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대공에게 납치당했다.
#9화_ 소중함
W_아름다운뿌리
루에의 말에 방 안으로 올라온 다연은 문을 닫자마자 문을 등받이 삼아 주저 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루에가 하도 잘해주는 바람에 잠시 착각했다.
이 곳이 안전한 곳이었다고, 이젠 위험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난 공물로 가다 납치된 상황이었고 황실에서는 계속 나를 찾고 있었다.
함부로 돌아다녀서는 안될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안일했다.
오라버니께서 알려주신 호신 검술이 없었더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또 한번 끌려갈 뻔 했어….
그 호신 검도 오라버니께서 억지로 알려주신 거였는데.
*
*
*
“아버지를 도와 교역을 하고 싶어 했다고 들었다.”
“네,제가 아버지를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안된다.”
“오라버니!!”
다연이 재현에게 소리쳤지만 재현은 단호했다.
교역이라는 것은 이방인들을 수 없이 만나고 모르는 사람들을 수 없이 만나는 일이다.
조선이나 타국이나 여자를 차별하긴 매한가지.
다연에게 교역이라는 길은 정말 멀고도 험한 길이였다.
아무리 아버지를 도와 교역을 한다 한들, 결국 아버지 없이는 다연의 힘으로는 힘들 것이다.
분명 그 중에 위협을 당할 것이고, 다치기도 할 것이다.
다연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소중한 누이는 자신의 몸을 혼자서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호신은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녀가 교역을 하게 된다면 다가올 수많은 위협들을 벗어나기 위해 다연의 호신 검술은 꼭 필요했다.
“네가 정 하고 싶다면, 날 한번이라도 이겨보거라.”
재현은 사실 그녀가 포기하길 바랬다.
실력 차이를 깨닫고, 이길 수 없다는 절망감에 교역을 포기하길 바랬다.
아버지를 따라 교역을 몇 번 도왔을 때 그 교역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 지 잘 알고 있는 이재현은 자신의 하나 뿐인 소중한 누이가 그런 위험한 일에 노출되지 않길 바랬다.
하지만 다연은 생각보다 집요했고, 의지도 강했다.
자신에게 검술을 배우면서까지 교역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고, 결국 다연은 교역을 하게 됐다.
그 때에는 이재현도 다연이 자신의 몸 정도는 스스로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실력으로 키웠기에 조금은 안심했다.
그래도 자신이 직접 다연을 지키기도 했지만 다연은 보통 여인들 보다는 훨씬 강했다.
그렇게 키웠고, 그렇게 교육했다.
다연은 그렇게 커왔고, 그렇게 교육 받아왔다.
아주 오랜만에 코를 찌르는 향수에 다연은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 모든 게 무서웠다.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이 공포와 언제 돌아갈 지 모르는 기약 없는 약속이 너무 무서웠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그 가족과 말도 제대로 통하지도 않고 문화가 다른 이 곳이 너무 무서웠다.
호위 없이 나가기라도 한다면 목숨의 위협을 받는 이 곳이 다연은 너무 무서웠다.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에 혼자 붕 떠 있었고 발에는 무엇도 밟히지 않고 손에는 무엇도 잡히지 않았고 주변도 무엇하나 보이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캄캄한 어둠 속에 혼자 갇혀있는 기분이었다.
막막했다.
대공이 도와준다 하더라도 곧 다연은 월경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월경 후에 취급은 또 어찌 변할 지 아무도 모른다.
평화로웠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조금은 엄했지만 다정했던 아버지도, 따뜻한 손길로 항상 얼굴을 항상 쓰담아주던 어머니도, 모르는 것에 대해 항상 열정적으로 가르쳐주던 오라버니도.
모두가 보고 싶었고, 모두가 그리웠다.
모두가 함께했던 그 시절이 너무 그리웠고 가고 싶었다.
그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곳은 다연에게 너무 힘들었다.
언제 깨질 지 모르는 유리구슬 같은 이 평화가 너무 힘들었다.
더 이상 뭘 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당장 내일 자신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울었다.
다연은 판도라에 와서 처음으로 울었다.
“…….”
한편 놀랐을 다연을 달래주러 올라온 루에는 방문 너머로 들리는 흐느낌에 문고리에 올린 손을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었다.
다연이 판도라에 와서 한달 가까이 지냈지만 우는 건 처음이었기에 루에는 그녀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어서 섣불리 다가서지 못했다.
외로웠을 거라.
무서웠을 거라.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이국에 혼자 떨어져 외로웠을 거라.
가족들 다 잃고 혼자 살아남아 무서웠을 거라.
겨우 살아남았다 싶었는데 또 죽을 뻔 했으니 목숨의 위협도 받았을 거라.
여태 다연은 충분히 잘 참아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곳에서 무뚝뚝한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며, 삭막한 저택에서 혼자 지내려니 힘들었을 외로움도 모두 잘 참아내고 견뎌냈다.
한순간에 바뀐 자신의 처지를 모두 납득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납득하고 받아들였고 살아가려 했다.
그녀는 자신의 동기부여가 아니였더라도 충분히 살아남았을 테지.
그런 그녀였기에, 아직 열 다섯인 어린 나이였기에 다연의 감정도 이해 됐다.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녀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지만 감정과 표현에 서툰 루에였기에 다연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루에는 문을 등 받이 삼아 앉았다.
문 너머로 체온이 전해지지 않았지만 루에와 다연은 서로 등을 마주했다.
그 등으로 그의 체온이 전해지길, 감정을 조금은 나눠주길.
또 지금은 등 사이에 두꺼운 나무 문이 있지만 나중에는 두꺼운 경계 없이 서로의 등을 서로 기댈 수 있길 루에는 간절히 바랬다.
곧 흐느낌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마음에 안정을 찾은 다연은 울음을 그쳤다.
한참이나 등을 문에 맞대고 기대 앉아있었던 루에는 다연이 눈물을 멈추고 나서도 한참을 기다렸다.
모든 것이 조용해졌을 때 루에는 조심히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뒤로 넘어지는 그녀의 몸.
루에는 그 작은 몸을 조심히 받아냈다.
“하아-”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받아내지 못했다면 그대로 넘어져 다쳤을 거라.
자신이 그녀의 몸을 받아내서, 그녀가 다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뒤로 쓰러진 그녀는 깊은 잠에 든 것 같았고 루에는 그녀의 얼굴과 몸을 천천히 내려보다 다른 이상한 점이 없는 걸 확인하고 그녀를 안아들어 침대에 눕혔다.
침대에 눕혀진 그녀는 살짝 잠꼬대를 했고 작은 잠꼬대 후에는 조용한 듯 잠이 들었다.
다시 한번 다연이 깨지 않았다는 걸 확인 한 루에는 이불을 그녀의 목 끝까지 끌어 덮어주었다.
“…….”
대책이 필요했다.
언제까지고 황실에게 위협을 받을 수는 없는 상황.
크레아지오네에게 신경을 끄라고 말을 했긴 했지만 명령을 거두지 않는 걸로 보아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최대한 황실과 엮이지 않으면서 벗어나는 그런 대책이 필요했다.
이 작고 여린 아이를 위해서라도, 또 자유를 찾고 싶은 자신을 위해서라도.
*
*
*
손에서 자꾸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에 다연은 잠에서 깨버렸다.
제대로 깨지 않아 겨우 뜬 눈에서는 희미하게 대공이 보였고 다연은 제대로 보려고 인상을 찡그렸다.
“다시 자라.”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렸고 그 목소리가 대공이라는 걸 확신 시켜줬다.
“대공…님?”
다연이 그를 대공이라 부르자 루에의 인상도 같이 찡그려졌다.
“루에라고 부르라 했을 텐데?”
“…….”
잠에서 재대로 깨지 않아 비몽사몽이였지만 루에를 보니 낮에 다친 그녀의 손을 치료하고 있는 듯 보였다.
루에가 자신의 다친 손을 치료하는 걸 깨닫자 다연은 루에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사과하는 다연에 루에는 티는 잘 나지 않았지만 살짝 당황했다.
“뭐가 죄송하지?”
죄송할 이유가 없었다.
다연은 나에게 굳이 허락을 받지 않아도 밖에 나갈 수 있었고, 저잣거리에 나가는 건 자신의 자유였다.
다만 거기서 잘못이었던 건, 다연에게 하녀나 호위를 붙히지 않은 오직 자신의 잘못이 있었을 뿐.
그는 다연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었다.
“멋대로 나가 죄송합니다.”
사과해도 되지 않을 일을 사과를 하자 루에는 너무 미안했다.
모국이었다면 낮처럼 허락도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녔을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공물이라는 핑계로 위험하게 만들었기에 루에는 다연에게 항상 미안했다.
“알고 있었다.”
“…….”
“네가 나가려는 것도 알 고 있었고, 네가 나가는 것도 알고 있었다.”
“…….”
루에는 모든 걸 알고 있을 거라 예상했던 다연은 루에의 말이 놀랍지는 않았다.
“그런 널 막지 않은 것도, 널 지키는 호위를 붙이지 않은 것도 네 잘못이 아닌 내 잘못이다.”
“지리도 모르는 곳에서 무서웠을 텐데 잘 견뎌주었다.”
“위험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다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공이 낯설어 놀랐을 뿐이었다.
자신이 여태 만났던 사내들은 조선의 유교사상에 맞춰 자신들의 자존심이 높았기에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제대로 사과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런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왔던 다연이였기에 사내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건 놀라웠다.
“아뇨,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멋대로 나돌아다닌 건 제 잘못입니다.”
루에가 경고하지 않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위험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어야 했지만 다연은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이국의 대한 동경이었을 수도 있고 루에와 같은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했기에 가능했었던 일이었다.
결국 자신이 안일했었다.
“앞으로는 절대 혼자 나가지는 않겠습니다.”
“그 것이 좋겠다.”
그의 무뚝뚝한 말들에 상처 받았냐 물어본다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손을 잡아 손목을 치료해주는 그의 손길이 어린아이가 아끼고 아껴서 소중히 감춰둔 과자를 겨우 꺼내 먹는 것 같아서.
그의 손길이 자기라도 잡는 듯 아주 조심스러워서.
마치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이 조심스러워서 그의 무뚝뚝한 말들이 상처가 되지 않았다.
그의 빨간 눈에서도 소중함이 엿 보이기에…
다연은 그런 그의 눈빛과 행동을 굳이 그에게 말해 거둬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조그마한 소중함이라도
사람 마음을 멋대로 판단할 순 없겠지만
그 살짝 비치는 소중함이라도, 애정이라도 지금 다연에게는 너무 소중했기에
이 세상에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