 집착하게 했고, 그는 나와 은오를 만나게 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약혼자는 죽었고, 그 외에도 다른 많은 희생이 있었다. 믿겨지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이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다.
나는 찬 바람에 따라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봤다. 희미한 달빛이 강을 비추고 있었다.
“은...오는 어디 있나요?”
“피의 저주로 쓰러져서, 지금은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지나가 갖고 있던 저주를 풀 약을 먹었어요. 며칠은 계속 잠이 들어있을 겁니다. 그러다가 깨어나겠죠.”
“네….”
“지금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데려올게요.”
테르는 잠시 자리를 떴다. 나는 도무지 지금 나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잠시 뒤, 한 여자가 나타났다. 몇초 뒤, 그녀가 은오의 어머니인 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는 많이 피곤해 보였다.
"일어났네, 몸은 좀 어떤 것 같아?" 그녀가 물었다.
"...."
갑자기 가슴이 턱 막혔다. 진이 내게 해줬던 이야기가 다시 떠오르며 나를 괴롭게 뒤흔들었다. 내 부모님을 죽인 건 은오라는 것.
"은오는 괜찮아. 지금은 잠든 상태야."
뒤늦게 다가온 켄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어서 밀려오는 모든 기억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링이 나를 걱정스러운 듯 바라봤다.
"진이라는 자의 말대로 은오씨가 정말로 내 부모님을 죽였어요…?"
"그 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진밖에는 몰라." 켄이 답했다.
뒤이어 링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때의 은오라면 그랬을 수도 있어. 너무 쉽게 이성을 잃어버리곤 했으니까…."
"내가 엄마를 닮았대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링이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를 밀쳐내려고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흡혈귀는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강하다.
"미안해...미안...미안..."
그녀가 거듭해서 말했다.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울음이 그제야 터졌다. 한적한 강가에 어린아이 같은 내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오가 말해줬어, 은오보고 죽여달라고 했다며? 진의 복수대로?그건 안돼."
링이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요.... 은오는 내 부모를 기억도 못할 때 죽였어요. 난 평생 가족이 없이 두렵고 외롭게 컸는데. 그게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복수예요…. 나한테는 복수할 자격도 없어요?"
"....이연씨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나는 링의 옷을 잡아 쥐며 흐느꼈다.
"은오씨를 만난 걸 죽을 만큼 후회해요…."
"알아, 알아….“
한참을 울다가 멍해진 내 두손을 잡은 링이 나를 심각하게 쳐다봤다.
"은오가 깨어나기 전에 이곳을 떠나. 우리가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서 이 모든 일은 다 잊고 살아. 은오에게는 네가 떠났다고 말할게. 그러면 만날 수도 없고 마주칠 일도 없을 거야."
켄이 다가와서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나는 은오를 떠올렸다. 그에게서 가능한 한 아주 완벽히 멀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내가 간신히 붙들었던 희망이 다시금 산산조각이 되어 나를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피의 날마다 곁을 지켰던 날들, 마음을 열어가고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 행복을 느꼈던 일들이 모두 거짓말 같았다. 어째서 살면 살수록 절망스러운 일들만 더 늘어가는 걸까. 은오에게 마음을 여는데 아니었다. 사랑한다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켄은 나를 데리고 길가로 갔다. 나는 그가 택시를 잡은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택시가 서자,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나를 끌어 일으켰다.
"일단 타라의 집으로 가자."
택시에 올라타서도 어둠 속만 하염없이 응시하는 내 손을 켄이 꾹 쥐었다.
"은오를 평생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살아."
나는 그를 올려봤다.
"그렇게라도 살아. 죽지 말고 꼭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