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할아버지의 생신
민이는 재수, 유진과 함께 학교 앞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정문을 나온 혜진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다가 민이, 재수, 유진이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민이도 혜진을 보고는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혜진은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유진이의 가슴이 또 뛰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기말고사 시험인데 시험 공부는 많이 했어요?”
재수가 물었다.
“아니요. 많이 못했어요.”
“야, 넌 기분 잡치게 그런 걸 왜 물어? 먹을 때는 먹는 것만 생각하라고.”
민이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유진이, 넌 공부 많이 했어?”
혜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으응? 아니. 별로 못했어.”
유진은 생각지도 못한 혜진의 질문에 당황을 하며 대답했다.
“난 그럼 갈게.”
혜진이 말했다.
“왜? 더 먹지?”
민이가 말했다.
“할아버지 생신이라 일찍 가 봐야 돼. 그럼 다음에 봐.”
혜진은 포장마차를 나갔다. 혜진이 떠나자 심하게 요동치던 유진의 심장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너 혜진씨 좋아하냐?”
재수가 유진이한테 물었다.
“아니야.”
유진은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며 대답했다.
“야, 넌 좀 말 같은 소리를 해라. 얘한텐 희연이 있잖아?”
“희연이는 그냥 소꿉친구일 뿐이야.”
“결국엔 소꿉친구가 연인이 되고 아내가 되는 거야. 나한테 소꿉친구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다 결혼했어.”
민이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말했다.
“어휴, 하여튼 억지는......”
재수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뭐가 억지라는 거야?”
민이가 재수의 발을 밟았다.
“아얏. 야, 너 정말 깡패야? 왜 사람 발을 밟아?”
“또 시작이군.”
유진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쓰레기 하치장은 난지도처럼 끝도 없이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 쓰레기 하치장에서 혜진이 할아버지인 상욱과 김 노인이 함께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고 있었다. 보수도 적고 힘들어서 다들 꺼리는 일이었지만 상욱은 한시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상욱은 일할 때마다 늘 손녀딸인 혜진을 생각했다. 그 아이가 선생이 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맙고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저기 오는 거 자네 손녀 딸 아냐?”
김 노인이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을 보고 말했다. 윤곽이 잡히지 않을 만큼 먼 거리였지만 김 노인은 어렴풋이 보이는 걸음걸이의 자태로 그 사람이 혜진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암만 멀리서 봐도 혜진이의 모습은 영락없는 요조숙녀의 자태였다.
“자넨 정말 손녀 딸 하나는 잘 뒀어.”
김 노인이 부러운 듯 말했다.
혜진이는 할아버지가 있는 곳에 다 와서는 할아버지와 김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뭐 하러 이런 델 왔어?”
“할아버지 보고 싶어서요. 할아버지, 언제 끝나요?”
“금방 끝나. 사무실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예.”
혜진은 말을 마치고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상욱이 일을 끝마친 후 혜진은 할아버지와 함께 쓰레기 하치장을 나왔다. 거리에 스르르 어둠이 스며들더니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할아버지, 우리 외식해요.”
“외식?”
“예. 오늘 할아버지 생신이잖아요? 제가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니가 돈이 어디 있다고?”
“어제 과외비 받았어요.”
할아버지는 혜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말 착하고 고운 아이였다. 혜진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이 착한 딸을 놔두고 먼저 떠난 아들 녀석과 며느리가 원망스러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 주인 아주머니랑 같이 셋이서 외식하자꾸나. 사실 요즘 세상에 누가 주인아주머니처럼 우리한테 잘 해 주겠니?”
“예.”
상욱과 혜진이는 집 앞에 도착했다. 상욱은 문 밖에 서 있었고 혜진이가 주인 아주머니를 데리고 나오기 위해 집안으로 들어갔다. 순영은 마당에서 발을 씻고 있었다.
“이제 오는 거니?”
“예. 아주머니, 우리 외식하러 나가요.”
“외식?”
“예. 오늘 할아버지 생신이거든요. 할아버지는 밖에서 기다리고 계셔요. 같이 오는 길이었거든요.”
“그래? 그나저나 할아버지 생신에 내가 끼어도 되는지 모르겠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한테 정말 잘 해 주시면서요. 같이 가요.”
“그래.”
순영은 다 씻은 발을 수건으로 닦았다.
세 사람은 대성농장이라는 고기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종업원이 오자 혜진은 갈비 4인분을 시켰다.
“뭘 그렇게 많이 시키냐?”
“할아버지 많이 드셔야죠. 아주머니도 많이 드세요.”
“그래.”
순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
전 정말 할아버지가 부러워요. 혜진이 같은 손녀딸이 있으니 말이에요. 저한텐 아무도 없거든요.”
“아들이 둘이나 있다면서요?”
상욱이 물었다.
“있으면 뭐해요? 다 외국에 나가서 연락도 거의 안 하는데. 자식 키워봤자 말짱 헛일이라니까요.”
“아주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바빠서 그런거지 아주머니를 잊은 건 아닐거에요.”
혜진이가 순영을 위로했다.
“아냐. 잊었을 거야. 그 녀석들은 지들이 잘나서 그만큼 큰 지 안다니까. 내가 그 아이들 뒷바라지 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는 까맣게 잊고 있다고. 하지만, 뭐 어떡하겠니? 그게 내 팔자려니 하고 살아야지.”
종업원이 밥과 갈비를 가져왔다.
혜진은 갈비를 불판에 익히면서 할아버지랑 아주머니와 함께 식사를 했다. 세 사람 사이에는 이미 집 주인과 세든 사람이라는 거래 관계는 사라져 있었다. 그들은 다만 가난한 달동네에서 같이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