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무렵이었다. 시원이가 마무리를 하고 일어설 때 지현이가 불렀다.
“언니! 오늘 잠시 시간 있어?”
잠시라는 말에 시원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갸우뚱하기도 했다.
“왜? 밖에서 해야 할 중요한 얘기야?”
“그건 모르겠는데 방우가 언니한테 부탁할 게 있데. 시간 돼?”
아주 잠시였지만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직접 전화하면 될 일을 친구를 통할 만큼 내가 부담스럽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만이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자식이 직접 전화하면 되지”
지현이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언니는 방우 전화 번호 있어?”
그때서야 시원이가 휴대폰을 쳐다봤다. 어이없어 웃기만 했다.
“뭐야? 전화번호도 없어? 야단 좀 쳐야겠다. 숙녀에 대한 예의가 없어. 그래도 언니! 잠시 시간 내 줄 수 있지?”
“예의가 아니고 모독이지. 그래! 오랜만에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
시원이는 솔직히 화가 나 있었다. 한잔 거나하게 마시고 야단 칠 작정을 하고 차를 회사에 두고 지현이 차를 탔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는 주눅이 들어버렸다. 방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안에서는 방우와 숙이 동생인 영호가 벌써 도착해 굳은 인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영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럼! 이모하고 근식이 형님하고 애인이란 말이에요?”
방우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지현이가 들어와서 영호를 보고 조금 놀라고 있었다. 시원이가 방우를 보고 핀잔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야 임마! 너는 이 누님을 이렇게까지 서글프게 해야 속이 후련히? 어떻게 전화 한 통 없어?”
“허허! 누님이 전화 번호를 줬어야 제가 전화를 하죠. 그 나이도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지현이한테 물어보지도 못하고 속앓이만 하고 있었어요? 아이고! 안타까워라”
좋은 말이 나올 거라는 기대를 가졌으면 애당초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했던 반응이 전혀 아니어서 방우를 민망하게 만들고는 영호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 입장 바꿔 생각해봐라. 너 같은 자존심 안 상하겠어? 그리고 하루 종일 너처럼 여자만 생각하듯이 이 나이에 남자만 생각한 줄 아느냐? 철 좀 들어라. 그런데 이분은?”
방우가 얼른 영호에게 인사를 하라고 한다.
“숙이 동생입니다. 영호야! 인사해라. 이번에 너를 도와주려고 하셨는데 내가 그 놈에게 선방을 날리는 바람에 기회를 뺏겼어”
시원이가 이해를 못해 얼떨떨하게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다. 방우가 시원이 눈을 보고 빙긋이 웃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조금 지저분한 방법을 쓰려고 했잖아요. 이모하고 내 친구하고 뜨거운 관계를 이용해서 골탕 좀 먹이려고 했다. 영호야! 남자나 여자나 나이가 들면 젊은 사람만 좋아하잖아. 이모도 똑 같았어. 이모도 여자잖아. 아마 이 누님도 너한테 지금 곁눈질하고 있을 지 몰라. 너는 그러면 안 되겠지. 지금부터는 더 맑아야 하는데 이런 분 때문에 네 앞길을 막을 순 없잖아. 허허. 누님! 맞죠?”
헛웃음만 치고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쓸데없는 농담인 줄 안다. 그냥 단순하게 얘기해. 괜히 널 나쁜 놈으로까지 비화 시킬 필요가 뭐 있어? 안 그래? 그만큼 골탕 먹였으면 네 원한 다 풀었다고 보는 데 이제 화해하지. 복희 부를까?”
영호가 털털하게 웃으며 방우 손을 잡고 말았다.
“매형! 그렇다고 화살을 우리 누나한테 돌렸어요? 조잔하다. 그런데 의원님하고 잘 아시면서 왜 모른 척하셨죠? 옛날에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방우가 머리를 한번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거 아니야. 어릴 때 집에 오시면 항상 용돈을 주고 가셨어. 세월이 많이 흘려 그 분이 의원에 나올 때 내가 할 일이라고는 잔 심부름뿐이었던 시절인데 그때 영감이 돈을 좀 필요했었어. 어릴 때 준 돈을 갚으라고 대수롭지 않게 농담을 하셨어. 그래서 나도 별생각이 없이 돈은 없으니 보증 서겠다고 하고 돈을 빌려서 선거를 치렀는데 하필 그때 낙선했었어. 집안 어른이라 말도 못하고 혼자 속앓이를 하면서 관계가 소연해지기 시작하고 연락도 끊어버렸지. 선거에 떨어지고 거의 거들이 나 있다는 사실을 내가 가장 잘 아는데 어떻게 돈을 달라고 해. 그렇게 멀어졌다”
영호가 이해가 간다는 듯이 듣고 있다가 편한 사이라 잠시 방심을 하고 말았다.
“형님이 의원님 자리를 물려받을 거란 소문이 떠돌았다던데 그건 사실인가요?”
방우가 약간은 기분이 나쁜 듯이 흘겨보고는 부정은 하지 않았다.
“자식! 깰게 없어 내 뒤까지 깼어. 맞아! 집안 어른이고 우리 조부님과 아버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했으니 당연히 다음은 나를 도울 줄 알았는데 옛날에 음주 운전을 하고 걸려서 도움을 한번 요청했는데 바로 고개 돌리더라. 자기 이력에 흠집내기 싫었지. 그때부터 인간 취급도 안 했다. 아쉬울 땐 손자 뻘한테 살살거리고 똥구멍까지 간지럽게 하더니 끗발이 있으니까 바로 무시하는 인간으로 바뀌더군. 그때 잠시 정치판에 기웃거리다가 그걸 보고는 더러워서 포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의원님 판단이 옮았단 생각을 많이 해. 들춰내면 낼수록 시궁창 같은 삶밖에 안 나오잖아. 가장 먼저가 네 누나하고 사이잖아. 허허! 그 다음으로 이모도 피할 수 없고”
영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말은 왜 해? 참! 복희한테 오라고 해도 되겠지? 이젠 털어야지”
“예! 미리 얘기해주세요. 이 자리에 와서 기절초풍하게 할 수는 없죠”
시원이가 복희에게 전화를 했지만 신호가 가다가 끊기기를 반복했다. 입술이 슬그머니 옆으로 올라갔다.
“방우야! 근식이에게 전화해봐”
방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신호가 가다가 끊기는 걸 봐서는 거기 올라 가는 것 같은데요. 아직도 같이 다니냐? 정말 질기네”
“너 같은 줄 알아?”
시원이가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보내며 비꼬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 시간에 근식이와 복희가 야간 골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프런트에 서서 계산을 할 때 근식이 휴대폰이 울렸다. 누군지 확인을 한 근식이가 전혀 당황한 기색도 없이 계산을 하면서 복희에게 로커룸 번호를 준다. 복희가 머뭇거리자 살짝 찌푸린 근식이 눈이 로커룸으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조르르 로커룸으로 달려 갔다. 마치 말 잘 듣는 새색시 같았다. 찡그린 눈살 하나가 복희를 여전히 제압하고 있었다.
“그래! 오늘 야근이라 곤란하고 다음 주에는 시간이 많아. 그래! 전화할게”
근식이가 뒤를 힐끔 보면서 감시의 눈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