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지 않은 예감이 온 몸을 뒤덮었다. 이시완 사건이후, 성범죄 수사팀 사무실의 분위기는 눈에 띌 정도로 암울해진 뒤였다. 팀장인 상혁이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워보려 애를 썼지만,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시완이 잡힐 때까지는 이 분위기가 계속해서 유지될 것 같다고. 상혁은 추측했다.
짙은 적막이 맴도는 사무실이 오늘따라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수사팀 멤버들 모두 현장에 나가거나, 사무실에 남아 자료를 정리하기 바빴다. 아직까지도, 이시완의 행적은 발견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모든 것이 제 탓인 것만 같았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날, 이시완을 때리지만 않았어도, 아니, 이시완을 취조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유연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묵직해진 마음을 따라 사무실을 벗어나던 걸음도 점차 느려져만 갔다. 느릿한 걸음이 서서히 계단 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유연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느라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유연씨!"
터덜터덜 걸어가던 유연이 갑자기 숨을 들이 삼켰다. 불쑥 다가온 상혁이 뒤에서 와락 유연을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멍하니 서있는 유연을 이상하게 여긴 상혁이 어깨를 잡아 휙 돌려세웠다. 탁 풀린 두 눈이 놀랄 정도로 멍했다.
"유연씨?"
상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연을 살피기 바빴다. 힘이 쭉 빠진 몸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거침없이 말을 이어가는 상혁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연은 얼굴은 여전히 멍했다. 불같이 화를 내는 탓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대충 듣기론 위험할 뻔했다고 말하는 듯했다.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예요?"
상혁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계단을 구를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다가 두고 다니는 건지, 불같이 화를 내봐도, 유연의 표정은 변함없이 평온했다. 아니, 넋이 나갔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듯했다. 이마를 짚어보는 상혁의 행동에 유연은 화들짝 몸을 떨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상혁의 얼굴이 이제 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아."
정신이 멍했다. 유연은 살짝 고개를 틀어 상혁의 손길을 피했다. 넋을 놓고 있을 땐 몰랐는데, 지금 와서 보니 상혁과의 거리가 눈에 띌 정도로 가까웠다. 스멀스멀 뒷걸음질을 치던 유연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시선을 휙 피했다. 와락 열이 몰린 얼굴이 한없이 뜨겁기만 했다.
"정말, 요즘 따라 왜 그래요."
"……."
"어디 아픈 거예요?"
연달아 묻는 물음에도, 유연에게선 도통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상혁은 아프면 잠시 쉬는 게 어떠냐는 말을 하려다가, 금세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창백하게 질린 유연의 얼굴을 보자, 좀처럼 그 말이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사건 해결에 목을 매던 유연이라는 걸, 상혁이 모를리 없었다. 가뜩이나 복잡해진 사건 때문에 힘들 텐데 굳이 더 상처를 주고 싶진 않았다.
"유연씨."
유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귓가가 상혁의 시선을 붙들었다.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상혁은 어렴풋이 추측했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이나, 붉게 번진 얼굴 같은 것들이, 자꾸만 마음을 들쑤셨다.
아무리 편한 사이라고 해도, 남자인 자신을 유연이 좋게 볼리 없을게 뻔했다. 상혁은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섰다. 제 욕심에 유연을 아프게만 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질 않았다.
사과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라서 유연을 끌어안은 것이긴 했지만, 유연이라면 충분히 당황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남자를 무서워하는 유연에겐 큰 공포로 다가왔을 수도 있었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 저 멀리서 상혁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들어보니, 사건에 대한 일 때문에 급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미안해요, 금방 올게요."
상혁은 유연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같아선 더 같이 있고 싶었지만, 부르는 목소리를 보아하니 꽤 급한 일 인 듯했다. 나중에라도 꼭 제대로 된 사과를 해야겠다고 상혁은 다짐한 뒤, 몸을 틀었다.
탁탁, 빠르게 멀어지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유연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눈앞으로 아찔한 계단이 보였다. 그러자, 제 허리를 와락 끌어안던 상혁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을 들쑤셨다.
"아."
유연은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쿵쾅, 큰 소리를 내며 뛰는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
*
유연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건, 밤 11시가 다된 시각이었다. 유연은 사무실에 홀로 남아, 이시완의 행적들을 추적하고 있던 중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숨은 건지, 이시완의 집 근처 CCTV를 다 살펴봐도, 딱히 나오는 것은 없었다. 후, 짙은 한숨을 내쉰 유연이 애꿎은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였다.
"형, 사, 님……."
그때, 유연을 부르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제 감이 틀린게 아니라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익숙한 목소리였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온 몸을 뒤덮었다.
유연은 품속에 숨겨둔 총을 꺼내 조심스레 창가 곁으로 다가갔다. 창문과 창문사이, 약 1M정도 떨어진 옆 건물 창문에 그토록 찾아 헤매던 얼굴이 보였다. 이시완? 유연은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오랜만이네요."
"너, 뭐야."
"총 내리시는 게 좋을 텐데, 지금 내가 누굴 좀 데리고 있거든요."
빙긋 웃고 있는 얼굴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유연은 서서히 총을 내렸다. 패기 좋게 경찰서 앞까지 찾아온 이시완의 모습이 너무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시완은 턱 짓으로 본인이 서있는 창가 안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테이프로 온몸이 칭칭 감긴 채, 천장에 이어진 긴 끈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김, 김주니씨?"
"크으, 한방에 맞추네요. 역시 형사라 이건가?"
유연은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던 탓이었다. 석고상처럼 빳빳하게 굳은 유연을 바라보던 이시완이 킬킬대는 웃음을 흘렸다. 생각보다 사건이 꽤 재밌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이렇게 짜릿한걸 보면, 앞으로의 일들은 더 재밌을게 뻔했다.
이시완은 창가에 제 몸을 바짝 붙인 채,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유연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있었다.
"놀랐어요? 에이, 이걸로 놀라면 안 되는데."
"………."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유연은 흠칫 몸을 떨었다. 예상치 못한 이시완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한 것도 사실이었다. 소름이 돋은 팔뚝이 눈에 띌 정도로 잘게 경련을 했다. 유연은 억지로 시선을 틀었다.
한계가 왔다는 거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아까 전 실수로 약을 챙겨먹지 못한 탓에 정신은 이미 희미해져간 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황한 채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시완을 꼭 잡아야만했으니까. 유연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를 쓰며, 이를 악물었다.
"어? 근데, 되게 신기하네요."
제 턱을 긁던 이시완이 유연을 향해 불쑥 물었다. 아슬아슬한 거리만큼이나, 아찔한 높이가 시선을 붙들었다. 유연이 서있는 건물은 8층이었다. 이시완이 서있는 곳도 마찬가지일게 뻔했다. 꽤 위험한 높이임에도, 이시완은 창문 밖으로 몸을 더 쑥 내밀었다. 유연은 뒤로 물러서는 것 대신, 총을 더 세게 쥐는 것을 택했다.
"남자 공포증 있지 않나?"
"………."
"근데 지금은 멀쩡하네."
이시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 뜨거운 입김이 코끝에서 느껴질 정도였다. 유연은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남자 공포증을 이시완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아아 이 약 때문인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이시완이 무언가를 꺼내 유연의 얼굴 앞으로 불쑥 들이밀었다. 흰 약통이 눈에 들어오자, 저절로 기가 찬 숨이 새어나왔다. 그건, 유연의 약통이었다. 방금 전까지 찾다가 못 찾은 정신과 치료 약 말이다. 몇 시간째 약을 먹지 못한 몸이 자꾸만 아우성을 쳤다.
순간, 더러운 기운이 온 몸을 휘감았다. 저 약통은, 수사팀 사무실 의자에 걸어놓은 재킷 안에 넣어놓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걸 이시완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걸까?'
유연은 다소 놀란 눈으로, 이시완을 쳐다보았다. 이시완은 여전히 웃는 기색이었다.
"어? 총 내리시라니까요?"
총을 꽉 쥐는 유연을 본건지, 이시완은 짜증나는 투로 말했다. 잠시 멈칫한 유연이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이시완에 가려져서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김주니의 몸에 미끌거리는 뭔가가 발라져있던 뒤였다.
"안 그러면, 쟤도 죽어요."
라이터를 꺼낸 이시완이 칙칙, 불을 붙이며 유연을 조롱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예감이 서서히 온 몸을 뒤덮고 있었다.